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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없이 방치된 애국지사 이수흥 묘지

국립현충원에 안장... 후손과 지자체 묘비정리 시급

등록|2011.08.10 15:38 수정|2011.08.10 15:38

▲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200여명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안장(묘비번호 166)되어 있는 이수흥 열사의 묘 ⓒ 유재국




독립운동가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된 경기도 이천 출신의 이수흥 열사의 묘지가, 묘비에 아무런 내용도 기록되지 않고 텅 빈채 방치돼 있는 것으로 확인돼, 묘비 정리를 위한 후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비문 없는 이수흥 열사의 묘지 문제는 김문환 극동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전 민주당 이천·여주지역위원장)가 그동안 우리나라 현대사를 연구하면서 광복 66주년을 맞아, 이천·여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의 문헌을 살피며 묘지를 참배하던 중 발견됐다.

이에 김 교수는 지난 9일 이수흥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소재 이천초등학교 앞 공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아무런 내용도 없이 비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이수흥 열사의 묘비를 정리하는 데 지방자치단체와 후손들이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안장되어 있는 이수흥 열사의 묘비가 아무런 내용도 없이 텅빈 채 방치되어 있다. ⓒ 유재국



이날 김 교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수흥 열사는 현재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200여 명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안장(묘비번호 166)되어 있으나, 다른 열사나 민족지사들의 묘비처럼 어록이나 좌우명, 공적 등의 내용이 적혀 기록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조선총독부로부터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을 당한 이수흥 열사의 원통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묘비 정리는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 교수는 "이수흥 열사는 교수형에 앞서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어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기 바란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라며 항소하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 3창을 외치며 순직한 애국지사"라며 "이러한 열사의 기상과 기개가 후손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역사의 산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김 교수는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묘역의 묘비는 후손들이 요구하지 않을 경우, 지방자치단체가 국가보훈처나 국립현충원에 요구할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이천시는 민·관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결성해, 열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글귀를 묘비에 새겨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소재 이천초등학교 앞 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수흥 열사 동상 ⓒ 유재국



한편, 독립운동가 이수흥 열사는 본관이 연안(延安)으로 1905년 이천시 창전동에서 태어나, 가정 문제로 입산하여 3년 동안 승려로 지내던 중 아버지(일영(日瑩)의 간청으로 하산했다가 1923년 만주로 망명하여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김좌진(金佐鎭)이 세운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졸업, 무장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수흥 열사는 1923년 7월,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의군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시작하던 중, 9월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육군 주만참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해 활동했다.

1924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국경지방을 시찰하기 위해 경비정을 타고 압록강을 내려오는 것을 기습했으나 실패했으며, 1926년 5월 육군주만참의부 특무정사로 임명되어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처형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황해도 평산의 부호 김상렬·함성호 등에게 헌금을 요구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하면서 7월 10일, 서울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하여 일본경찰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여러차례 군자금 조달을 위해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의 소문난 부호 이민응(식산회사 운영) 등을 찾았으나 번번이 실패하면서 10월 이천군 현방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했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수원에 가서 장례를 치르고 이천으로 돌아왔다가 11월 6일 체포되어,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소재 이천초등학교 앞 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수흥 열사 동상에서는 매년 국제와이즈멘 이천클럽 주최로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 유재국



이수흥 열사 시신은 매부 강긍주에 의해 수습되어 안성군 일죽면에 매장되었다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열사의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116호에 안장됐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추서, 후일 서훈제도가 바뀌면서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격상되어 서훈되었다.

아울러 이천시는 이수흥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선양하는 의미에서 1982년 이수흥 기념 사업회를 결성하여 이천초등학교 앞에 이수흥 열사 동상과 유택수, 유남수 기념비를 건립, 현재 연안 이씨 종친회와 국제와이즈멘 이천클럽에서 매년 이수흥 열사 추모제를 지내며 선생의 호국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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