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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36)

엄마의 틀니

등록|2011.08.18 14:22 수정|2011.08.18 14:22
엄마는 젊어서부터 치아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어서 고생을 하면서 치아가 다 상했는데도 치아를 해넣을 형편이 되지 않아 한 개의 치아가 길게 나와 그걸로 음식을 겨우 씹어 삼키고는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상 소화가 되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우울증이 있으면 자율신경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소화기관이며 장이며 식도 등이 움직이는 게 둔화된다고 하는 것을 나이가 먹은 지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가 머리가 아프고 모든 곳이 아픈 게 당연했을 텐데도 나는 그런 엄마가 답답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오빠는 현대건설에 입사해 첫 월급을 타자마자 엄마에게 틀니부터 해주었습니다. 고운 엄마 얼굴에 하나밖에 없는 치아가 무척도 보기 안스러워했는데 오빠가 엄마를 치과에 데리고 가서 남아 있던 치아 한개를 뽑고 엄마의 틀니를 해 준 것입니다. 역시 오빠는 집안의 가장이었습니다. 오빠가 입사를 하자 우리의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고 언니의 짐도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그래도 빚이 남아 있기는 매 한가지라 오빠는 사우디로 나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사우디에 나가면 월급이 훨씬 많았으니까요. 우리는 또 오빠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나랑 언니는 회사에 나가고 학교에 가야했기 때문에 공항에는 엄마 혼자만 따라 나갔고 우리는 집에서 오빠와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공항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바짝 마른 오빠가 양복을 어색하게 입고 있었고 엄마의 표정은 어두운채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그 사진은 나의 가슴을 저미게 했습니다.

오빠는 오빠만을 위해 살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 언제나 어깨가 무거웠고 결혼해서는 또 새로운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은 한번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삶이었다는 걸 생각하면서 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볼 때면 언제나 내 마음은 찡해지고는 합니다. 

▲ 엄마의 틀니 ⓒ 장다혜


오빠는 영화를 너무도 좋아해서 나랑 '벤허'라는 영화를 보러 갔는데 한번 보고도 또 보고 싶어 계단에 앉아 같은 영화를 두 번이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시도 잘 써서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탄 적도 있습니다. 그것 외에도 오빠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텐데 항상 가족이 어깨위에 얹혀 있어 오빠의 꿈은 먹고 사는데만 급급해서 모든 것을 접은 채 살아와야 했습니다. 이런 오빠가 애처롭고 항상 아버지 같고 오빠는 내게 마음의 뿌리였고 의지처였습니다.

"이거 우리 아들이 해준기다."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 얼굴이 다 환해졌다며 치아 얘기를 할 때마다 치아를 빼서 보여 주며 이렇게 오빠의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엄마가 점점 아기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여 내게는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엄마에게 반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사춘기의 행태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마음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항상 귀 밑 일 센티미터를 넘은 적이 없었고 카라도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려서 입고 다녀서 겉으로 보기에 나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습니다. 나는 열등생이었고 엄마처럼 우울증에 걸려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담임이 엄마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가 아무래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이 같아요. 다른데로 전학을 시키든지 도저히 다룰 수가 없네요."
"선생님 이해해 주세요 가정 형편이 어렵다보니..."

엄마는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생님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차라리 전학을 갔으면 어쩌면 '주눅'이 들어버린 이 학교에서 탈출해 새롭게 출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전학을 하지 않은 채 계속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전교생이 쌀을 모아 아버지가 없거나 어려운 학생들에게 쌀을 나눠주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 쌀을 받지 않았습니다. 쌀을 가져 갈 때는 자기의 도장을 찍고 쌀을 가져갔다는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는 담임의 까칠한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그 쌀을 경비실 아저씨께 타가라고 말하고 내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우리반에서는 나와 주현이라는 아이가 쌀을 타게 되었는데 주현이도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주현이는 키가 커서 뒷자리의 아이였는데 희수며 현희며 은미 등의 아이와 함께 잘 어울려 노는 아이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주현이는 비록 아버지가 없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날 주현이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는데 충정로에 있었던 주현이네 집은 페치카까지있는 서양식으로 지어진 좋은 집이라 또 한번 나는 우리집 가정형편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쌀을 타가고 며칠이 지나 담임이 나와 주현이를 복도에 불러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창밖 복도를 내다보고 있는 가운데서 담임이 갑자기 주현이를 밀치듯이 출석부로 주현이의 배를 쿡쿡 찔러대며 말했습니다.

"쌀 왜 안타갔어? 자존심 때문에? 나는 학현이가 쌀을 안 타갈거라고 생각했다. 너같은 것들은 모든 게 뒤틀려서 비뚤어진 것들이야. 들어가!"

담임은 홱 돌아서서 교무실로 향하고 우리 둘은 또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교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나를 원망했습니다.

"쯧쯧 형편이 어떻게 되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 쌀을 남을 주다니..."

틀니를 빼서 소중하게 칫솔로 닦고 있는 엄마의 뒷 모습이 미웠습니다. 나는 안국동에 있는 학교에서 쌀을 타서 머리에 이고 오류동까지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차라리 굶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떤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쌀을 탄다는 게 내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런 마음을 알지 못하고 틀니나 닦고 있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엄마가 지겹게 느껴졌습니다. 십대 때 내 자존심은 헛된 자존심이었을까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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