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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질 솟구치던 그때, 벌써 그립구나

[몽골·러시아 여행①] 도망치듯 향한 몽골 울란바토르

등록|2011.07.26 18:57 수정|2011.08.04 13:59

몽골 전통 의상몽골 18개 소수민족 축제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몽골인들. ⓒ 한성희




얼마 전, 지루한 장마가 잠시 끝나고 파주시 적성면 한적한 농촌 풍경이 펼쳐지는 국도를 따라 차를 몰았다. 그때, 가을 하늘처럼 새파란 하늘에 하얀 솜털 같은 구름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아, 저 모습은.

뭉게구름 파주시 적성면에서 바라본 하늘 ⓒ 한성희





그래, 바로 불과 며칠 전, 몽골 녹빛 대초원 지평선에 맞닿은 뭉게구름과 그 하늘이었다. 몽골의 구름과 하늘이 이렇게 빨리 그리워질 줄이야. 끝없이 펼쳐지던 초원에서 한가롭게 움직이는 양떼, 말, 염소, 소떼에서 풍기던 냄새에 솟구치는 구역질을 참던 그때가 벌써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변하다니. 바이칼의 철썩이는 파도소리도 귀에 선하다.

몽골의 초원테를지로 가는 길에 펼쳐진 초원의 구름과 지평선. ⓒ 한성희



"언니, 우리도 가자!"
"그럴까."


지난 2월, 윤 박사와 똑순이, 나, 이렇게 셋이 모처럼 만나 점심을 나누던 중에 윤 박사는 7월 쯤 한국사회정책학회에서 몽골과 러시아에 세미나 차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던 똑순이가 갑자기 우리도 따라 가자고 나를 충동질 한 것이다. 요즘 몽골이 뜬다면서. 그러자고 무심코 대답한 이 말의 덫에 걸려 6월 28일 몽골 울란바토르행 비행기에 타게 됐다.

"그런데…. 몽골이 하도 가난한 나라라서 비용은 자비 부담이야."

윤 박사는 몽골 정부 초청이며 함께 가는 건 문제가 없지만 비용은 본인 부담이라고 말했다. 작년 여의도에서 열린 한·몽 국제 노동복지 세미나에 똑순이와 함께 참석했었는데 올해는 몽골에서 한국, 몽골, 러시아 브리야트공화국 국제 학술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언니, 돈 좀 모아둬라. 우리 꼭 가자."

똑순이는 말 그대로 '똑 부러지는' 작은 몸집의 여인이다. 모 환경회사 상무이사로 재직 중인 커리어우먼에, 살림은 물론, 회사, 단체, 관계된 모든 일에 '똑' 소리가 날 만큼 일을 완벽하게 해낸다는 것이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녀와 정반대로 나는 어떤 일이든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어리바리하고 멍청한 구석이 있는 여자이기에 항상 똑순이의 걱정을 듣는다.

전통의상 6월 29일 울란바타르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열린 18개 민족 축제에서 만난 몽골인. ⓒ 한성희



몰래 도망 친 몽골 행

"창간 20주년을 앞두고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짐작한 대로 대장은 펄펄 뛰었다. 6월 28일로 날이 잡히자 5월 말에 항공료와 비자 비용를 입금시켜버렸다. 7월 15일 신문사 창간 20주년 특집을 준비해야 한다는 대장의 반대를 알기에 '이미 돈을 냈다는데 어쩔 것이야'하는 배짱이었는데 돈을 물어준다며 가지 말라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10일 일정을 1주일이라고 슬쩍 줄였는데도 더 길길이 뛴다.

"안 가면 될 거 아냐!!"


홧김에 꽥 소리쳤지만 안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여길 가려고 내가 얼마나 돈 마련에 마음 고생했는데 포기하다니. 두고 봐라, 도망가야지!

보름 동안 미친 듯이 창간 특집기사를 써대고 계획대로 도망 친 6월 28일 오후 7시 30분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똑순이와 나는 "이젠 자유!"를 외치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세미나에 참석하는 교수, 학자 등 10명의 남자에 파주 여자 둘은 공항에서 만나 명함을 나누고 인사를 하며 모처럼 해외여행의 즐거움에 들떴다. 난 미련 없이 휴대전화를 꺼버렸다. 해외로밍 같은 건 안 하기로 작정한 터다. 대한항공 비행기는 예정시간에 출발했고 3시간 30분 후면 울란바토르에 도착한다.

기내식이 나오는 도중, 스튜어디스에게 튜브 고추장을 달라 해서 챙겼다. 똑순이는 한국에서 고추장 한 통, 김, 소주 팩 한 박스, 선물로 준다며 고탄력 팬티스타킹 20켤레를 샀다. 준비성 역시 똑순이답다.

초원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초원에서는 이런 사진 놀이가 가능하다. 똑순이가 포즈를 취했다. ⓒ 한성희


"한국 돌아오면 난 죽지만, 이왕 도망 친 거, 우리 여행 재밌게 보내자!"
"언니네 발행인 만났는데 '때가 어느 때인데 어딜 한 기자랑 가냐'고 윽박 지르더라. 울 사장님도 열흘이나 간다니까 명언 하나 들려주겠대."
"무슨 명언?"
"'공항에 가면 비행기는 항상 있다'고. 큭큭."
"공항 없는 데로 가야겠군."

울란바토르 징기스칸 공항에 도착해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입국 심사에 질질 끄는 공항 직원의 비효율적인 더딘 일처리로 한참 걸렸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마중 나온 몽골 노동복지부 직원들을 만나 미니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가로등조차 없는 2차선 도로를 달리는 미니버스는 덜컹덜컹 흔들렸다. 군데군데 움푹 팬 도로는 언제 포장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고 어쩌다 불빛이 켜진 가게는 주유소밖에 없었다.

숙소인 '앙가라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방을 배정받고 짐도 풀기 전에 레스토랑으로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몽골 노동복지청 '데 초이질수렝' 복지국 국장이 우리를 위한 늦은 저녁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초이질 국장이 이번 세미나가 열리는데 가장 열성적으로 노력했고 성사시킨 장본인이며 몽골에 머물 동안 우리에게 세심하게 정성을 쏟은 분이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을 가진 초이질 국장이 연신 권하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샐러드와 음료수만 홀짝거렸다.

"너무 맛있는데 비행기에서 저녁을 먹어서 배가 불러 못 먹어요."  


통역을 맡은 나라 (울란바토르 대학 가정학과)교수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콜라를 따라준다.

나라 교수는 32살의 젊은 아가씨이며 한국에서 2년 간 대학원 유학을 마쳐서 한국말에 능통했고 세미나 통역도 맡을 정도로 완벽한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지성인이다. 나라 교수는 이후 10일 간 러시아까지 동행하며 우리의 입과 귀가 돼줬다.


게르 테를지 국립공원 게르. 문이 열린 게르에서 하룻밤을 잤다. ⓒ 한성희

침대에 엎드려 한국사회정책학회에서 준비해 온 몽골과 브리야트 공화국 자료를 들여다보다 설핏 잠이 들어 깨어보니 6시다. 샤워를 마친 뒤, 7시에 식사를 하고 세미나 회의장으로 떠나야 한다는 일정 생각에 옆의 똑순이를 깨웠다. 바지런한 똑순이는 벌떡 일어나 샤워를 마치자마자 커피를 가져다 마셔야겠다며 이웃 윤 박사 방에 노크를 했다.

"박사님 일어나세요. 6시 반이예요. 그리고 믹스커피 좀 주세요."


한숨을 푹 내쉬며 문을 열고 내다본 윤 박사가 말했다.

"지금 새벽 5시 반이야…. 시계 안 돌려놨군."
"성희 언니가 늦었다고 깨우는 바람에. 내가 미친다, 언니. 한 시간 돌려야지."

그러더니 두 사람은 일어난 김에 새벽 울란바토르 거리를 걷기로 한단다. 새벽에 산책하는 취미 없으니 나가지 않겠다고 꾀를 부리다가 새벽에 소란 떨며 다 깨운 죄로 끌려 나갔다. 울란바토르의 아침은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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