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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국립묘지 호국원에 잠들지 않는다

[국립묘지 집중해부③] '소외받는 국립묘지' 호국원을 가다

등록|2011.09.01 14:24 수정|2011.09.01 14:24

영천대첩비6.25 영천전투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 했다. ⓒ 김민석


"호국원이라고? 처음 들어보는데, 그것도 국립묘지야?"

'호국원을 아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주변 지인들이 보인 반응이다. 서울과 대전에 조성된 '현충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또 다른 국립묘지'인 호국원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호국원은 50만 명에 이르는 한국전쟁 참전유공자들에게 안장혜택을 주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보훈연금을 받고 있는 전·공상자를 제외하고는 국가 차원의 보훈혜택이 없었고, 또 안장자격과 수용 능력의 한계로 대부분 참전유공자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었다. 그래서 참전유공자분들을 위한 묘소만큼은 국가에서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이에 국가보훈처에서는 지난 94년부터 '향군 참전군인묘지 조성사업계획'을 수립해 2001년 영천호국용사묘지, 2002년 임실호국용사묘지에 이어 2008년 이천에 야외봉안탑과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재향군인회에서 운영·관리해오던 경북 영천과 전북 임실의 호국원은 지난 2006년부터 '호국용사묘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명칭도 '국립호국원'으로 바뀌었다.

호국원과 현충원은 안장대상이 조금 다르다. 현충원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해 상이등급(1~7급)을 받거나 무공훈장을 받은 분들만 안장이 가능하지만 호국원은 참전한 사람은 누구나 안장될 수 있다.

경북 영천과 경기 이천, 전북 임실 등 총 3곳에 조성된 호국원에는 8월 현재 총 6만 1829명이 안장돼 있다. 호국원의 총면적은 영천호국원 36만 9000㎡, 이천호국원 30만 4355㎡, 임실호국원 10만 5000㎡이다. 취재진은 3곳의 호국원 중 경북 영천과 경기 이천을 찾아갔다.

영천호국원 봉안묘 전경영천호국원에는 배우자 합장을 포함해 39,728기의 봉안묘가 있다. ⓒ 김민석


[영천호국원] "장군들은 현충원에 갈 수 있는데 호국원에 오겠나?"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영천호국원으로 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굉장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날 대략의 교통편은 알아봤다. 열차 한 번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영천톨게이트에 내려 호국원 가는 길을 물었다. 주민은 "택시를 타고 영천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간 후 호국원을 경유하는 버스를 타는 것이 좋겠다"라고 귀띔해줬다.

콜택시를 불러 영천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택시기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호국원까지 택시로 가면 요금이 얼마 나올지 물었다. 택시기사는 "2만 5천 원 정도 나오는데 교통이 워낙 불편해서 호국원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분들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영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천호국원을 경유하는 시내버스의 배차간격이 거의 한 시간이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영천호국원을 경유하는 황수탕 방면 시내버스를 탔다. 40분을 달려 마침내 영천 호국원에 도착했다.

동대구역에서 낮 12시에 출발했는데 시계를 보니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약323km) 2시간, 대구에서 호국원까지(약55km) 3시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에 속했다.

영천호국원 홍살문홍살문은 성역으로 들어가는 내정문으로 참배객에게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 김민석


관리사무소 앞으로 거대한 홍살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정돈이 잘 된 묘지가 펼쳐졌다. 저 멀리 '호국영령의 충의와 위훈을 영구히 추앙하고자' 세운 현충탑도 조그맣게 보였다. 산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게 운치 있었다.

모든 묘비 곁에는 알록달록 다양한 종류의 조화가 놓여있었다. 묘비 앞면에는 계급과 함께 고인의 성명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참전전쟁과 참전지, 그리고 사망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경찰묘역에는 2년 전 용산참사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김석기 전 경찰청장의 부친 고 김병각씨가 안장되어 있었다.

영천호국원은 현충원과 달리 신분, 계급 차별 없이 접수순서와 승인순서에 따라 모두 같은 규격의 묘지에 안장되고 있었다. 영관급의 경우 대령 11명, 중령 72명, 소령 236명이 안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군 묘는 하나도 없었다.

이와 관련해 호국원의 한 관계자는 "장군 출신은 좀 더 격이 높다고 볼 수 있는 현충원에 갈 수 있는데, 굳이 호국원에 올 이유는 거의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묘역을 둘러본 후 관리사무소로 갔다. 다섯 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현충과 현충팀장 조은진(42)씨는 "봉안묘는 이미 2008년에 만장이 되어 현재는 충령당(봉안당)에 안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교통이 불편한 데다가 비가 많이 와서 인적이 드물었다. 고인의 안장식을 거행하고 있는 검은 상복을 입은 한 가족만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찾지 않는 묘역은 꽤 쓸쓸하게 느껴졌다. 현충원에 비해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천호국원 입구현충문과 현충탑이 보인다. 현충탑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의 위훈을 추앙하고자 세웠다. ⓒ 김민석


[이천호국원] 유골을 야외봉안탑에 모시고 시민공원으로 조성

다음날 이천시 설성면 대죽리에 위치한 이천호국원을 찾았다. 이천호국원은 영천호국원보다 사정이 나았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도권에 인접해 있어서 그런지 가족단위로 나들이 나온 유가족들이 꽤 많았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을 데리고 한 가족은 현충문과 현충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느 분을 뵈러 왔냐"고 묻자 "아버님을 뵈러 왔어요, 우리 아버지는 6·25에 참전하셨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아들이랑 손주랑 함께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천호국원은 2008년에 개원한 곳으로 새로운 안장방식을 도입해 시민공원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영천호국원이나, 임실호국원과 달리 유골을 매장하거나 실내에 모시는 것이 아닌 야외봉안탑에 모시는 방식을 채택했다.

▲ 참전유공자 유가족이 이천호국원을 찾아 봉안탑을 열고 참배를 드리고 있다. ⓒ 김민석


새로운 안장자의 유가족들 모습20일 하루 14명의 봉안함이 안치되었다. ⓒ 김민석


2011년 8월 현재 1구역에서 10구역까지 안장되어 있고, 봉안탑의 높이는 7층이었다. 밀봉된 봉안함의 뚜껑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각 구역마다 하나씩 분향하고, 헌화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각 봉압탑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시대흐름이 벽화로 기품 있게 그려져 있었다.

한 유가족은 "묘역이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봉분이 있는 산소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이천호국원도 영천호국원과 마찬가지로 장군 이상은 한 명도 없었다. 영관급의 경우 대령 9명, 중령 35명, 소령 121명이 안장되어 있고 신분, 계급 차별 및 묘역구분 없이 접수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안장돼 있다.

봉안시설을 관리하는 경비 이기일(52)씨는 "주로 봉안함의 문을 열어드리는 일을 한다"며 "여닫이 문이 개봉되는 때는 기일, 명절, 현충일, 삼우제, 49재 외에도 유가족이 개방을 원하면 열어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분골보관함은 질소를 주입하여 부패될 일이 없고 특수 기능으로만 열리기 때문에 도난당할 염려도 없다"고 덧붙였다.

봉안탑에 그려진 위인들10묘역에는 김구, 안중근 등 독립투사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 김민석


국립묘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어

묘역을 내려와 현충탑 왼쪽 편에 있는 현충관에 들어갔다. 사람이 찾지 않아서인지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1층은 잠겨 있었는데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안장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라 했다.

그리고 2층에는 호국전시관이 있었다. 호국전시관 앞에는 '자랑스러운 천안함 46 용사가 주는 교훈', '우리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등의 제목과 함께 천안함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물 중 '침몰원인 조사결과' 부분에서는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 이천 호국원 전시관 입구에 전시된 천안함 관련 자료에는 천안함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짓고 있다. ⓒ 김민석


이천호국원은 전통적인 안장방식에서 벗어나 참전유공자들의 유골을 야외 봉안탑에 모시고 벽화를 그려 유가족 및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추모공원을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영천호국원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옮겨가고 있는 사회흐름 때문인지 국립묘지에도 이렇게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민석·이주영·윤성원 기자는 14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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