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에 맞서라, 예수가 명하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십자군 이야기1>
▲ 책겉그림〈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 문학동네
그건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늘 되풀이 된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게 그것이다. 로마 집정관 체제도, 황제의 권력 체제도,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도 결코 다르지 않다. 다만 옛날에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신분상승제도가 있었지만 오늘날엔 그 일이 하늘에서 별 따기처럼 어렵다. 개인이 지닌 능력이 집단이 휘두르는 체제에 쉽게 정복당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오늘을 사는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한 이야기는 뭘까? 교황과 황제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과도한 십자군 전쟁을 촉발시켰고, 자기 최면에 빠진 은자 피에르를 중심으로 무지한 군중들이 집단 최면에 이끌려 십자군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집단 이기주의가 십자군을 제창케 했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통해 '성지 탈환'에 대한 일장 연설을 다음과 같이 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는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장해 너희 형제를 공격하고, 죽이고, 납치해 노예로 삼고, 교회를 파괴하고, 파괴하지 않은 곳은 모스크로 바꾸고 있다. 그들의 폭력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에게 맞서 일어설 때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히 약속한다."(24쪽)
▲ 책겉그림〈십자군 이야기1〉 ⓒ 문학동네
더욱이 제 5차 십자군과 관련된 휴전 체결 이후, 술탄을 방문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손짓을 보여주는 판화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수도사들은 대부분의 십자군 전투에 참전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게 의무였다. 이탈리아 출신인 성 프란체스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적 대장 술탄에게 직접 찾아갔던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기 위해 신이 보내서 왔노라고 말하는 수도사에게 술탄도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확립하는 길이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는 젊은 수도사에게 술탄 휘하 사람들은 더할 수 없이 격양했다. 그러나 술탄은 미소 지으며 수도사를 그리스도교군 진영으로 무사히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140쪽)
다시 <십자군 이야기1>로 돌아와, 1099년 7월 15일에 드디어 십자군 부대가 예루살렘 성읍을 탈환하게 된다. 그야말로 원정을 떠난 지 3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었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 나타난다. 성을 점령하기 전까지는 서로가 한 데 뭉쳐서 하나로 공략해 들어갔지만, 성을 함락시킨 이후 18년 동안의 주도권 다툼이 그것이다. 더욱이 십자군을 제창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도 성지 탈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채 죽었기에,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대주교가 열중했던 것은, 예루살렘에 감추어져 있다고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였다. 사실은 그저 평범한 나뭇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이 나뭇조각을 끼워 맞춘 십자가는 '성십자가'(True Cross)로 불리며 이후 십자군이 군사행동을 할 때면 어디에나 받쳐 들고 다니게 된다."(243쪽)
이 이야기가 내게는 너무 재밌게 다가 왔다. 물론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을 법하다. 어쩌면 이때 발견된 나무 십자가 덕에 1571년 때까지, 최초의 십자군으로부터 5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레파톤 해전까지, 피 터지는 전투에 임했는지도 모른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는 자유와 해방의 십자가였다. 하지만 교황과 결탁한 권력의 수뇌부들은 그 당시의 나무 십자가를 그처럼 전쟁을 위한 십자가로 미화시켰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도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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