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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보일러 안 썼습니다...그 사람들 때문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국회 환노위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2011.08.18 10:17 수정|2011.08.18 11:20
1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한진중공업 청문회를 연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20일 넘게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청문위원들에게 편지글을 보내왔다. 김 지도위원이 자필로 작성해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전달했다. 편지글 전문을 공개한다. [편집자말]
☞ 한진중 청문회 생중계 동영상 바로가기

▲ 경찰이 '3차 희망버스'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 행진을 불허한 가운데, 7월 31일 오전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생각에 잠겨있다. ⓒ 유성호


저분들만큼의 측은지심이라도 있었다면

두 달째 전기가 끊어진 깜깜절벽 크레인 위에서 랜턴 불빛에 의지해 이 글을 씁니다.

일요일날 자정이 다 된 시간, 8차선 도로 건너편 인도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오늘밤도 모기에 뜯기며 노숙을 하겠지요.

저들 중에는 이 크레인 중간 지점에 올라와 있는 해고 노동자의 아이들과 부인들도 있습니다. 이 염천 더위에 가마솥처럼 달궈진 크레인 위에서 가족들의 생존을 지키겠다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비가 오면 물 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가장을 지켜보는 마음이 어떨까요.

저분들 중에는 서울에서 오셔서 주말을 길에서 보낸 분도 계시고 세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대전에서 오셔서 노숙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제가 모르는 분들입니다. 8년 전 사람이 죽어나간 크레인 위에 똑같은 이유로 또 누군가 올라가 있다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오신 분들입니다.

저분들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저분들만큼의 애틋함이 있었다면 저분들만큼의 측은지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정리해고가 막무가내로 자행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평생을 일한 노동자들을 이렇게 쉽게 내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희망버스가 처음 오던 날이 제가 크레인에 오른 지 157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언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야당 국회의원 서너 분이 다녀가신 정도였습니다. 고립된 채 절망했고 그때마다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희망버스가 3차까지 이어지자 비로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됐고 마침내 국회청문회까지 열리게 됐습니다.

내려오고, 끌어올리고... 기가 막힌 합동 장례식

사회의 무관심 속에 쌍용차에선 정리해고 이후 15명이 죽었고, 한진중공업에서도 2003년 두 사람이 생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3년도에도 650명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었고 거기 반발한 노조가 2년을 싸웠습니다.
당시 김주익 지회장이 이 85호 크레인에 129일을 매달려 있었습니다. 회사는 물론 언론도, 정치권도 그의 절규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냉대 속에 129일만에 밥을 매달아 올렸던 밧줄에 목을 맸습니다.

지회장의 시신은 2주가 넘도록 이 크레인을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사측의 어떤 조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15일 만에 곽재규라는 노동자가 또다시 목숨을 끊고 나서야 합의가 이루어졌고 한사람의 시신은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또 한사람의 시신은 도크바닥에서 끌어올리는 기가 막힌 합동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스물한 살 청춘시절에 같은 공장에서 만나 거의 매일 얼굴 보며 같은 꿈을 꿨던 사람들입니다. 여름이면 온몸에 땀띠가 돋고 땀으로 안전화가 질퍽거리는 고단한 노동을 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있어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질풍노도 같은 시절을 옛말삼아 얘기하며 좀 달라진 세상에서 같이 늙어갈 수 있을거라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두 사람을 한꺼번에 땅에 묻고 돌아온 날 밤, 보일러를 올리기 위해 무심코 스위치에 손을 대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묻은 손으로 저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가. 차가운 땅바닥에 20년지기 두사람을 묻고 저만 따뜻하게 살겠다고 보일러를 켜는 나도 인간인가.

그 후로 8년 동안 단 한번도 보일러를 켜지 못했고 크레인에 올라오기 전날 밤 처음으로 따뜻한 방에서 잤습니다.

왜 노동자만 고통받아야 하는지 꼭 밝혀주십시오

2010년, 회사는 다시 432명의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조합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구조조정 중단에 노사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400명의 정리해고를 다시 통보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규직들은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하청노동자들은 찍소리 한번 내지 못한 채 이 공장에서 3천명 가까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왜 막대한 흑자가 난 기업에서 그 흑자를 만들어낸 노동자들만 고통받아야 하는지 꼭 밝혀주십시오. 경영진들의 경영실패 책임은커녕 주식배당금에 현금배당에 연봉까지 인상시킨 기업에서 왜 노동자들만 거듭되는 정리해고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반드시 밝혀주십시오.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의하더라도 조합원들의 노조사무실 출입이 허용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역들을 동원해 출입을 막는 처사에 대해서도 밝혀주십시오.

쌍용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저항하여 외쳤던 구호가 '해고는 살인이다' 였습니다. 그 비극이 한진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2003년 합동 장례식을 치렀던 그 참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일하고 싶다"

해고된 조합원들이 공장 안에 있을 때 누군가 크레인 밑에 써놓고 간 구호입니다. 우리 조합원들 일하게 해주십시오.

9개월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를 헤매는 우리 조합원들 가정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환노위 국회의원님들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광복절 66주년 85호크레인
222일차 새벽을 맞으며 김진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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