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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마약김밥', 얼른 와서 드세요

[푸드 스토리 21] 김밥, 추억과 생각을 함께 먹는 음식

등록|2011.08.18 17:45 수정|2011.08.18 17:45
저는 워낙에 야행성인 탓에 주로 밤에 일을 합니다. 그래서 그 긴긴 밤 동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자연히 느는 것은 하품이요, 쌓여가는 것은 커피 잔입니다. 하긴 최근엔 치과 수술로 커피도 당분간 마실 수가 없어지니 그 대신 간식거리를 더 많이 찾게 되는 군요. 그럴 때면 냉장고 문을 열고 이것저것 있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게 되는데요, 적당히 열무김치 썰어 얹은 비빔면이나 치즈 하나 올려서 구워낸 토스트라거나 미역냉국에 밥을 반 공기쯤 말아먹거나 하는 식입니다. 오늘은 뭘 먹을까 하다가 그 유명한 '마약김밥'을 흉내 내서 밤참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서울 광장시장에서 파는 꼬마김밥, 일명 '마약김밥' 이라 불리는 음식. 속에 들어가는 재료가 당근과 단무지 딱 두 가지 뿐이지만 김밥을 찍어먹는 소스가 새콤하게 입맛을 돋우어서, 마약에 중독 된 듯 자꾸 먹게 된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죠. 때마침 집에 준비 된 재료가 있어서 밥만 간 맞추고 김에다 드르륵 말아보았습니다. 당근 볶은 것, 우엉조림, 단무지, 그리고 부추 절임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단순함이 미덕인 '마약김밥' 치곤 재료가 너무 많나요?

마약김밥 재료당근 볶은 것과 단무지만 들어가는 것이 마약김밥이다. ⓒ 조을영



마약김밥 만드는 법: 1. 소금, 통깨, 설탕으로 살짝 간한 밥에 당근볶은 것 등을 넣어 일반 깁밥 보다 크기가 작은 것이 마약김밥의 특징이다. 김 한장을 4등분 해서 사용한다. ⓒ 조을영


마약김밥 상차림들깨 미역국과 겨자간장 소스를 준비한다. 겨자 간장 소스는 겨자 조금과 간장, 설탕, 식초를 섞어 만든다. ⓒ 조을영


이렇게 김밥을 말다보니 별별 생각이 다드네요. 예전에 소풍이나 운동회 날 아침이면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김밥을 말고 계시던 모습도 떠오르고요. 요즘이야 24시간 김밥집이 있으니까 당일 아침에 사가면 끝이지만, 그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그리운 향기의 김밥은 가게에선 절대 만날 수 없는 것이 됐습니다.

질 좋은 김, 그리고 윤기 흐르는 쌀밥에 식초와 참기름과 깨소금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고소한 냄새, 게다가 빠질 수 없는 옛날 분홍 소시지가 쏙 들어가야 그리운 김밥이 완성 됩니다. 좀 더 맛있게 만들어주시는 날엔 소고기를 길쭉하게 썰어서 간장, 설탕 같은 양념장에 재운 후에 보글보글 물기 쫙 빠질 때까지 졸여서 다른 재료와 함께 말아 주시기도 했죠. 그건 요즘 김밥집에서 고기 쬐끔 갈서 넣어주는 것 하곤 맛과 식감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던 소고기 김밥이었습니다. 그 구수한 향기, 두툼한 고기를 씹을 때의 포만감, 너무 너무 그립네요.

김밥 하면 '김치즈 김밥'도 빼놓을 수가 없죠. '인어아가씨' 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맨밥에다 김치와 치즈만을 넣어서 싼 '김치즈김밥'을 먹는 걸 보고 저도 만들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냉장고를 뒤져서 나온 김치와 치즈로 김밥을 싸선 공원 벤치로 나가서 먹더군요. 그냥 대충 만든 것 같아도 그 재료들이 빚어내는 묘한 조화 덕에 '너무 맛있다'를 연발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만들어 보았는데 진짜 말이 필요 없더군요.

생김에다 간도 안 한 쌀밥 올리고, 그 위에 치즈 한 장, 그리고 국물 꼭 짜서 물기를 걷어 낸 후 송송 썰어 올린 김치만 넣고 도르륵 말았을 뿐인데 어찌 그런 맛이 나던지! 텁텁함이 사라진 치즈가 뿜어내는 고소함과 김치의 새콤함이 잘 어우러져서 입에 쫙쫙 붙더군요. 라면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기 때문에 그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공원에 버너 갖고 나가서 끓여먹어도 봤답니다.

김밥을 싸고 남은 오이와 김은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한 것처럼 먹어도 맛있어요. 생김에다 오이를 싸서 간장에 찍어 먹는 지극히 심플한 방식인데, 담백함의 극치인 여름 오이와 김이 어우러져서 의외로 감칠맛이 있습니다. 재료 각각의 향이 그대로 살아나서 꽤 향긋하기도 하고요.

첫맛은 오이와 김의 비릿함이 훅 지나가다가 그 다음엔 간장의 달콤함이 감돕니다. 이때 먹는 김과 오이는 물론 최상으로 신선한 것들이어야 하지요. 애인 미도리의 부탁으로 그녀 아버지 병상을 지키던 와타나베는 와삭와삭 오이를 씹으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죽어가는 병자를 곁에두고 먹는 오이의 충만한 생명력은 참 묘한 연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김밥. 차갑게 먹는 음식이지만 냉장고에 들어간 채 며칠 지나 굳어버렸을 때도 근사한 재활용법이 있는 음식입니다. 저의 어머니께선 굳어버린 김밥을 색다르게 활용하실 줄 아는 알뜰 주부셨습니다. 김밥을 냉장고에 뒀다가 먹으려 해도 딱딱해서 맛이 없어질 즈음엔 그걸로 김밥계란부침을 만들어주셨거든요.

계란을 풀어서 거기에 김밥을 살짝 담궜다 후라이팬에 부쳐내는 건데, 고소하고 색다른 그 맛이 좋아서 금방 한 김밥을 일부러 그렇게 계란을 씌워 달라고도 했답니다. 요즘 떡볶이 집에서 흔히 만나는 김말이랑 비슷하긴 하지만 밀가루 같은 건 일절 안 넣고 계란에만 퐁당 담궜다 건졌기 때문에 훨씬 더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맛이 나죠.

생각해보니 김밥은 참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음식이네요.  배고픈 밤에 동네 어디를 가도 편의점과 분식집에서 볼 수 있는 간단 음식인 탓에 이젠 특별할 것도 없어진 지 오래긴 합니다만, 추억이라는 양념을 솔솔 뿌려보니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지기도 하네요.

여러분 내면에 숨겨놓은 김밥은 어떤 맛을 지니고 있는지요? 그리고 김밥을 말 일이 있다면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넣고 말아 드시나요? 일본 사람들의 오니기리(삼각김밥)를 그들 영혼의 음식이라고 하듯이 저에겐 김밥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음식이면서 가장 추억이 많이 깃든 음식. 그간의 괴로웠던 추억, 기뻤던 추억 모두가 김밥을 마는 동안에 밀려오기에 김밥은 단지 입만 즐겁게 해주는 은식으로만 머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마약김밥이 다 완성 됐네요. 어디, 한입 먹어볼까요?새콤하게 양념장을 찍어가지고...음~담백한 맛이 그만이군요. 양념장에 찍어먹을 거라면 밥에다 간을 약하게 하면 딱 좋겠군요. 이크! 식초를 살짝만 넣었는데 잇몸 수술한 자리가 저릿하네요. 얼른 먹고 물로 입가심 해야겠어요.

마약김밥.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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