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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끼치지 말아야지"... 곡기 끊은 할머니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도시에 있는 아들딸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록|2011.08.05 15:13 수정|2011.08.05 17:56

가정방문진료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보건지소에서 직접 출장을 나간다.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께 침을 놔드렸다. ⓒ 최성규



식물도감을 봤다. 생생한 식물 사진과 자세한 해설. 식물에 얽힌 옛 이야기까지. 옛날 중국에 '민자건'이라는 아이가 살았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의붓 어머니와 살았는데, 새어머니한테는 두 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두 아들에게는 따뜻한 솜옷을 입히고 민자건에게는 갈대 옷을 입혔다. 겉보기에 솜옷과 갈대옷이 모두 두툼하여 아버지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마음씨 착한 민자건은 아무 불평도 아니했다.

어느 날 마차를 몰고 가던 민자건이 너무 추워 벌벌 떠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민자건의 옷을 만져보았다.

"아니 이건 바람이 솔솔 새는 갈대가 아닌가?"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화가 나서 당장 아내를 쫓으려고 했다. 다른 아이 같았으면 박수치며 좋아라 했겠지만 민자건은 눈물로 애원하며 어머니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이를 지켜보던 새어머니는 깊이 감동하여 그 후론 자기 소생과 다름없이 민자건을 대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원나라 사람 곽거업이 선정한 중국 고금의 효자 24인 중 한명이 된다.

"내가 안 먹으면 그이가 음식을 준비할 필요도 없겠지"

효자 이야기를 보니 시골 진료소에 찾아온 노부부가 생각난다. 신 할머니와 김 할아버지. 중풍 후유증으로 오른쪽을 못 쓰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병수발이며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한다. 외조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셈. 몇 년 전 치매가 오면서 할아버지가 짜증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랜 기간 병간호에 지친 탓이었을까?

며칠 전 찾아온 두 분. 공감의 기술이 뛰어난 한방 간호선생님이 침상 옆을 지킨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몇 달 전에 할머니의 요양보호사가 바뀌었다. 그 전에는 억척스럽고 빠릿빠릿한 아주머니가 큰 힘이 되어줬단다. 그러다 친척 아주머니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지떡일 줄이야. 겸업하던 미용실 일이 바쁘다며 할머니 집에 오가는 걸 보기 힘들다.

"친척이 더하네. 그때 아주머니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원하면 바꿀 수 있어요. 당장 말하세요."

옹골차 보이는 할아버지가 이때만큼은 우물쭈물한다.

"아, 미안해서 어떻게 바꾸나?"

무신경한 요양보호사 덕분에 집안일은 할아버지 몫이 되었다. 음식도 만들어 먹이고, 몸도 씻기고 옷도 입힌다. 초로의 노인에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짜증을 주체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를 괴롭히는 건 집안 일만이 아니다. 치매에다가 최근에는 이명도 생겼다. 치료를 권하자 누워있으면 괜찮다며 힘없이 손사래를 치신다.

화 잘 내는 할아버지 옆에서 할머니는 누운 자리가 불편하기만 하다.

'그래, 할아범한테 폐를 끼치지 말아야지. 안 먹으면 그이가 음식 준비할 필요가 없겠지. 화장실 갈 일도 없겠지.'

의료인 입장에서 기가 찰 만한 일이다. 벌써 3일 동안 물과 밥을 입에 안 댔다. 어쩐지 평소보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더라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간호사 선생님들이 영양죽 한 박스를 가져왔다. 거르지 말고 꼭 드시라는 당부의 쪽지도 함께 넣어서 말이다. 나는 생맥산 처방을 내렸다. 탈진 상태가 빨리 가라앉길 바랐다.

치료가 끝난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았다. 무릎 위에 박스를 올렸다. 할아버지가 밀었다. 바깥은 햇빛이 이글이글했다. 가시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보건소에 함께 온 4대...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몇 날이 흐르고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햇빛이 기지개를 펼라치면 구름이 가려버리고 비를 쏟아냈다. 잠깐 비가 멈춘 틈을 타서 처음 보는 환자분이 들어왔다.

양쪽에 목발을 짚으신 할아버지와 중년의 남자. 십중팔구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온 것일터.

"아버지가 무릎에 관절염이 있거든요."

대변인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아버님께 침을 놓고 나서 아들이자 보호자에게 말을 건넸다.

휴가철이라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신 거냐고 물었더니 전혀 아니올시다다. 30여 년 군대밥을 먹다가 2006년 퇴직한 아드님. 아버지의 다리 수술 소식을 듣게 된다. 걸음을 못하는 아버님을 보고는 모시고 살아야겠다 생각한 게 3년 전. 청주에 있던 가족을 놔두고 이곳 고흥까지 내려온 것이다.

"옛날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도 했다는데…."

요즘도 이런 자녀분이 계신다는 게 놀라웠다. 한편 여기에 놀라야 하는 현실이 씁쓰레하다.

"가족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가끔 한번씩 올라가니까 괜찮죠 뭐."

아버지를 모시려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는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삐삐삐. 타이머가 울렸다. 이렇게 가까운 데서 침을 놔주는 걸 모르고 먼 데를 돌아다녔다며 또 오겠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왔다. 옆의 낯선 젊은이. 아드님의 아들이다. 청주에 사는 가족들이 휴가를 여기로 왔다고 한다. 3대가 보건지소에 찾아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정확히는 3대가 아니다. 젊은이의 팔에 안긴 갓난아기.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치료가 끝나고 4인승 승용차에 4대가 함께 올라탔다. 세월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저 차의 무게는 지금껏 본 차들 중 가장 육중한 차가 아닐까.

사실 자녀가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허리가 굽었든, 다리를 못 쓰든 어르신들은 묵묵히 혼자서 찾아오신다. 옆에서 지켜보며 인생은 혼자라는 말을 곱씹게 된다.

일주일 동안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 두 환자분을 보면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다. 지금까지 수많은 아들딸이 갔던 길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껴 지나갔다면, 이제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가야 한다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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