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가 '신선 타령'했다? 그건 지독한 오해
책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통해 본 한국 사회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겉표지 ⓒ 그린비출판사
평소 정치의 썩은 내와 자본의 구린 내를 맡다가 잠시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원기 회복을 하듯이, <장자> 역시 현실로부터 잠시 눈 돌릴 곳을 던져주는 책 정도로 여겼다. 현대인에게 인문학이 종종 그렇듯이 난 <장자>도 이젠 지적 휴양지 정도가 아닐까 폄훼했던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은, 장자와 노자가 한 데 묶여 소위 '노장(老莊)사상'으로 불리는 데서 어느 정도 비롯됐다. 그런데 강신주의 책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하 모험)>(강신주 저, 그린비출판사 펴냄)을 따라가다가, 나의 장자 이해가 참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장자는 살육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춘추전국시대를 관통하며 치열하게 사유한 사상가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과연 "어이, 다들 속세를 떠나 산에 숨어 살자!" 라는 걸까? "열심히 도를 닦아 각자 신선이 되자"는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장자=노자=도교=신선'이라는 도식은, 그야말로 참새가 음속 비행하는 소리다. 도리어 <장자> 달생 편을 보면, 신선이 되고자 산에 살던 노나라 선표라는 사람이 그만 굶주린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대목이 나온다. 불로장생의 욕망을 장자는 이처럼 조롱했던 것이다. 장자는 개인의 탈속적인 초월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는 누구보다 철저히 타자에 대해 사유했고, 타자와 소통하고 연대할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 장자는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통제하는 '국가 권력'에 철저한 반대파가 되었다. 이렇게 읽을 때 <장자>는 놀라울 정도로 정치적이고 급진적이다.
포이동 재건마을에서 던지는 물음 '국가란 무엇인가?'
▲ 주거복구를 시작하는 포이동 주민들. 화마의 피해와 강남구청의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주민들은 스스로 복구작업을 시작했다. ⓒ 포이동주거복구공대위
서울 강남구에는 있는 포이동 재건마을. '타워팰리스 아래 판자촌'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지난 6월 12일 갑작스런 화재로 마을 절반 이상이 잿더미가 되었다. 30년 전 정부는 서울의 넝마주이, 거지 등을 '도시 정화' 차원에서 강제로 끌어와 양재천변에 수용했다. 이들은 스스로 우물을 파고 집을 지었으며 고물을 주워 생계를 꾸려나갔다.
독재정권이 물러가자, 이번엔 민간정부가 왜 나라 땅에다 함부로 집을 지었느냐며 주민등록증의 주소지를 지우고, '토지변상금'이란 걸 물려 주민들을 빚쟁이로 만들었다. 주민들이 7년을 싸워 겨우 거주권을 인정받나 했더니, 이번 화재에 강남구는 기다렸다는 듯 '마을 퇴거'를 윽박지르고 있다. 포이동 재건마을을 보면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하는 의문이 마구 생긴다. 대체 무슨 권리로 국가는 어느 날 시민들을 강제로 수용했다가 어느 날 강제로 내쫓아도 된다는 것일까?
<모험>은 '국가'에 대한 시각에서 장자와 노자가 갈라진다고 한다. 노자의 도(道)는 만유의 뿌리이고 본질이다. "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장차 천하를 취하려고 한다면 항상 무사(無事)로서 해야 한다." 어랏? 노자는 지금 누구에게 도를 말하고 있는가? 노자는 지금 황제를 향해, 모든 사람을 순조롭게 통치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도와 일치될 것을 건의한다. <모험>은 이런 점에서 노자를 '국가주의'로 본다. 반면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희생제에 쓰는 소를 본 적 있는가? 그 소는 수년 동안 배불리 먹은 후 무늬 있는 옷을 입고 죽을 곳으로 끌려간다. 그 순간 소가 '차라리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송아지가 되는 게 나을 것을' 이라고 생각해도 소용이 있겠는가?… 나를 더럽히지 마라. 나는 국가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 - 사마천, <사기> 노장한신열전
장자가 유가와 묵가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仁)'이든 '겸애(兼愛)'든 초월적인 이념이 강조되는 순간 개인은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국가라는 '초월적 공동체'는 더 이상 개인을 삶의 자유로운 주체가 되지 못하게 만든다. 포이동, 명동의 카페 마리, 한진 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국가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개인을 판자촌에 수용하기도 하고 어느 날 쫓아내기도 한다. 어제까지 건실한 자영업자였던 이를 오늘 철거민으로 만들고, 오늘 산업 역군이었던 노동자를 내일 해고자로 만든다. 국가는 이 과정에 대해 개인을 설득하지도, 개인에게 사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가 주(主)이고 개인은 종(從)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장주는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즐거울 뿐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자신은 틀림없는 장주였다. 그러니 나비가 꿈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분별이 있으리라." - <장자> 제물론
장자가 반복해서 언급하는 '꿈' 얘기는 현실과 꿈을 구별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장주와 나비는 분별이 있다'는 부분을 잘 보자. '꿈'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초월적 가치나 이념이다. 우리는 그런 꿈을 현실로 알고 정작 나의 현실, 내 삶이 있는 곳은 잊어버린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본의 이익을 자기 이익으로 여기면서, 해고 노동자의 고통보다 자본가들의 '기업 손실' 아우성에 더 공감하고, 30년간 한 공동체를 일구며 산 포이동 주민의 심정보다 강남구청의 차가운 법 논리를 더 당연하게 본다. 이런 상태가 꿈에 취한 상태다. 장자는 우리보고 이 꿈에서 깨라고 소리친다.
나의 현실을 잊게하는 꿈에서 깨어 '타자'를 만나자
우리는 어떻게 이 꿈에서 깰 수 있는가? '타자'를 만나고, 타자를 직시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초월적 가치를 거부하는 이들이다. 포이동 주민들, 카페 마리의 철거민은 국가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낯선 존재'이며 타자다. 타자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낯익은 초월적 공동체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준다. 철거민이 목숨 걸고 시위를 할 때 우리는 건설 자본과 행정 당국이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는 현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 타자들을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다룰 수 없다. 장자는 바닷새 이야기를 통해 그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질타한다.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왔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소와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 <장자> 지락
<모험>은 타자를 대하는 장자의 방법론을 이렇게 말한다. "잊어라! 그리고 연결하라!" 타자와 만나려면 우선 자신에게만 익숙한 규칙들을 내려놓고(忘), 타자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새로 구성해야 한다(天均). 그 관계에는 정답이 없으며 쉬운 매개나 통로도 없다. 우리는 타자를 향해 '날개 없이' 날아야 한다. 이 결사적 비약을 통해 우리는 타자와 만나고, 타자와의 만남은 초월적 공동체의 허구성을 알게 해준다. 그 허구성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설 수 있다. <장자> '제물론'에서는 이처럼 타자와 만들어가야 할 관계를 도(道)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도는 노자가 생각하는 형이상학적 도(道)와 다르다.
도는 걸어가면서 만드는 것이다.(道行之而成) - <장자> 제물론
국가를 넘어 억압에 맞서는 자유로운 연합체로
▲ 8월 12일 포이동을 침탈한 용역들. 망치를 들고 들어와 주민들이 애써 세운 건물들을 부수었다. ⓒ 포이동주거복구공대위
장자의 사상은 결국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동안 초월적인 이념에 눈멀었던 사람들이 타자를 직시하면, 그들은 더 이상 국가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은 그런 자립성을 원치 않는다. 아니, 개인이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일수록 국가는 약해지므로, 국가는 그런 개인을 강하게 억압하려 든다. 여기서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연대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더 이상 돈 몇 푼에 권력의 노예가 되길 거부하고, 국가의 억압에 맞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꾸리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러한 관계를 장자는 '애태타' 이야기로 설명한다. 애태타는 노나라의 추남인데도, 공자보다 많은 제자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애태타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군주의 지위도 없고, 타인의 배를 채워줄 재산도 없으며, 심지어 그의 추함은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다. 타인과 화합할 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그가 아는 것도 살던 동네에 국한된 것인데도, 남녀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고 있다. - <장자> 덕충부
포이동 주민들과 겹친다. 가진 것 없고 지위도 없고 명성도 없지만, 포이동엔 사람이 있고 공동체가 있다. 주민들은 좋은 일이 있으면 잔치를 벌이고 철거 위협이 오면 똘똘 뭉쳐 막아낸다. 그 오랜 세월 국가가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돌보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학생들이 와서 공부방을 열었고 시민들이 달려와 주민들의 권리 투쟁에 연대했다. 국가가 그들을 흩어 놓으려고 할수록 이 판자촌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는 점점 더 강해진다. 물론 이 네트워크를 부수려는 공권력과 용역의 망치도 더 늘어난다.
<모험>이 아니었으면 장자는 은둔과 도피의 철학자로 내게 기억될 뻔했다. 그러나 장자는 도피주의자가 아니라 당대 현실에 정면으로 부딪친 사상가였다. 장자는 말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열 것, 타자와 소통할 것! 더 이상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집단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만 살지 말고, 자기 스스로가 삶의 목적이 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체'를 타자와 함께 만들어 갈 것. 도를 구름 위에서, 깊은 산속에서 찾는가? 도는 지금 여기서,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는 이들이, 같이 걸어가며 만들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필자의 블로그 http://interojh.bolg.me에도 게재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