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까딱하면 "타당"... 박정희 대통령 형마저도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⑧ 대구 10월항쟁]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로 번져
지난해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올해 초부터 진실위 전직 조사관들은 '조사관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조서관 백서' 작업 마무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함을 벗어나 진실의 조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말]
▲ 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삼국상회(현재 SK주유소) 부근에서 경찰이 진압을 벌이고 있다. 왼쪽에는 시위 군중들이 경찰의 발포에 쫓기고 있고 도로가에는 시민 여러 명이 쓰러져 있다.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1946년 10월 1일, 대구부청과 도청 앞에서는 주부와 어린이 등 시민 10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는 이전에도 꽤 있었다. 1946년 초부터 전국적인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폭등하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쌀 강제수집과 제한 배급정책을 시행했다. 여기에 5월에는 콜레라가, 6월엔 수해까지 겹쳤는데 당국은 방역을 위해 대구로의 교통을 차단했다. 춘궁기에 쌀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교통까지 차단돼 다른 지역의 쌀을 들여오지 못하자 대구 시민들은 대부분 기아상태가 됐고 경북에도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 상태에서 미군정은 일제 때도 하지 않던 보리나 밀 같은 하곡 수집까지 강제 시행했다.
[10월 1일] "배고파 못 살겠다"... 결국 경찰 발포
10월 1일의 '기민(飢民)시위'는 대구공동위원회 인사들의 설득으로 오후 들어 수그러드는 듯했다. 하지만 같은 시각 대구공회당(현 대구시민회관)과 대구역 앞 광장 일대에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과 100여 명의 무장경찰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9월 23일경부터 철도노조를 중심으로 한 9월 총파업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군정은 좌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조선공산당이 강경투쟁노선인 '신전술'로 전환, 조선공산당의 영향 아래 있던 전국노동조합평의회가 주도해 전국적으로 9월 총파업이 일어났다. 9월 총파업은 합법적인 파업이었으나, 대구에서는 협상이 지지부진한 채 파업본부인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이하 시투)의 간판철거 문제로 노동자들과 경찰 사이의 대립이 격화됐다.
10월 1일 오후, 경찰은 대구공회당 인근 시투 사무실의 간판을 철거하고 운집한 노동자들에게 해산을 종용했다. 노동자 외에 도청 앞에서 시위를 하던 시민들도 가세해 그 인원이 1만5000명에 달해 경찰을 포위할 정도였다. 당시 경찰은 친일인사가 대부분이어서 시민들에겐 증오의 대상이었다.
경찰과 노동자들의 대치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고, 오후 6시쯤에는 대구역 앞에서 충돌로 경찰이 중상을 입기도 했다. 결국 오후 7시쯤 위기의식을 느낀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중 1명(김용태)은 즉사하고 1명(이상익)은 중상을 입고 도립의원으로 이송됐으나 이틀 뒤인 3일 숨졌다.
[10월 2일] 대구경찰서 접수한 시위대... 장갑차 몰고온 미군정
▲ 10월 2일 전날 있었던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대구시민들이 대구경찰서를 향해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이튿날인 10월 2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대구의대(현 경북대 의대의 전신)에서 최무학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이 시신 한 구를 들것에 메고 교정을 돌면서 '이 시신은 전날 경찰 총격으로 숨진 노동자다'라고 외치며 학생들의 시위 동참을 호소했다. 이후 1500~2000명으로 불어난 학생 시위대는 중앙통과 당시 경북도청을 지나 대구경찰서로 향했다. 시민들도 합세해 대구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 시위대는 1만여 명 규모였다.
오전 10시, 1만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서 정문에서 무장경찰과 대치하며 '살인 경찰관을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에 권영석 제5관구 경찰청장은 해산을 종용했다. 또한 미군정 경찰부장 프레이저 소좌는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에게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옥 서장은 총기를 무기고에 넣고 경찰 병력을 인근의 본정소학교(지금의 종로초등학교)로 철수시켰다.
1시간 반 만에 대구경찰서를 접수한 시위대는 유치장 문을 열고 구속자 100여 명을 석방했다. 또 학생대표단은 미군정을 상대로 구금자 석방, 경찰의 무장해제, 시위대에게 발포하거나 폭력으로 시위 진압을 하지 말 것 등을 요구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같은 날 아침, 대구역 앞에는 전날 경찰의 총격으로 동료를 잃은 파업 노동자 수천 명이 집결했다. 경찰은 인근 지역의 지원 병력으로 전날의 2배로 불어나 있었다. 노동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던 중, 갑자기 대구공회당 옆 칠성바위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와 함께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탈취한 무기로 무장했던 일부 군중들도 경찰을 향해 발포했다.
▲ 대구 10월항쟁 당시 시신을 촬영한 사진. 번호가 24번까지 매겨져 있어 당시 적어도 24명이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 대구 10월항장 유족회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는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다. 사진에는 거리 한쪽에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 있고 반대편으로 피신한 시위 군중 쪽에는 여러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시신을 촬영한 사진에는 번호가 24번까지 매겨져 있어 당시 적어도 24명이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한 경찰은 "1946년 10월 1일 출동명령을 받고 대구역 앞으로 진압을 나가 철야를 했다. 현장에서 경찰 지휘관이 검지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면서 손가락으로 지시하면 졸병들은 명령에 따라 총을 한 발씩 발사했다"고 증언했다.
대구경찰서 점령 소식이 퍼지자 시내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군중들은 경찰지서와 사택을 공격하고 경찰과 우익인사, 군정관리 30여 명을 살해했다. 최문식, 이재복 등 좌익 지도자 일부는 자제를 요청하는 방송을 했으나, 이미 통제 불가능이었다. 그러나 이일재(당시 화학노조 서기)의 증언에 의하면, 일부 마을에서는 청년들이 자치회를 만들어 질서를 잡고 관공리와 부유한 인사들의 집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빈민들에게 배급하기도 했다.
2일 오후 3시, 미 전술군은 장갑차와 기관총 부대를 앞세워 대구 시내로 들어왔다. 오후 5시에는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들은 장갑차를 시내 곳곳에 배치하고 군중들에게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했으며, 이에 일부는 장갑차 앞에 누워 저항했다.
충청도 등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도 투입됐는데, 그들은 5명씩 조를 짜 길거리나 민가를 수색하며 눈에 띄는 청장년 남성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특히 미군정 반대자가 많았던 남산동의 남산국민학교 인근 마을, 덕산국민학교 윗마을, 자갈마당 주위 마을 등을 주로 수색하여 청년들을 연행했다. 연행한 사람들은 경찰서나 수창국민학교 운동장 등에 수용했고 불응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번져 나가는 항쟁... 민간인 학살은 계속됐다
대구에서 밀려난 시위대는 시 외곽으로 나가 경북 각 군의 농민들과 합세했다. 1946년 초부터 경주, 왜관, 의성, 현풍 등에서 식량공출을 둘러싸고 농민들이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1946년 한 해 동안만 1552건의 소작쟁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경북 전역으로 확대된 항쟁은 몇몇 지역에서는 대구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미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였으므로 진압 또한 훨씬 더 강경했고 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경북 칠곡] 칠곡에서는 1946년 10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에 대구에서 온 시위대와 지역 농민들이 여러 지서들을 습격하고 경찰 3명을 살해했다. 이어 왜관읍 북쪽의 교량 2개를 폭파했으며, 경찰·관리·부호의 가옥을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군중 7명도 사망했다. 각 면을 돌면서 약 2000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3일 오전 6시경 왜관읍에 도착, 시위행진을 하고 칠곡경찰서를 공격, 6명의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서를 점거했다. 이 봉기는 이튿날 왜관읍으로 들어온 충남경찰부대가 진압했다.
이튿날 4일 새벽, 칠곡경찰서를 점거한 시위대들은 경찰이 오는 것을 알고 도피했으나 경찰서 부근에는 비무장한 주민들이 많았다. 1946년 10월 3일은 음력으로 9월 9일 중양절이었는데 당시에는 식량 사정 때문에 추석에 미처 차례를 지내지 못한 사람들이 이 날 차례를 지냈다. 주민들은 이 날 밤 왜관읍 왜관동 곳곳에 모여 차례를 지내거나 문중 모임을 한 뒤, 총소리가 들리자 귀가하지 못하고 칠곡군의 중심가였던 경찰서 부근으로 나와 있었다.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다가 경찰이 발포하자 흩어졌는데, 이 때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 수십 명이 사살됐다. 특히 왜관읍 왜관동 주민들이 다수 살해돼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음력 9월 9일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으며, 남자들이 많이 죽어 사건 직후에는 농사일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4일 오후에는 칠곡군 약목면 동안동 주민 11명이 토벌을 나온 충남경찰부대 경찰에게 사살됐다. 그 전날 약목면 주민들은 약목지서를 습격했다. 이후 1개 대대병력으로 추정되는 경찰들이 이 마을을 포위해 들어왔다. 이에 여성과 노약자는 집안에 숨고 남성들은 도피하다가 논으로 달려가 추수를 앞둔 벼 사이에 숨었다. 그러자 경찰은 논을 포위하고 숨어 있던 사람들에게 일어서면 살려준다고 명령한 뒤, 일어선 주민 11명을 사살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40~50대 남성이었다.
[경북 영천] 영천에서는 10월 3일 오전 1시경 수만 명의 주민들이 봉기해 읍내를 포위, 통신망을 절단하고 군청, 경찰서,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출장소 등과 지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불태웠다. 한민당의 요인이자 악질지주로 악명이 높았던 이인석의 집도 공격을 받았다. 군수 이태수를 포함해 경찰과 관리 16명이 살해되고 이 와중에 주민 24명도 사망했다. 봉기는 금호, 신녕, 청통, 임고, 화북면 등 면 단위에서도 격렬하게 일어나 영천 전역을 휩쓸었다.
영천의 봉기는 5일 대구에 주둔하던 미군과 충남경찰대 등 지원경찰이 들어와 진압했다. 이후 12월 8일까지 사건 관련자 60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됐으며 이 가운데 9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처리와는 별도로 충남경찰부대와 서북청년단이 주민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거나 연행한 사람을 취조하면서 무차별 구타해 상당수의 민간인이 살해됐다. 특히 화북면에서는 주민 6명이 화북면 자천리 오리장림(현 자천중학교 운동장) 등지에서 사살됐고, 화북면 정각동 추곡마을에도 군경이 들어와 주민들을 사살하고 마을 10여 가구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진실위 조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선산 지역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의 주도로 봉기가 일어났다. 박상희는 일제 때 좌우 합작 항일단체인 신간회의 선산지회 간부를 지냈고 해방 후 인민위원회 간부를 지낸 이 지역의 명망가였다. 그는 10월 3일, 2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습격했다. 그는 협상으로 경찰들을 철수시킨 뒤 경찰서 간판을 떼어내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장을 비롯한 경찰관들과 우익정당 요인들을 유치장에 가뒀다. 선산군의 항쟁은 10월 6일 대구에서 온 경기도 지원경찰대에 의해 진압됐다. 박상희를 비롯한 주동자 3명은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논바닥에서 사살됐다.
이외에도 달성, 성주, 의성, 군위, 경주 등 경북의 19개 군에서 항쟁이 발생했으며,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위의 지역과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1946년에 시작된 학살, '연좌제'로 계속됐다
▲ 지난 2006년 대구 10월항쟁의 의미를 기리며 거리행진을 하는 모습 ⓒ 김용한
10월 3일부터 일어난 경북의 항쟁은 10월 6일경 대부분 진압됐다. 하지만 항쟁은 경남과 충남,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와 전라도 등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경찰 및 국방경비대 측 피해자 수는 경북에서만도 사망 82명, 부상 129명, 실종 및 포로 151명으로, 시위대 측은 사망 88명, 부상 55명, 체포 33명으로 집계돼 있다(1946.12.1. 기준). 이 통계는 정확하다고 보기 어려운데, 주민들이 보복을 두려워해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공산당 대구시위원회 위원장 김일식 등 경북 도내의 주요 좌익간부들은 9월 총파업과 뒤이은 항쟁의 주모자로 잡혀 포고령2호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경북에서만 8000여 명이 시위 가담 혐의로 검거됐다.
이와 별도로 민간인 상당수가 재판절차 없이 불법적으로 살해됐으며, 이는 10월 항쟁 발생 후 몇 년간 계속됐다. 증언에 의하면, 1947년에는 대구경북 소속 경찰 외에도 충남·충북·경기도 등 다른 도의 지원경찰, 국방경비대(충남), 서북청년단, 각 지방의 우익청년단·특경대 등이 토벌을 계속했다.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생각한 그들은 주민들에게 사적인 보복도 했다. 진실위 조사에 증언한 경찰 측 참고인들은 당시에는 재판이나 별다른 절차 없이 민간인을 사살하는 일이 흔했다고 진술했다.
1946년 10월 이후부터 1948년 정부수립 이전 희생자 중 진실위에서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60명이다. 1960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이 시기에 경북지역에서 군경에게 피살됐다고 신고된 사람은 157명(이 중 진실위 신원 확인 17명)인데, 이 중에는 10월항쟁 관련 희생자가 상당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학살사건으로는 영천 고경면 서당산 사건을 들 수 있다. 즉, 1947년 8월 중순경 영천군 각 면의 대구 10월 항쟁 참가자와 일부 마을의 면장, 구장, 지역유지들이 경찰 또는 서북청년단원들에게 강제연행된 뒤 영천경찰서 또는 지서에 구금됐다. 이후 그들은 트럭 1대에 실린 채 고경면 창하리 서당산(현재 3사관학교 영내)로 끌려가 함께 사살됐다. 당시 가족들은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면서 수십 명의 시신이 엉긴 채 가마니로 덮여 가매장된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대구 10월항쟁 관련 민간인 학살은 계속됐다. 1949년 6월 초순의 칠곡군 석적읍 벼랑골뿐만 아니라 영천시 대창면 조곡리, 대구 화원면 본리동 부채골, 월성군 안강읍 육통리 능골 등에서도 집단학살사건이 있었다.
대구 10월항쟁 관련자들은 1949년 말부터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도 상당수가 살해됐다. 당시 경북지역의 유명한 항일운동가 채충식의 아들인 채병기는 대구 10월항쟁 관련자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피해 다니다가 1950년 6·25 직후에 대구경찰서 경찰에게 강제연행된 뒤 살해됐다. 또 당시 철도노조에서 활동한 나윤상과 운수노조의 이병옥도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았다.
또한, 한국전쟁 전후에 희생된 민간인 중에는 실제 대구10월항쟁에 가담하지 않았는데도 경찰서 자료에 '10월사건 관련자'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영천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의 경우, 진실위에서 신원을 확인한 사람 중 116명이 진실위가 입수한 영천경찰서 자료에 "10.1사건 당시 암살 방화 등을 하다가 처형된 자", 또는 "10.1사건 가담 주민 납치 공공시설 파괴하다가 처형된 자" 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또 이 자료에는 사건 희생자들의 유가족 중 일부는 당국에 의해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돼 있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자료 작성시점인 1981년까지는 유가족들이 감시·통제를 받거나 연좌제 등의 불이익을 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1946년 10월항쟁은 해방정국 최대의 사건으로 한국전쟁기까지 이어진 민간인학살사건의 출발점이 되어, 사건 발생 당시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 그러나 사건 발생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진상이 일부만 확인되고 있을 뿐, 그 전모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10월항쟁의 배경이 됐던 친일파 청산 문제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공간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한 미국은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가장 큰 변수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대구 10월항쟁을 보면서,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제때 청산하지 못한 것이 역사를 얼마나 왜곡시키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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