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9일)은 꼭 101년 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주에 주권을 빼앗긴 날이다. 역사는 이를 '경술국치일'라고 부른다. 광복절은 가슴에 담고 경축하지만 우리는 국치일을 기억하는 것은 애써 외면한다. 너무 어둡고 뼈아프고 수치스러운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날을 가슴에 새겨 다시 나라를 잃는 비극과 수치는 없어야 한다.
경술국치일을 가슴에 새기면서 '매국노'가 따라 붙는 이완용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경술국치보다 5년 앞선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외교권을 일제에 넘겨 준 이들이 있으니 우리가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라 부르는 자들이다.
그런데 을사오적하면 이완용만 떠오르고 다른 이들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을사오적의 중심 인물이 이완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완용을 잘 모른다. 그가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친일파가 되어 끝내 나라를 팔아 먹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친일 역적 중 최고봉에 오른 그이기에 비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완용도 처음부터 나라를 팔아 먹을 것이라 작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매국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완용 평전>(김윤희, 한겨레출판)은 우리가 그 동안 너무 몰랐던 이완용을 알아가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한겨레 출판이 지난 5월100명의 국내 역사 인물을 국내 연구자들이 제대로 조명하는 역사인물평전 시리즈를 펴내기 시작했는 데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이가 이완용이다.
참 구성이 흥미롭다. 다음이 안중근 의사, 그 다음이 <백팔번뇌>< 금강예찬> <조선독립운동사>로 우리 문학사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남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최남선 역시 이광수와 함께 끝내 친일로 갔다. 안중근 의사가 매국노 이완용과 친일파 최남선에 둘려싸여 있는 모양새다.
'합리적 근대인' 이완용
우리 정치사를 보면 이념을 갈아탄 정치인들을 많이 본다. 그런데 대부분 진보에서 보수로 갈아타지 보수가 진보로 이념을 갈아탄 경우는 없다. 사람들은 이념을 갈아탄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과연 이완용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매국에 이르게 되었을까.
글쓴이는 책에서 '매국노'라고 섣불리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근대인"이라며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은 이성적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 모든 죄과를 이완용에게만 묻는 우리의 섣부른 평가에 새로운 시각을 준다. 이완용은 25세 때인 1882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해 4년이 지난 1886년 3월 24일 규장각 시교로 등용된다.
일제에 '반일'로 찍힌 친미주의자 이완용
그리고 이완용은 1887년 11월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미국을 다녀와 미국물을 먹었고, 1888-1890년까지 주미대리공사를 지내면서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조선을 서구사회로 만들고 싶어하는 친미주의 성향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그 나라의 부강함이 무엇 때문이지 고민했을 것이고, 조선이 부유해지기 위해선 미국의 어떤 것을 모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판단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양반관료로서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그는 조선 정치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은 채 미국과 같은 부강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51쪽)
이처럼 이완용은 대한제국 체제 내에서 부강한 나라를 꿈꿨던 실용주의자였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을 통해 체제 변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현실주의자로 변모한다.
지은이는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분노할 현실은 없었다"고 말한다. 자기 희생을 통해 변혁 주체가 되어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체제가 한반도에 등장해 청나라와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확신은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치입문 초중반기까지 이완용은 '반일'이었다. 의외다. 1894년 갑오개혁 소용돌이 속에 일본 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보고서에는 정동파(친미파)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완용이 반일에 섰다고 말한다.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 금일의 정세로 논단한다며 일본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기색이 날로 치열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를 일본 배척파라고 추정해도 틀림없다고 확신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69쪽)
그런데 마쓰 보고서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이라는 분석이 묘한 여운이 남는다. 지금은 친미·반일이지만 언제든지 친일도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맞았다. 이완용은 11년 후 을사늑약을 통해 친일도 모자라 매국에 들어선다.
실용주의자 이완용, 친일 그리고 매국
그는 고종에 대한 의리만 지킨다면 왕조가 무너져도 별 상관이 없었다. 자기 선택이 원칙에 위배되고 매국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랬기에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최익현은 "황실의 보존과 안녕이라는 그들의 말을 진실로 믿으십니까?"라는 상소로 고종 황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이완용 일파를 '매국적'으로 규정한다. 이에 이완용은 1905년 12월 8일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새 조약의 주된 취지에 대해 말하자면,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묘사직은 안녕하고 황실도 존엄합니다. 다만 외교상의 한 가지 문제만 잠시 이웃나라에 맡긴 것인데,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208쪽)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어찌 독립국가이며, 종묘사직과 황실이 어떻게 존엄한가. 결국 이 상소는 변명에 불과했다. 이후 이완용은 '매국노'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완용은 생전에 자기가 팔아 먹은 대한제국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이완용를 비롯한 을사오적만의 책임일까.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면서 겁박한다. 고종은 "짐은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짐의 정부 신료들에게 자순(諮詢)하고 또 일반 인민들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라고 한다.
을사늑약, 고종 책임은 없나
고종은 전제 왕정 대한제국 황제였지만 '스스로 재결할 수 없다'고 해명한다. 이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 다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한다고 하는, 이른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민의 의향 운운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라고 추측됩니다"(190쪽)라고 고종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즉 결정권은 신하들이 아니라 고종 황제 당신이라는 비판이다. 참 무책임하다. 을사늑약 당시 고종의 한 모습이었다. 지은이 역시 고종에게 책임을 묻는다.
"을사조약 체결을 거절할 명분으로 외교절차 준수 이외에 고종이 내건 '대신과 인민의 의향을 묻는다'라는 것은 당시 대한제국 정치체제상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전제 국가인 대한제국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황제인 고종 한 사람뿐이었다."(190쪽)
나라를 끝내 팔다
전제 왕정 황제였던 고종은 이처럼 을사늑약 책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럴지라도 이완용이 '매국'에서 자유로운 것은 절대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완용은 조선왕조 안에서 개혁을 바랐다.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제 이런 요구를 한다.
"주권없는 국가와 왕실은 단순히 형식에 불과하지만, 일반 인민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일찍이 한국이 청국에 예속되었던 때에도 국왕의 칭호를 써왔다. 왕의 칭호를 그대로 두고 종실의 제사를 영구히 존속시킨다면 민심을 달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서로 응하고 정성스럽게 협동하는 정신에도 부합될 것이다."(252쪽)
나라를 넘기면서까지 이완용은 국왕 칭호만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라보다 국왕 칭호만을. 그게 내일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을사늑약때처럼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실용에 빠진 이완용은 원칙과 명분, 백성의 안위와 국가의 주권보다는 왕이라는 호칭만 존재하면 된다는 현실 안주를 택한 것이다. 원칙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려는 유혹은 우리 시대에도 이어진다. 시대 조류에 원칙을 버리고 변절을 통해 자기가 추구했던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비극을 우리는 많이 보았다.
갑자기 미국 현상학자 랠프 험멜은 "공무원은 생김새는 인간과 비슷해도 머리와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했고, 막스 베버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에서 "관료는 영혼없는 전문가"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관료만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노할 현실이 많은데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영혼없는 자가 될 것이다. 이완용이 우리에게 준 가르침이다.
경술국치일을 가슴에 새기면서 '매국노'가 따라 붙는 이완용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경술국치보다 5년 앞선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외교권을 일제에 넘겨 준 이들이 있으니 우리가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라 부르는 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완용을 잘 모른다. 그가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친일파가 되어 끝내 나라를 팔아 먹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친일 역적 중 최고봉에 오른 그이기에 비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완용도 처음부터 나라를 팔아 먹을 것이라 작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매국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이완용평전 ⓒ 한겨레출판
참 구성이 흥미롭다. 다음이 안중근 의사, 그 다음이 <백팔번뇌>< 금강예찬> <조선독립운동사>로 우리 문학사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남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최남선 역시 이광수와 함께 끝내 친일로 갔다. 안중근 의사가 매국노 이완용과 친일파 최남선에 둘려싸여 있는 모양새다.
'합리적 근대인' 이완용
우리 정치사를 보면 이념을 갈아탄 정치인들을 많이 본다. 그런데 대부분 진보에서 보수로 갈아타지 보수가 진보로 이념을 갈아탄 경우는 없다. 사람들은 이념을 갈아탄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과연 이완용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매국에 이르게 되었을까.
글쓴이는 책에서 '매국노'라고 섣불리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근대인"이라며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은 이성적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 모든 죄과를 이완용에게만 묻는 우리의 섣부른 평가에 새로운 시각을 준다. 이완용은 25세 때인 1882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해 4년이 지난 1886년 3월 24일 규장각 시교로 등용된다.
일제에 '반일'로 찍힌 친미주의자 이완용
그리고 이완용은 1887년 11월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미국을 다녀와 미국물을 먹었고, 1888-1890년까지 주미대리공사를 지내면서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조선을 서구사회로 만들고 싶어하는 친미주의 성향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그 나라의 부강함이 무엇 때문이지 고민했을 것이고, 조선이 부유해지기 위해선 미국의 어떤 것을 모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판단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양반관료로서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그는 조선 정치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은 채 미국과 같은 부강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51쪽)
이처럼 이완용은 대한제국 체제 내에서 부강한 나라를 꿈꿨던 실용주의자였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을 통해 체제 변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현실주의자로 변모한다.
지은이는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분노할 현실은 없었다"고 말한다. 자기 희생을 통해 변혁 주체가 되어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체제가 한반도에 등장해 청나라와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확신은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치입문 초중반기까지 이완용은 '반일'이었다. 의외다. 1894년 갑오개혁 소용돌이 속에 일본 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보고서에는 정동파(친미파)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완용이 반일에 섰다고 말한다.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 금일의 정세로 논단한다며 일본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기색이 날로 치열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를 일본 배척파라고 추정해도 틀림없다고 확신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69쪽)
그런데 마쓰 보고서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이라는 분석이 묘한 여운이 남는다. 지금은 친미·반일이지만 언제든지 친일도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맞았다. 이완용은 11년 후 을사늑약을 통해 친일도 모자라 매국에 들어선다.
실용주의자 이완용, 친일 그리고 매국
그는 고종에 대한 의리만 지킨다면 왕조가 무너져도 별 상관이 없었다. 자기 선택이 원칙에 위배되고 매국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랬기에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최익현은 "황실의 보존과 안녕이라는 그들의 말을 진실로 믿으십니까?"라는 상소로 고종 황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이완용 일파를 '매국적'으로 규정한다. 이에 이완용은 1905년 12월 8일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새 조약의 주된 취지에 대해 말하자면,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묘사직은 안녕하고 황실도 존엄합니다. 다만 외교상의 한 가지 문제만 잠시 이웃나라에 맡긴 것인데,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208쪽)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어찌 독립국가이며, 종묘사직과 황실이 어떻게 존엄한가. 결국 이 상소는 변명에 불과했다. 이후 이완용은 '매국노'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완용은 생전에 자기가 팔아 먹은 대한제국을 찾지 못했다.
▲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체결한 을사늑약문서. 이 조약에서는 외교권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규정했고,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된다. ⓒ 한겨레출판
하지만 이 모든 게 이완용를 비롯한 을사오적만의 책임일까.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하면서 겁박한다. 고종은 "짐은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짐의 정부 신료들에게 자순(諮詢)하고 또 일반 인민들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라고 한다.
을사늑약, 고종 책임은 없나
고종은 전제 왕정 대한제국 황제였지만 '스스로 재결할 수 없다'고 해명한다. 이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 다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한다고 하는, 이른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민의 의향 운운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라고 추측됩니다"(190쪽)라고 고종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즉 결정권은 신하들이 아니라 고종 황제 당신이라는 비판이다. 참 무책임하다. 을사늑약 당시 고종의 한 모습이었다. 지은이 역시 고종에게 책임을 묻는다.
"을사조약 체결을 거절할 명분으로 외교절차 준수 이외에 고종이 내건 '대신과 인민의 의향을 묻는다'라는 것은 당시 대한제국 정치체제상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전제 국가인 대한제국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황제인 고종 한 사람뿐이었다."(190쪽)
나라를 끝내 팔다
▲ 이완용 집안 3대의 모습. 앉은 사람이 이완용, 뒷줄 가운데가 아들 이항구, 나머지는 이완용의 손자들이다 ⓒ 한겨레출판
"주권없는 국가와 왕실은 단순히 형식에 불과하지만, 일반 인민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일찍이 한국이 청국에 예속되었던 때에도 국왕의 칭호를 써왔다. 왕의 칭호를 그대로 두고 종실의 제사를 영구히 존속시킨다면 민심을 달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서로 응하고 정성스럽게 협동하는 정신에도 부합될 것이다."(252쪽)
나라를 넘기면서까지 이완용은 국왕 칭호만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라보다 국왕 칭호만을. 그게 내일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을사늑약때처럼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실용에 빠진 이완용은 원칙과 명분, 백성의 안위와 국가의 주권보다는 왕이라는 호칭만 존재하면 된다는 현실 안주를 택한 것이다. 원칙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려는 유혹은 우리 시대에도 이어진다. 시대 조류에 원칙을 버리고 변절을 통해 자기가 추구했던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비극을 우리는 많이 보았다.
갑자기 미국 현상학자 랠프 험멜은 "공무원은 생김새는 인간과 비슷해도 머리와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했고, 막스 베버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에서 "관료는 영혼없는 전문가"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관료만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노할 현실이 많은데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영혼없는 자가 될 것이다. 이완용이 우리에게 준 가르침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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