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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계에는 2PM, 부산에는 2KM이 있다 아이가"

[연재소설 대권무림 25] 에피소드 2. 대권의 길에 펼쳐진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등록|2011.07.21 09:29 수정|2011.07.21 10:03
바야흐로 진보의 합창, 무림의 풍향계에 남동풍이 분다

부산에서, 새로운 무공인 '진보기치권'에 대한 모의고사가 열렸다. 각각 진보 성향의 재야 무림계의 절대고수들이 모여 있는 항도 부산에서 야심차게 혈장을 꿰뚫는 진보 무림의 전도는 선명했다.

한복농철 기갑거제투사랑(강기갑), 심신취객 병열갈매기공(민병열) 등이 주도된 부산시민무림기취나발방의 활동인 '진보합창권'에는 잔뼈가 굵은 재야의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튕겨나가 '무조건 한나라, 무조건 보수 팍팍' 도방인 부산의 민심 겨드랑이에 붙은 터럭을 자극했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면 육부의 촌장들이 약초 캐는 날, 선도산에 모여 단묘(壇廟)할 때 그 곳에 있던 성모(聖母)가 알을 낳았다 하여 가서 껍질을 벗기니 남아가 툭 튀어나왔는데, 몸에서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박(朴)은 단의 어음 박달(朴達)에서, 혁(赫)은 빛을 이르므로 곧 광명으로 암흑세상을 구원한다는 뜻이라고 '부도지'가 말했다.

유난히 남쪽지방은 삼한 이후로 귀인이 많이 나고 크다는 뜻인 '태(太)' 자가 잘 구르는 땅이다. 그렇다고 현 태왕 무림권력 기관들에 있는 '고소영' 내각이 우리 선조들의 태의 의미와 비슷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작금에 부는 남동풍에는 알을 벗기던 이천 년 전과는 달리 저절로 알이 깨지고 있다는 새로운 특징이 있었다.

이 단원에서는 문자가 필요하다. 저자가 분명치 않다고 전해지지만 한자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대학>의 첫 장(經1章)이다.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는 선치기국(先治基國)하며, 욕치기국자(欲治基國者)는 선제기가(先齊基家)하며, (중략) 욕정기심자(欲正基心者)는 선성기의(先誠基意)하며 치자(致者)는 재격물(在格物)하니라. 격물이후(格物而后)에 지치(知治)하여 심정(心正)하며 국치이후(國治而后)에 평천하(平天下)니라.

학문의 구체적인 과정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팔조목'에 있다고, 강호의 이상사회 요순을 그리워하던 옛 유도(儒道) 무림의 선각들이 말했다.

덕(德)을 밝히는 '지어지선'의 명명덕(明明德)을 실현하려는 유도의 노력은 특히 조선 무림 중후반기, 저 중화의 강호에 있던 한(漢) 무림인들의 나라 명의 패망 후, 조선 유도낙장들(유도천하 시열주자공(송시열)을 위시한)이 주도한 '소중화(小中華) 무림'의 기치를 내세운 역사 이래, 갈고 닦는 수신(修身)은 곧 천하를 움켜쥐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유도(儒道)의 지향, 수신이 이제는 천하가 된 조선 무림의 판도를 뒤엎고 무림정치의 속살을 베어 먹는 일방통행로가 되자, 무도의 외길을 걷던 강호의 은자들이 너도 나도 무도에서 유도로 말을 갈아타고 어패를 차려는 욕망들을 갖게 되었다.

'실전경험이 곧 최고의 무사를 만든다'고 했다. 무도인으로 무공에 전진해야 할 도인들이 입신양명의 길을 좇아 유도(儒道)의 패러다임만을 외치던 무렵부터 조선무림제국의 앞날은 '뻔할 뻔' 자가 된 거였다.

그 좋다는 권세의 달콤함에 공장에서 만든 특제 감미료도 내던지고 서울특별방을 향하여 '돌격 앞으로'를 외치던 부산통정방의 도방들 중에는 그러나 시류와는 단단한 돌벽을 쌓은 특이한 무도인들이 있었다.

힘들게 등단한 무림의회에서 '명패투사권' 을 발동하곤 사라진 이후, 무림의회와 지방도방 선거에서 '맨땅헤딩'만을 거듭하다가 '진채의 곤액' 끝에 태왕위에 올라 무림민주와 민중소통의 도력을 천하에 강림했던 무현태왕이 그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도인, 바로 진중협사 정길백두화랑(김정길)이 있었다. 그가 드디어 무현태왕 때의 고공행진이 낙하하자 은연자작하며 낚시공권으로 나날을 오려내다가 분연히 일어섰다.

뽑기를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안다. 뽑기에 감미가 안 들어가면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느냐? 그 투덜투덜의 깊이를. 어쨌든, 호남의 재야 무림이 요즈음 부산과 영남에 돌고 있는 기류의 형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앗싸, 부산에 바람이 불어뿌네잉. 허벌나게 불어뿌러. 어메, 징한 거. 워메 부런 거. 앗따, 나 잘나갈 땐 왜 저런 바람이 안 불었을까잉."

진중협사 정길백두화랑이 사범들을 모아 놓고 구수한 톤으로 창가 가락을 풀어가며, 평생 쌓아온 도력의 진중함과 강호에서 수 없이 대련하며 단련한 무공의 깊이를 아낌없이 전수했다. 그가 차려 놓은 도방도 아닌데 꽤 많은 수련생들이 최단 기간에 400만을 넘긴 야구 인파로 넘쳐나는 주말의 야구장처럼 몰려들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부산 앞바다에 어어얼싸, 진보 바람 분다. 얼싸 좋네 하 좋네. 바람이여. 에헤라, 부산 땡이로구나. 얼씨구, 지화자 나는야 진짜 부산 싸나이.

한류 거 좋지. 좋잖아. 국위 선양하고 달러 벌어 오구. 요즘 애들 어린 것들이 무공은 몰라도 무도인의 길은 알아. 거 참 신기해. 그래, 그거야. 가요계에 2PM이 있다면 부산에는 2KM이 있는 거야. 예전엔 '여지없는 미역국 보이 투' 2NM이었지만 지금은 달라, 아주 달라. 봉하태왕이 하도 떨어져서 바보라는 닉네임이 붙었었지? 나, 이 사람 진중협사, 무려 5번이나 부산에서 떨어졌어, 무림의회에.

나이? 나야 꽤 됐지. 허허, 이 사람들아, 진정한 무도인은 나이를 초월해. 승만박사공, 대중태왕 다들 몰라? 나는 갈수록 나이를 거꾸로 먹어요. 비결? 홍삼, 산삼 다 필요없어. 정열! 끊임없는 정열. 이거면 돼. 부산에서 제일 쎈 무림의회 도방이 누구야. 어서 나와. 무림의회비무대회에서 나랑 진정한 일합을 겨뤄볼 텨?"

정길백두화랑은 습한 해풍이 일어 훅 하고 불면 남동해의 비릿하고 거친 바람이 서울의 강남 대형외제차에 쓰나미를 안길 것 같은 기세로 우뚝 서려 했다. 그의 뚜렷한 등장은 페이스 북이나 트위터 공장에 내뿜는 굴뚝 연기가 끊이지 않는 것만 봐도 지난 날 온화한 미소로 상징되던 이미지와 대조를 보였다.

칠순이 넘어 검도를 배운 사람이 말했다. '나는 세상에 다시 태어났어요. 검도를 배우고부터 나는 다시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 나는 세 살입니다.' 그렇다면 정길백두화랑은 무림력으로는 이제 한 살도 안 된 거다.

그가 말한 "Mr, M", 특전공수 재인문향이 남동풍의 향기가 식어서는 안 된다는 영남권 재야 무림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길거리에 발도장을 쿡쿡 눌러 찍더니, 어느덧 현실과 무량대수로 연결된 숫자 놀음에 뚜렷한 꼭지점을 찍는다.

"청와궁의 태왕 보좌법령으로 승정원 승지를 지냈다고 다 법부령의 판서를 하지 말라는 말은 없는 거지요. 나도 무현태왕을 보좌하고 물러날 때, 법무령 판서로서 나의 무법공력을 전파하고 싶었는데, 어떤 도방의 반대로 좌절됐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법무령 판서의 책무는 검찰 무림의 심도 있는 무공확대와 무림 정치에 대한 절대 중립입니다. 헌데. 지금 법무령 판서가 되려는 사람은 무림공권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던 참여공국 무현태왕의 업적을 과거 시계로 돌려놓은 사람이예요. 이거 안 돼요. 안 됩니다. 한나라도방, 청와궁, 반성문 쓰세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림 정치 도의상 이런 시츄에이션은 아주 제로예요. 제로베이스."

해운대와 송정 앞바다를 적시던 해풍이 달맞이 길에 지중해의 풍경으로 진열되어 있는 카페촌의 구수한 에디오피아 커피 원액을 만나 하트 무늬를 색색의 스티커로 날릴 즈음, 부마민주항쟁으로 대한민주무림대국에 민주화를 앞당긴 또 다른 바람은 진숙인권기치랑의 고공크레인을 뜨겁게 감싸며 한반도 전역에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폭풍을 정성스럽게 전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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