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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나오면 '쟁탈전'...최고령 빵집 군산 '이성당'

문 연지 66년....단팥빵 사러 다른 지방에서 오기도

등록|2011.08.05 10:52 수정|2011.08.05 14:33
지난 2일 오후 2시 전북 군산시 중앙로 1가의 한 빵집. 칼과 방패로 무장한 전사들처럼 집게와 쟁반을 들고 배회하는 사람들로 매장이 가득 차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그들의 눈빛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드디어 하얀 모자를 쓴 직원이 제빵실에서 따끈한 빵이 가득한 5단 손수레를 끌고 나왔다.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빵 쟁반을 매대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집게를 든 사람들이 돌진했다. 수북하던 빵은 5초도 되지 않아 동이 났다. 미처 빵을 집지 못한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李姓堂)'에서 단팥빵과 야채빵이 나오는 시간의 풍경이다. 

▲ 단팥빵이 나오자 사람들이 급하게 빵을 집고 있다. ⓒ 김희진


지난 1945년 문을 연 뒤 지금까지 한 자리를 지켜 온 이성당의 뿌리는 일제 점령기인 1920년대 일본인이 운영하던 <이즈모야(出雲屋)>라는 화과점이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한국인 이 모씨가 가게를 인수해 '이(李)씨 성(姓)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는 빵집(堂)'이라는 뜻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러다 지난 해 작고한 오남례씨 부부가 사들여 운영했고 지금은 오씨의 며느리 김현주(49)씨가 경영하고 있다.

▲ 이성당의 변천사. 위에서부터 일제시대, 1960년대, 현재 모습. ⓒ 김희진


변치 않는 빵 맛의 비밀은 '숙성할 시간을 주는 것'

개점 이래 이성당에는 두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 좁은 가게로 시작했던 이성당은 70년대에 확장공사를 했고, 2003년 리모델링 공사 이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손님들의 입맛에 맞춰 빵의 종류도 늘렸고 케이크와 쿠키, 전병, 아이스크림(케키), 팥빙수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제품을 팔고 있다. 리모델링 이후엔 피자와 스파게티 코너도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성당 하면 단팥빵과 야채빵이 최고로 꼽힌다.

▲ 이성당의 대표빵, 단팥빵과 야채빵. ⓒ 김희진


100% 쌀가루 반죽에 달지 않고 부드러운 단팥을 넣은 단팥빵과 각종 야채를 고소한 소스에 버무려 속을 채운 야채빵은 겉을 싼 빵보다 속이 더 많은 게 특징이다. 아침 7시 반부터 3시간마다 나오는 단팥빵과 야채빵은 하루 평균 각각 2500개와 1200개 이상 팔려나간다. 

"수십 년째 단팥빵과 야채빵을 팔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빵 안에 들어가는 소의 양을 줄인 적은 없어요. 물가가 올라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지금의 맛을 지킨 비결이 아닐까 해요."

김현주 사장의 말이다. 이성당의 전통 빵은 지난해 인기를 모은 한국방송(KBS)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영향으로 쌀가루를 자연 발효해 만든 단팥빵, 일명 '탁구빵'이 유행하면서 더욱 주가가 높아졌다. 이성당의 단팥빵을 먹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 '빵'을 소재로 한 인기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 KBS 홈페이지


대구에서 온 최세정(32·여)씨는 "지리산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성당이 유명하다고 해서 어제 팥빵을 사서 먹어봤는데 맛있었다"며 "그래서 오늘 다시 들러 이만큼 사 간다"고 두툼한 빵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성당에 왔다고 해서 항상 원하는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성당의 철학은 모든 빵을 수작업으로 자체 생산하는 것이라 직원 25명이 부지런히 만들어 낸 하루 7000~8000개의 빵을 다 팔면 그걸로 끝이다. 가장 인기가 높은 단팥빵과 야채빵을 사러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손님이 많다고 한다.

대전에서 왔다는 박대웅(25)씨는 "누나랑 내일로(청소년을 위한 철도할인) 여행 중에 여기 단팥빵이 너무 맛있다고 해서 사러 왔는데 다 팔려서, 소보로 등 다른 빵만 좀 샀다"며 아쉬워했다.

"빵을 못 사고 돌아가는 손님들을 보면 죄송하죠. 하지만 반죽에서부터 구워진 빵을 적당한 온도로 식히는 것까지 보통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발효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이스트 등 첨가제를 넣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지금 같은 맛이 나지 않아요. 손님들이 발 길을 돌리는 한이 있어도 원칙을 고수하는 게 저희 집 철학입니다."

▲ 이성당 내부 모습. 발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다. ⓒ 김희진


추억의 맛을 찾아 달려오는 사람들

붐비는 매장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강원식(58), 정식(56) 형제는 이성당이 유년시절 추억의 장소라고 말했다. 군산비행장 근처에 살았다는 그들은 아버지가 월급 받는 날이면 아침 일찍 목욕탕에 가 몸을 깨끗이 씻고 빈해원이라는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은 후 이성당에 오는 것이 하나의 코스였다고 한다. 그 때 먹었던 단팥빵 맛을 잊을 수 없어 전남 광영에 사는 형도, 경남 통영에 사는 동생도 고향에 들를 때마다 이성당을 찾는단다.

"어릴 때랑 사실 맛이 똑같다고 할 순 없지요. 그때는 먹을 게 워낙 귀했던 시절이라 아무거나 다 맛있었죠. 요즘은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옛날 같은 느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곳은 우리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 항상 생각나는 곳이에요."

경기도 안성에서 군산 고향집을 찾아 가족 5명을 이끌고 왔다는 김완철(52)씨에게도 이성당은 특별한 장소다. 

"결혼 전에 이성당에서 아내와 자주 데이트하곤 했었죠. 원래 이 사람이 안양 출신인데 군산에 데려와서 월명산 구경시켜 주고 항상 이성당에 같이 왔어요. 그때가 언제야 벌써... 그렇게 만나서 지금 이렇게 애들 낳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때도 여기서 이렇게 이 빵이랑 팥빙수를 먹었죠."

달콤한 단팥과 생딸기 위에 하얀 찰떡 새알이 수북이 덮인 빙수를 한 입 가득 먹으며 김씨는 잠시 추억에 잠겼다. 이성당에는 강씨 형제나 김씨 부부처럼 아련한 시절의 행복한 기억 속으로 잠시 돌아가고 싶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빵집 유리에 붙어 입맛을 다시던 유년의 기억, 첫 데이트의 설렘, 우정과 사랑의 흔적이 이성당 곳곳에 묻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성당 빵에서는 추억의 맛이 난다'고 말한다. 

▲ 이성당의 제품들. 왼쪽 위부터 빵, 전병, 케이크, 아이스케키, 쿠키, 팥빙수. ⓒ 김희진


외국인도 찾아와 기념 촬영하는 군산의 명물

66년간 중앙로를 지켜온 이성당은 이제 군산시 관광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외지인들이 이성당 건물 앞에서 브이(V)자를 그리며 기념 촬영하는 풍경도 이제는 일상이 됐다. 단체로 여행을 온 손님들이나 외국인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일 충남 보령 청라중학교 역사문화탐방팀 학생 8명을 인솔해 온 유수경(39·여) 교사는 "66년 역사를 담고 있는 현장이라 근대 문화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좋은 체험이 될 것 같다"며 "체인 빵집들과는 다를 것 같아서 아이들한테 가장 독특하고 신기해 보이는 빵을 하나씩 고르라고 했다"고 말했다.

군산미군기지에서 근무 중이라는 제레미아 애쉬(29)씨도 이성당을 둘러보며 신기해했다. 플로리다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는 1년 됐다는 그는 팥빙수를 처음 먹어 본다며 "베리 굿(very good)"을 연발했다. 애쉬 씨를 데려온 동료 이경민(35)씨는 "일주일에 두 번은 이 곳에 들러 야채빵과 샌드위치를 먹는다"며 "전에 다른 외국친구들도 데려왔는데 다들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성당은 그 흔한 인터넷 홈페이지도 만들지 않고, 홍보를 위해 이렇다 할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원칙을 지키며 변함없는 맛으로 반겨주는 이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찾아오는 이에게 언제든 편안히 앉을 자리를 내주는 그루터기 같은 곳. 이성당은 오늘도 달콤하고 부드럽게 추억을 굽는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단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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