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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못 믿겠더라! 우린 과거로 돌아간다

화천 재래시장의 옛 인정 찾기

등록|2011.09.03 17:17 수정|2011.09.03 17:17

▲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 그것은 우리 마을의 뉴스였다 ⓒ 신광태


"글쎄 살랑골 홀아비 아저씨가 딸내미 뻘 되는 이쁜 처자를 데리고 산다잖우."
"에이 조카가 하나 있는데 갈 데가 없어서 데리고 왔대던데 뭐~."


'누구네 검둥이가 새끼를 열 마리 낳았다더라', 산 넘어 수염 많은 그 김씨 아저씨가 산삼을 다섯 뿌리 캤다더라' 등 1970년대 전통시장의 풍경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창구였고, 지역 여론이 형성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상인들은 앞 다투어 가게 앞에 툇마루를 만들어 아낙들의 수다를 유도했다.

그래야 어느 산골에 사는 주민이 지나갈 때 '그 마을 박씨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붙었대매' 하며 아는 척하면 '그걸 어떻게 알았대' 하면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물건 하나라도 더 팔수 있는 소중한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화천전통시장사온 물건들이 무거우면 아무 상점에 맡기고 간다 ⓒ 신광태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그것들은 우리의 삶이었다

당시엔 어느 가게가 매상을 많이 올리고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흔치 않던 시절, 물건을 많이 팔고 적게 팔고를 떠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가 각 마을에서 모여든 수다쟁이 아줌마들이었으니 말이다.

화천 전통시장. 그 역사가 참 길다. 수복지구인 그곳 화천은 일본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화천발전소 탈환을 위해 수십만 명의 중공군과 아군이 파로호에서 수장이 되었거나 이름 모를 돌무덤만 만들게 하고 세상을 등졌다. 그래서 국민의 가곡'비목'의 탄생지 또한 이곳 화천이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 또한 변변치 못했던 상황. 군부대 부사관급(당시 하사관) 되는 사람들은 취사반에서 쌀 또는 아부래기(어묵) 등을 빼내오거나 군복을 몰래 가져와 민간에 팔았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받은 주민들은 길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군복이며 군부대에서 나온 납작 보리쌀 등을 팔았다. 이것이 1953년대 화천 전통시장이 형성된 계기다.

▲ 시장입구 간판을 바꾸고 바닥을 대리석으로 바꾸면 소비자들이 대형마트를 떠나 전통시장으로 몰려올 것으로 생각했다. ⓒ 신광태


인정이 있어서 그들은 따뜻했다

당시 배추나 무우, 고추, 고구마, 감자 등의 농산물은 스스로 심어서 먹었다. 이런 걸 시장에 내어 놓으면 욕먹기 십상이었다. 미군잠바가 단연 인기 '캡'이었다.

이런 군부대 비리 때문인지 방첩대에서 나왔다는 머리 긴 군인들이 통일화(군화)도 벗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와 사과궤짝으로 만들어진 장롱을 뒤엎는 것은 뉴스 꺼리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또 너무 흔한 일이라 가정에서 식기대용으로 쓰던 군부대에서 들여온 항구(반합)는 단속 대상에서 제외됐다.

1960년대 화천시장은 땔나무를 파는 사람도 많았다. 참나무 장작은 그나마 고급 땔감으로 취급되었고 싸리나무 한짐(한 지게)을 지고 20여리 길을 걸어온 영감은 쌀 두됫박을 받아갔다. 주 고객은 부유층인 군인가족들이었다.

돈을 좀 번 상인들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옆 점포에서 일부러 샀다. 혼자만 돈 버는 게 미안함 때문이었을 게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손자 녀석들 독고리(당시엔 두꺼운 겨울 티셔츠를 그렇게 불렀다)를 사러 30여 리 길을 걸어온 할머니를 위해 상인들은 잠자리도 제공하고 따뜻한 밥도 해드렸다. 독고리 하나 팔아서는 밑지는 장사인 건 알지만 그들에겐 그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시장카트를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주차장 입구에 카트를 마련하면 전통시장에 소비자들이 몰릴것이라고 생각했다. ⓒ 신광태


재래시장 현대화, 그들은 책상에서 그것을 기획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느닷없이 정부에서 재래시장(전통시장) 현대화 사업을 시작했다. 지붕을 캐노피시설로 바꾸고 바닥도 대리석으로 깔았다. 화재도 예방하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대형마트를 견제하기 위함 이라고 했다. 간판도 규격이나 모양을 일률적으로 똑같이 만들도록 했다.

그들(정부)의 시각이었다. 자본으로 무장한 그들(대형마트)을 이길 수 없다는 논리를 그들은 책상에서 결정했다. 결과는 상인들의 인정도 말라갔다. 덤으로 주는 문화, 아낙들이 수다를 떨며 지역뉴스를 제공하는 풍습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주차장을 만들어 옆에 카트를 비치하면 소비자들이 여유를 가지고 재래시장을 돌아 볼 것이라고 생각했는 관료들의 착각, 시장바닥에 대리석을 깔면 재래시장(전통시장)으로 고객들이 몰린다는 그들의 위대한 착각.

▲ 시골 할머니들이 머우, 깨잎, 꼬들빼기, 가을상추를 가지고 나오셨다. 다 팔아야 2만원 남짓...그러나 거기엔 인정이 있다 ⓒ 신광태


옛날로 돌아가자! 그래야 전통시장은 산다

상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툇마루를 다시 만들자, '선을 그어 놓고, 이 선을 넘으면 안됩니다' 라는 규정도 대충 어기자! 하나 더 덤으로 줘서 당장은 손해를 볼지 모르지만 앞으로 내 고객이 될 거다'라는 어느 상인의 말이 진리다.

"우리 아들 왔네~ 이 촌떡 하나 먹고 가! 내가 너한테 돈 받겠니!"

자랑 같지만 기자는 화천 전통시장에서 모든 할머니들의 아들로 통한다. 모름지기 정월 대보름 또는 시장 단합대회 하는 날, 연가를 내서라도 아리랑에 맞추어 추던 그 어줍잖은 춤이 많은 어머님들께 '얘는 공무원이 아니고 푼수야!'라고 생각하게 만든 결과인 듯싶다.

중앙부처에 계신 공무원님들! 지금도 시장 바닥을 바꾸고 지붕을 바꾸고 간판을 같은 규격으로 만들면 전통시장이 살아난다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단, 몇 시간만 시간을 내서 시장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도 그 시장의 특성을 알아낼 것을. 어떻게 책상에서 그렇게 대단한 해석을 하셨을까! 정말 모를 일입니다.

방승일 화천시장조합장(55세)남들이 현대화를 추구할때 우리 상인들의 마인드는 과거로 돌아가야 살길... ⓒ 신광태

덧붙이는 글 신광태 기자는 화천군청 홍보담당 공무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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