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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할수록 끈질기게 들러붙는 게 소설이더라"

[서평] 작가폐업 선언 10년 만에 펴낸 배평모 성장소설 <파랑새>

등록|2011.07.28 16:03 수정|2011.07.28 16:04
장마 끝에 퍼부은 폭우는 소시민들의 가슴을 또 한번 할퀴고 지나갔다. 이번엔 부자들이 산다는 강남도 포함되었다. 이번 폭우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고 실종되었으며, 그 가족들은 갑작스런 비보에 통곡했다. 절망적인 소식이다.

반면에 한 시인은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희망을 꿈꾸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에선 이 역시 절망적인 소식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당분간 희망이란 단어를 사전에서조차 지워야 할 듯싶다.

모녀상군인들에게 쫒겨 두 살난 젖먹이를 등에 업은 채 피신하다가 군인에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은 여인 변병생 모녀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제주4.3평화공원에 있다. ⓒ 강기희


불편하고 절망적인 소식만 들려오는 요즘이라 뉴스를 접하는 것도 겁이 난다. 어느 한구석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일도, 잘 익은 수박이 쩍 갈라지면서 내는 상큼한 소식도 없다. 이러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내는 가슴 좁은 소시민들의 일상은 그래서 더 힘들다. 절망의 걸음을 한발 한발 내딛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펼쳐진 한치 앞 세상은 김승옥의 소설에 나오는 '무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4대강 공사로 산천이 이미 의구하지 않았다. 답답한 일상을 이어가던 이때 배평모 소설 <파랑새>를 읽었다. 그의 소설 <파랑새>는 우리들 마음에서조차 사라진 '희망의 새'와 같았다. 잃어버렸던 퍼즐 조각 하나를 찾은 기분도 들었다. 소설가 배평모의 지난 삶을 되짚어 보니 그가 소설 제목을 왜 파랑새라고 지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20세기 말 작가폐업 선언하고 문단 떠났던 배평모

소설가 배평모12년만에 성장소설 <파랑새>를 출간했다. ⓒ 바보새

그에게 소설은 쌀이 되지 못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이십세기 말 자의 반 타의 반 작가폐업을 선언하고 작가라는 호칭을 세상에 반납했었다. 소설을 써서 먹고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체험한 이후였다. 작가이기를 포기한 그가 선택한 길은 가족을 먹일 쌀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러하니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치열한 소설 쓰기'가 아니라  '치열하게 돈을 버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가 돈벌이 터로 찜한 땅은 대학로였고, 가게를 연 배평모는 간판 이름까지 '작가폐업'이라고 붙였다. 처절함이 묻어나오는 상호였다. 그때 그의 나이, 새로운 모험을 하기엔 늦었다 싶은 오십대 중반이었다.

그런 배평모의 사정을 알았던지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작가폐업을 찾아 그를 위로했다. 간판이 흥미로운 독자 중엔 배평모에게 진짜로 작가폐업을 했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이미 몇 권의 소설을 상재한 소설가가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하는 용기가 쓸데없는 객기는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도 처음 그가 작가폐업이라는 강수를 두어가며 글쓰기를 접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었으니 많은 이들이 배평모의 변심에 흥미를 두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그 시절 그의 작가폐업 현장에서 소주를 마시며 그가 오래 전 펴낸 소설 <지워진 벽화>(창비)를 뒤적거리다 묻곤했다.

- 진짜… 작폐했습니까?
- 소설작업라는 게 뭐 우리가 살아가는 일을 기록하는 것이니 일상과 다를 게 있겠어? 삶이 소설이니 그냥 이렇게 살아 보는 거지 뭐.

당시 그의 말 끝엔 스스로 작폐를 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렇게 10년 세월을 보냈다. 이런저런 행사 후 뒤풀이를 위해 찾은 시인 작가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어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베스트셀러나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호기를 받아주면서는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생에 있어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그 시절을 다 보낸 배평모는 결국 작가폐업을 거두고 문학판으로 돌아왔다. 폐업은 있지만 재개업이 따로 없는 문학판으로의 귀환 후 그는 오랜 세월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 지난 10년 세월은 내게 악몽 같은 시기였습니다. 책방 간판을 보는 일조차 쉽지 않았지요. 무엇인가를 외면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습니다. 외면할수록 끈질기게 들러붙은 그 무엇은 결국 소설이었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많은 변곡점들이 있었지만 그 시기처럼 힘들었던 때도 없었습니다.

12년 만에 장편소설 <파랑새>를 출간한 소설가 배평모의 고백은 그러했다. 그래도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던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그는 자신이 속해 있어야 할 땅으로 돌아왔다. 배평모가 다시 소설을 쓰겠다고 하니 격려의 말이 쏟아졌다. 10년 넘게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사람들이었다.

작가폐업 간판 내리고 소설 <파랑새>로 문단에 복귀하다

책표지소설 <파랑새> 표지 ⓒ 바보새

다시 소설을 쓰리라 마음 먹은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제주로 떠났다. 제주에 도착한 그는 피난민촌에서 뛰어 놀고 있는 소년 배평모를 만났다.

"피난민 독종새끼들!"
길수는 몸을 돌리면서 내 발 앞에 침을 뱉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창규와 기문이 경익이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만에 찬 우월감으로 나를 노려보는 길수의 눈길에서 느끼는 굴욕감 때문이었다.
"야, 임마. 돌아서! 한판 붙잔 말이다!"  - 배평모 성장소설 <파랑새> 중에서

소년 배평모는 낯선 땅 제주의 피난민촌에 살고 있는 아이들 한 명으로 살고 있었다. 때는 한국전쟁 중이었고, 제주는 4·3항쟁으로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소설가 배평모는 그 시절을 제주에서 보냈고, 그 시절의 조각이 성장소설 <파랑새>로 만들어졌다.

- 우리 아버지도 그때 산으로 갔어. 광철이 아버지는 악질 순경이었어. 광철이 아버지한테 죽은 동네 어른들이 여럿 있었어. 산사람들이 복수한다고 광철이 어머니하고 삼촌을 산으로 끌고 가서 죽여버렸어. 나중에 우리 아버지는 광철이 아버지 총에 맞아 죽었어. - 배평모 성장소설 <파랑새> 중에서

소년 배평모는 전쟁 중 제주로 피난을 왔지만, 당시 제주는 육지에서의 전쟁보다 더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성장소설이라고 이름 붙인 소설 <파랑새>는 희망 없는 시절의 아이들이 유일하게 품을 수 있는 꿈이었다. 작가 배평모는 소설을 쓰기 위해 제주를 찾으면서 "내가 죽어서 무덤 속까지도 끌어안고 갈 그 불행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그곳을 찾아가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50년이라는 세월과 화해를 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육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제주에 피난민촌을 세웠다는 사실을 나는 배평모의 이번 소설을 통해 처음 알았다. 때문에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4·3때 죽어간 제주 산사람들을 떠올렸고, 해군기지 건설 반대에 나선 강정마을 사람들을 떠올렸고, 제주가 이름만 '평화의 섬'이 아닌 이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그 시절의 제주를 만나는 일도 즐거웠다. 소설엔 잠들지 않는 남도의 역사와 피난민촌 아이들의 삶과 사랑, 제주의 이국적 풍경이 다 녹아 있었다. 더불어 해방둥이로 태어난 작가 배평모의 역사인식이나 그 시기 소년들의 꿈과 이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퍽 흥미로웠다.

소설 말미에 배평모는 '피난민촌의 환경만큼이나 가난했던 이 나라의 정치와 사회의 격변을 겪으며 그 파랑새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현대사의 질곡을 함께한 그 해방둥이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있을까?'라고 묻는 것과 같았다. 작가폐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 배평모처럼 소설속 인물들도 지금쯤 지난 생애를 되돌아보며 파랑새를 그리워하던 그때를 추억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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