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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씨에 조카딸까지... 지옥에서의 5일, 끔찍했다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⑦ 김익환일가 가혹행위 사건] 간첩 혐의로 온갖 고문 당해

등록|2011.07.29 15:57 수정|2011.07.29 15:57
지난해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올해 초부터 진실위 전직 조사관들은 '조사관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조서관 백서' 작업의 마무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함을 벗어나 진실의 조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말]

▲ ⓒ 오마이뉴스 권우성


2005년 12월 5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 진실규명 신청 1건이 접수된다.

사건번호 라-39. 내용인 즉 전남 여천군 화정면에 위치한 백야도에 사는 김익환(남, 당시 42세), 강○○(여, 당시 32세), 김○○(여, 당시 26세) 등 주민 3명이 1971년 9월 20일경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 여수출장소 소속 직원들에 의해 '간첩 혐의'로 강제연행돼 5일 동안 감금돼 고문 당했다는 것이었다. 신청인은 피해자 중 1명인 강○○씨의 장남 김기웅씨였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진실위

김기웅씨가 진실위 문을 두드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씨는 그간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국회, 국가인권위원회, 법률구조공단에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 '국가를 대상으로 싸움을 해봤자 패소할 뿐이다'라는 말만이 돌아왔다. 2004년 10월 29일 국가정보원에 직접 민원을 접수했지만 "관련 기록이 전혀 없어 민원내용의 사실 여부 판단 불가"라는 회신을 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김씨는 청와대 신문고를 두드렸다. <신동아>(2004년 11월호)에 "간첩 누명 쓰고 혹독한 고문 받은 두 여인의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 내용을 첨부해 청와대 '인터넷 신문고'에 민원을 제기한 것. 이에 국가정보원은 "당시 소장은 1975년 10월 중정에서 면직된 후 미국 이민을 가서 현재 근황을 알 수 없고 당시 근무한 직원은 신청인과 관련된 내사나 조사한 사실이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국회와 인권위, 법률구조공단, 그리고 청와대까지 두드렸지만 소득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김씨는 진실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진실규명 신청을 받아든 진실위 상황도 녹록하지 않았다.

당시 진실위는 출범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진실화해위원회 내부에서는 2006년 11월 30일 진실규명 신청 접수 마감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조사관들에게 이왕이면 세상에 잘 알려진 시국사건을 중심으로 조사를 해 빨리 성과를 낼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불과 5일간의 불법감금과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신청인의 주장뿐이며, 수사기록이나 관련기록조차 없었다. 다른 중요한 시국사건을 하지 왜 이런 사건을 하냐는 상부의 질책도 있었다.

프린터도 없어서 발 동동... "공무원 맞냐" 타박도

▲ 2005년 5월 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안'이 재적의원 299명 가운데 250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찬성 159표, 반대 73표, 기권 18표로 통과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그러나 담당 조사관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모든 인권침해 사건은 동등하게 처리한다'는 원칙으로 꿋꿋하게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기록조차 없는 이 사건에서 허공에 퍼즐을 맞추듯이 하나하나 조각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진실위 초기만 하더라도 관련 기관에 협조공문을 보내면 "어떤 민간단체냐", "공무원이 맞냐", "소속기관이 어디냐"며 되물어오기 일쑤였고, 협조도 잘 안 됐다. 그렇기에 모든 공문에 진실위 설립 목적과 취지를 적시해 보내기도 했다. 또 조사 장비도 빈약했다. 휴대용 프린터가 없어, 밤늦게 조사가 끝나면 조서를 프린트할 수 있는 곳이 없어 다음날 PC방이나 관공서를 찾아 조서를 프린트한 후, 다시 찾아 가는 일을 반복했다.

상부에서는 민간 조사관들이 과거 인권침해를 저질렀던 수사관들을 조사하러 간다고 하면 '조서라도 칠 줄 알기에 가는 거냐'며 차라리 만나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심지어 수사기관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에게 기록을 넘겨주고 민간 조사관들은 옆에서 보조만 하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민간조사관들은 빠르게 업무를 습득하면서 특히, 수십 년간 불신이 쌓여 닫혀 있던 피해자들의 입과 가슴을 조금씩 열어갔다. 서울에서 여수 백야도까지 수 차례 왕래하면서 마을 주민들과 간담회, 탐문조사를 했다. 여기에다 당시 중앙정보부 출장소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70년대 항공 사진과 가해자 인사기록카드 등을 차례차례 입수하면서 사건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가해자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사건의 진실은 이랬다.

5일간의 고문으로 모든 게 망가졌다

1971년 9월 20일경 중앙정보부 여수출장소 소속 직원들은 전남 여천군 화정면 백야리 섬마을에 거주하던 김익환(남, 당시 42세), 강OO(여, 당시 32세), 김○○(여, 당시 26세) 등을 '간첩혐의'로 강제연행했다.

김익환 등은 모두 조카딸, 제수 등 일가친척의 관계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사건 당시 김익환은 부면장으로 있으면서 모범 공무원인 '상록수 공무원'으로 뽑혀 대통령 표창을 받은 직후였다. 이들은 6·25 전쟁 시기에 부역혐의가 있는 이웃주민 이OO가 10여 년이 지나 갑자기 나타나 김익환의 어머니 집에 숙식을 하고 섬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사라진 일이 있다는 제보를 들은 중앙정보부 여수출장소 직원들에 의해 연행됐다.

피해자 김익환 등은 당시 중앙정보부 여수출장소 조사실로 사용되던 여수시청 관사(현 동문동사무소)에 5일간 감금돼 조사를 받았고, 조사 결과 아무런 혐의점이 없자 석방됐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김익환은 몽둥이 등으로 온몸이 멍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해 현재까지 왼쪽 어깨가 내려앉은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김OO는 몽둥이 등으로 무차별적 폭행과 협박, 모욕, 가혹행위를 당한 후 그 상처와 정신적 후유증, 고통으로 인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가출했다. 이후 김씨는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고 고립된 채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강OO는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해 그 상처와 정신적 후유증으로 수십 년간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정신감정비용도 지원 못받아... 최소비용 50만원도 차일피일

▲ 김익환 일가 가혹행위 사건을 보도한 2004년 11월호 <신동아>. ⓒ 신동아


이러한 조사과정에서 또 하나의 의혹이 제기됐다. 피해자 김OO씨가 가해 수사관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 김OO씨는 사건 당시 20대로, 부모가 모두 사망하자 작은아버지였던 김익환 집에 양녀로 들어간다. 활달한 성격의 김씨는 마을 잔치 때마다 멋진 노래 솜씨를 뽐내던 예쁜 시골처녀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김씨는 평생을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았고 가해자와 비슷한 남자만 보면 기절하고 말았다. 진실위 조사과정에서도 피해자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실신했다.

다행히 초기 진실위는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급 심리상담사 자격증이 있는 전문계약직 직원을 채용했다(이후 이명박 정부 초기 관련기관 사업비를 축소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서 이 직원은 위원회를 떠나야 했다). 이 여성 조사관의 도움을 받아 조사를 했으나 전문의의 정신감정결과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김OO씨의 정신 감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예산이 문제였다. 일반 대학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으려면 적어도 한달 정도 입원도 해야 하고, 비용도 1000만 원 정도 든다. 그러나 당시 진실위 운영과는 난색을 표했다. 정신감정비용이 예산과목에도 잡혀 있지 않으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차례 담당 조사관이 예산 담당자를 면담해 정신감정비용도 조사비용 예산과목에 확대해석하여 포함시킬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그 금액은 아주 적었다(결과적으로, 상임위원-차관급까지 나서서야 이 문제가 해결됐다). 이에 담당 조사관이 정신과 의사들을 수소문한 끝에 고문피해에 관심을 갖고 있던 조중근 정신과 전문의를 만나게 됐다. 한 달여에 걸쳐 피해자를 서울 신도림에서 경기도 일산의 조 전문의의 병원에 데려가 정신감정과 심리검사를 실시했다.

이후 조중근 전문의는 "피해자 김○○와 강○○는 사건이 재경험되는 듯한 느낌과 불안, 공포, 사건에 대한 악몽, 경계심의 증가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진단기준'에 해당하는 양상을 나타냈다"는 정신감정 보고서를 작성했다.

부끄럽게도 이 피해자 2명의 정신감정을 위해 진실위는 단지 50만 원만을 지출했다. 이 비용도 조중근 전문의에게 지급된 것이 아니라 조 전문의가 피해자 2명에 대한 심리검사를 다른 기관에 의뢰하면서 발행한 심리검사 비용이었다. 심지어 이 금액마저도 두 달여 동안 입금되지 않아 심리검사를 한 기관에서 담당 조사관에게 독촉전화를 할 정도였다.

불법감금기간 짧고 관련기록 없어도... 진실은 살아있다

이러한 1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2006년 11월 28일 진실위는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 국가기관은 "공소시효가 지났다, 조사할 근거가 없다, 관련기록이 없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진실위는 끝까지 진실을 밝혔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입은 피해와 그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피해는 아무리 피해 규모가 작더라도 국가의 책임은 무한함을 보여주었다.

또, 이 사건은 진실위의 여타 사건 조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진실위는 기본법에 적시된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기준을 어디까지 볼 것인지, 불법감금기간이 짧고, 가해자 사망, 관련기록이 없는 사건 등도 조사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으로 "5일간의 불법감금과 가혹행위 주장, 관련기록 없음, 가해자 사망'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을 갖게 됐고, 이후 대부분 사건들도 이를 기준 삼아 조사를 실시했다. 진실위 결정 이후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해 일부 승소했다.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에서 국가는 소멸시효항변을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 사건에서 국가가 피해사실, 가해기관을 은폐하면서 소멸시효 항변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해 피해자들의 청구를 일부 인용하였다

진실위 결정문 말미에는 "이 사건은 고립된 섬마을에 거주하는 힘없는 사회적 약자로 분류될 사람들이 당시 정권의 과도한 반공정책에 희생양이 되어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아무런 저항도, 호소도 하지 못한 채 수십 년간 고통을 안고 살아온 것을 외면해 온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적혀 있다.

이렇듯 진실위는 일반 국민들이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피해에 대해 진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들이 많고, 그 피해를 평생 안고 가는 국민들이 있다. 국가는 무한 책임을 가지고 책임 있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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