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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버블팝, TV에서 보고싶다

[주장]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며

등록|2011.08.13 15:02 수정|2013.07.27 20:08
저는 지난 8월 10일부터 가수 현아의 <버블팝>을 TV에서 보고 싶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휴가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처음 1인시위를 생각하게 한 것은 한마디로 말해 '분노'입니다. 지난달에는 영도조선소 크레인이 어떻게 생겼나 좀 구경하고 싶어서 부산에 두 번씩이나 갔는데 국가 권력이 경찰 동원해서 못 가게 하더군요. 이번엔 휴가기간에 좋아하는 가수 공연 좀 보려 했더니 그것도 국가 권력이 막아서다니... 아니 도대체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1인시위를 하려고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저는 소녀시대 팬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연대'라는 가치가 또 있지 않겠습니까? 소녀시대도 방송규제를 당할 수 있는 입장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현아양의 팬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기왕 이렇게 된 것, '잡빠'로 인증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오랜 시간 <버블팝> 무대를 위해 땀 흘리고 연습한 모든 수고가 인정되기는커녕, 국가권력의 한마디에 방송 활동을 접어야만 했던 현아양의 허탈감에 감정이입이 된 후로, 피켓을 들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권이며 그 제한은 침해의 최소성에 기반해야 합니다.

우리는 방송 규제를 당연시 하는 비민주적 국가권력 하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고, 그 결과 많은 국민들 역시 국가권력이 방송을 규제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이건 안 되고 저건 안 되고" 하는 식의 담론이 넘쳐나고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기껏해야 글 서두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상투어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이며, 바로 이것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처절하게 싸우며 민주주의가 성립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우아한 예술작품과 근엄한 정치적 주장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수준이 어떠한지, 상업적 이해관계가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아이돌 가수의 춤과 노래이건, 해고 노동자의 문제이건, 정부에 대한 비판이건 무엇에나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통념과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것이 보장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자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모든 표현이 자유롭지만 그 외의 일체는 사문난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표현, 비루하고 천한 표현, 일탈적이고 불온하며 다수를 불편케 하고 그 시대의 일반적 생각에 위배되는 표현을 최대한 보장해 주는 원칙이 표현의 자유인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때에는 그것이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명백한 해악을 가져오는 경우에 한하여 침해를 최소화하는 원칙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종차별, 성차별, 파시즘, 아동 착취 등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되는 중대한 문제의 경우에는 분명히 엄격한 제한을 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매우 드문 일이며, 이것이 민주주의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늘 조심스런 태도로 이루어져야 하며, 방송에 대한 규제는 국가 권력이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율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모습입니다. 현 정권에서와 같이 여당 측 추천인사 6명, 야당 측 추천인사 3명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위원을 대통령이 위촉하는 형태의 위원회에서 방송을 규제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중추적 언론매체인 방송에 대한 규제를 권력의 횡포에 맡기는 것입니다.
 
현아의 버블팝 방송 규제는 부당합니다

방통심의위는 8월 초, 현아의 <버블팝> 안무가 선정적이라는 의견을 각 방송사에 전달하였고, 음악 프로그램 제작진은 기획사에 안무 수정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아의 소속사는 "포인트 안무를 제외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안무 수정을 거부하고 <버블팝> 활동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또한 8월 10일 방통심의위는 제34차 방송심의소위원회 회의를 열고 방송 3사 음악 프로그램 제작진을 소환하여 현아의 선정적인 춤동작을 여과없이 방송했다며 권고를 결정했습니다. 방통심의위는 보도자료에서 현아의 버블팝 무대에 대해서 "가족이 함께 시청하기 불편했다"는 시청자 민원 접수에 따라 "청소년의 정서발달 과정을 고려하고 시청자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행정지도를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①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감정인 "불편함"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정신인 '관용'은 자신과 다른 생각과 주장에 대한 용인의 정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영어로 'tolerance', 불어로는 '똘레랑스'라고 하며 '견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과 다른 주장과 신념 그리고 도대체 이해하지도 못하겠는 다른 사람의 행동이 당신에게 설령 불쾌함을 준다하더라도, 그러한 주관적 이유만으로 그 표현의 자유를 빼앗을 수는 없으며, 그것을 견디고 용인해야 하는 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정신이고 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정치적 입장이 상반되는 주장에 대해 반론과 비판을 할 수는 있으나, 아무리 그것이 자신을 불쾌하게 하더라도, 그것이 명예훼손과 같은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 한, 그 주장의 표현 자체를 권력의 힘을 빌려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어른들이 청소년과 함께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서 젊은 가수들의 춤과 노래에 불쾌함과 민망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 문제입니다. 대다수 청소년들은 그러한 춤과 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고 있으며, 또 어떤 어른들은 민망함을 느끼기보다는 청소년들과 함께 즐기고 가수에 대해 대화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현아의 <버블팝>은 춤과 노래일 뿐입니다. 결코 성표현물조차 아닙니다. 그것을 주관적으로 '선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여름에 길거리에서 젊은 여성이 얼마든지 입을 수 있는 의상을 갖추어 입고 몸동작을 이용해 춤을 추는 문화예술적 표현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발산하고 춤과 노래로 표현하는 것은 수많은 예술 장르의 모티브이며, 여성 가수의 공연은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즐기는 대중적인 문화형태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부분에서 최근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여성의 신체와 몸동작을 통한 문화 예술적 표현을 '선정성'을 이유로 국가권력이 개입해 금지시키는 것은 조선시대나 탈레반 정권하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한 소위 '선정성'이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으나, 길거리에 지나가는 여성의 짧은 치마와 각종 광고물의 비키니 의상에 불쾌함을 느낀다 할지라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려면 그것을 견디고 용인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니 여성의 신체가 그렇게 생겼다는 성교육부터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의 성적매력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비판을 토론할 의제로 시민사회의 공론의 장에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결단코 권력의 힘으로 그것도 국가권력으로 규제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② 청소년 보호라는 구실로 현아의 버블팝을 규제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들은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전 세계의 수많은 대중음악 공연을 일상생활에서 보고 즐기고 있습니다. 현아의 <버블팝> 동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게 공개되어 있고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컴퓨터와 디지털 기기에 저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즉, 청소년 보호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방송규제는 아무런 규제의 실효성은 없으면서 표현의 자유와 대중문화 소비자들의 볼 권리만 빼앗는 것이고 이것은 법익에 있어서 전혀 균형성이 없는 조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불법 유해물이 아무리 많이 퍼져 있더라도 규제하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으나, 현아의 <버블팝> 공연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만큼 유해하다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성 가수의 춤과 노래이고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발산하는 공연이다 보니 성적인 암시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노골적이고 정도가 심한 성표현물에 청소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심의를 통해 법적 규제를 할 수는 있다 해도, 만약 청소년들이 성적 암시를 담은 표현물에 노출되는 것을 모두 금지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현아의 <버블팝> 정도의 춤과 노래가 청소년들에게 유해하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정도의 공연을 접했다고 해서 청소년들이 성적으로 타락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전국의 청소년 댄스 동아리에서 아마 많은 청소년들이 버블팝의 안무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생각하면 젊은이들의 재기발랄함에 흐뭇한 생각이 먼저 듭니다.

만약 올바른 성 의식과 가치관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입시교육에 매몰되어 인성교육과 성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지, 공부에 찌든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즐기는 가수의 춤과 노래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인간은 성적 존재입니다.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이며 길거리의 언니, 누나들이 짧은 치마에 민소매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올바른 윤리적 선택을 하고 가치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하는 것이지, 인간이 성적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는 모든 것을 차단함으로써 청소년을 보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현아의 <버블팝> 정도의 공연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현재 대중문화의 기반 자체를 송두리째 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럴 수가 없으니 규제는 불공평하게 되고 어떤 가수는 불이익을 받고 다른 가수는 규제를 받지 않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조치는 청소년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이런저런 이유로 손쉽게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법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강자는 혜택을 받는다는 불평등한 차별의 세계관을 심어주는 비교육적 처사입니다.

저는 현아의 버블팝 공연을 볼 수 없어서 불행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 중에 제라르의 '큐피드와 프쉬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생각하기에 현아의 <버블팝>보다 훨씬 더 '선정적'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성적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들이 얼마든지 이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청소년과 이 그림을 함께 감상할 일이 있다면, 어떤 분들은 꽤 민망하고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많은 어른들이 민망함은 잠시 접어두고 이 그림이 얼마나 인간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지 열심히 청소년에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을 보았다는 이유로 청소년이 성적으로 타락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큐피드와 프쉬케 Francois Pascal Simon Gerard (1770 - 1837), 1798년작, 루브르 박물관 ⓒ

설레는 마음으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는 상상을 합니다. 저는 파리에 자주 갈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 않기에, 만약 한 번이라도 이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아마 제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그 그림을 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박물관에 갔더니 가족과 함께 보기에 불편하다는 관람객의 민원 때문에 국가가 그 그림을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좌절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저는 절망감 속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현아의 <버블팝>이 방송 규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이 바로 이러한 절망감과 상처입니다. 우주의 조화와 천운으로 현아와 동시대에 그것도 같은 장소에 살 수 있는 기적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졌건만, 어이없게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들 몇 명 때문에 그 공연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저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어린 여자 가수의 섹시 댄스를 보고자 하는 중년 남성의 더러운 욕망이라고 하신다면, 저는 흔쾌히 수긍해 줄 수 있습니다. 숭고하고 고귀한 가치에 대한 추구라는 허세와 가식 따위로 그 욕망을 가리려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말씀드리는 바, 저를 아무리 '더럽다' 할지라도, 국가권력의 힘으로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고 통제하려는 그 파쇼적이고 음란한 욕망만큼 추악하고 소름끼치지는 않습니다.

현아의 <버블팝>이 제라르의 그림이나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보다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면 까짓것 기꺼이 수긍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자본에 의해 생산된 상업적 공연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역시 수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문화예술적 공연이라는 점에서만큼은 전혀 다르지 않으며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으시고 수준 높은 예술적 감각을 성취하신 분들이 저에게 저열하고 한심한 문화적 취향을 가졌다고 지적하신다면 그것 역시 까짓것 수긍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문화적 취향이 저열하고 상업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향유할 권리가 제한받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젊은 여자 가수의 표현의 자유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소박한 문화적 취향의 향유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가 과연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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