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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최무룡'보다 멋있었던 '김완수 관장'

복싱 인생 80년, 김완수 관장 "의리 모르면 훌륭한 선수 될 수 없다!"

등록|2011.09.04 15:17 수정|2011.09.05 10:43

▲ 군산시 월명동 월명산 아래에 자리한 군산체육관 ⓒ 조종안


전북 군산시 월명동에서 월명산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면 근육질의 흑인 복싱선수와 눈이 마주친다. 이색적인 그림이 그려진 시멘트 건물은 56년이 지나는 동안 1만 5천여 복서가 거쳐가면서 한때는 한국 아마추어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군산체육관.

엊그제는 80평생을 하루같이 사각의 링을 지켜온 주먹의 사나이 김완수(82세) 관장을 찾았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나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복싱이 좋아서 시작했다며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매일 한두 번은 체육관을 찾는다고 했다.

▲ 제6회 대한민국체육상 표창장(왼쪽)과 중앙대학교 선수시절의 김완수 관장(오른쪽) ⓒ 조종안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대학교 선수 시절의 김관장 사진과 색바랜 표창장이 체육관 연륜을 말해주는 듯하다. 수많은 복서가 거쳐갔을 사각의 링과 낡은 샌드백, 각종 운동기구에서 풍기는 남성의 체취가 마음을 사뭇 무겁게 한다.

복싱 전성기에는 젊은이 100여 명이 거울을 맞대고 땀을 흘렸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한 달 회비는 8만 원을 받고 있지만, 몇 사람 되지 않아 건강을 생각하는 소수의 복싱 팬들을 위해 김 관장이 없는 사비를 털어 운영하고 있단다.

군산 영화동에 자리한 종합체육관 일부를 빌려 사용하다가 1968년에 떨어져 나왔으니 이곳에서만 43년이 되었다. 처음엔 미군이 사용하던 콘센트를 옮겨 지은 건물이어서 지붕이 이글루처럼 둥글었으나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시멘트 건물로 개축했다고.

일본인 교장 관사 비둘기 날려 보내고 퇴학당하다

한국 아마추어 복싱계의 산증인 김완수 관장은 1931년 12월 8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부모를 따라 군산으로 온다. 이듬해 신풍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일본인 교장 관사에서 키우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다.

일제강점기였으니 하늘처럼 우러러보셨을 교장 선생님 관사 비둘기를 무슨 이유로 날려 보냈느냐고 묻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어렸을 때지만, 왜놈 교장 '이토'가 미웠어!"라고 짧게 말했다. 옛 기억을 더듬는 그의 주름진 얼굴에서 세월의 무상함도 함께 느껴졌다.

▲ 군산중학교 1학년 때 익산(이리) 시합에서 우승하고 돌아와 군산역 구시장 근처에서 친구들과(가운데가 김관장) ⓒ 조종안


중앙초등학교로 옮긴 김완수 학생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는 슬픔 속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인은 입학이 어려웠던 군산중학교(5년제)에 진학한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김관장의 외길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중학교 1학년 때 복싱을 시작했던 것.

김 관장은 복싱을 무척 좋아해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글러브를 끼고 스파링을 했다고 덧붙였다. 일본 오사카(大阪) 관서(關西) 프로권투선수권 보유자로 활동하다 해방과 함께 귀국, 1946년 군산에 복싱도장을 차린 손용(孫勇)씨에게 소질을 인정받았다고.

편모슬하에서도 특기생으로 중앙대학교에 입학, 졸업할 때까지 전형적인 인파이터 복싱을 구사하며 전국학생선수권 대회와 전국체전에서 우승(밴텀급)하는 등 정상급 선수로 부상하며 다양한 경력을 쌓는다. 김관장은 10년 남짓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20대 중반에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인기 영화배우 '최무룡'보다 멋있게 보였던 김완수 관장

▲ 처음 체육관을 개관하고, 운동구점 앞에서. 진열장에 붙은 영화 포스터(1956년 작, 쌍무지개 뜨는 언덕)가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 조종안


김관장은 1955년 김판술(전 농림부장관) 전 의원과 군산중고 동창회 후원으로 둔율동(구 옥구 군청 뒤)에 복싱체육관을 개관한다. 당시 회비는 200환. 체육관을 어렵게 운영하면서도 1959년에는 지금의 아내(76세)를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60년대 초에는 둔율동 시절을 마감하고, 영화동에 있는 군산 종합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문득 철부지 시절에 고향동네 공설운동장(일출운동장)에서 봤던 김완수 관장의 멋진 모습이 떠오른다. 야외에 설치한 링에서의 혈전을 손에 땀을 쥐고 봤던 기억도 새롭고.

▲ 군산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복싱대회 광경(60년대) ⓒ 조종안



프로권투가 낯설었던 50-60년대 복싱대회는 시내 초등학교 운동장이나 공설운동장, 아니면 학교 강당이나 극장 무대 등에 '특설링'을 설치해놓고 개최했다. 입장료는 무료. 간혹 전국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TV가 없던 때여서 동네 아이들은 물론 시골 노인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당시 김 관장은 피부가 고운 30대 호남형 얼굴. 그래서 그런지 하얀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 차림의 김 관장이 1회전을 마치고 내려온 선수를 다독이며 격려하는 모습은 애인과 사랑을 속삭이던 인기 영화배우 최무룡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두 분 모두 곱슬머리에 깔끔한 스타일이어서 그렇게 비교되었을 것이다.

가난한 제자들 끼니 해결해주면서 챔피언 만들어 

체육관을 처음 개관하고 제자들과 굶기를 밥 먹듯 할 때도 있었다고, 그래도 군산 영동 입구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던 큰형님과 경찰서 로터리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던 작은형 도움으로 어렵게나마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단다. 옆에 있던 사모님은 형제애가 무척 두터웠다고 귀띔했다.

▲ 한일아마추어권투 연맹전에 참석하고. 군산시 후원자들과 체육관에서 기념촬영.(69년) ⓒ 조종안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프로는 '권투', 아마추어는 '복싱'으로 표현했는데, 군산에서는 전기배(전치과 원장)씨를 비롯한 안형채(만수병원 원장) 등 시민 다수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차형근 변호사(전 국회의원)와 개정병원 이영춘 박사도 도와주었다.

60년대부터는 군산 아마추어복싱 연맹 회장으로 추대된 이영춘 박사가 스폰서 역할을 해주었다. 1968년 지금의 체육관 자리로 옮길 때도 이 박사가 계약금 5000원을 지원해주어 구입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김관장 부부는 1980년 늦가을에 돌아가신 이영춘 박사를 지금도 부모처럼 생각한단다.

자상하고 후덕한 김 관장 큰형님 말만 믿고 결혼했다는 사모님에게 살아온 얘기 좀 들려달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권투가 무엇하는 운동인지도 모르면서 결혼식을 올리고 따라와 보니 끼니 해결도 어렵더라는 것.

"이 양반(김 관장)이 명함을 주는데 '군산 권투구락부 사범'이라고 써 있는 게예요. 뭔 말인가 했죠. 그래서 동생에게 사범이 뭐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빽도 있고, 힘도 있어야 허는 거다'고 해서 '아, 뭔가 허기는 허는 모양이구나!' 했죠. 거기에 형님들 인품도 좋고, 형제들 우애도 좋고 혀서 맘 놓고 결혼혔는디 와보니까 집도 절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 삼학동 '흑구데기'에서 살았어요. 부엌도 없는 셋집. 그러니까 쪼끔은 속은 거죠···."(웃음)

생활에 쪼들려서 그렇지 남편(김관장)이 속 썩이는 일은 없었단다. 제자들이 찾아오거나 군산대 복싱부를 지도하고 있는 작은아들(김형욱: 46세)이 대회에 다녀와 "어른들이 아버지 칭찬을 입이 마르게 하면서 안부를 묻더군요"라는 말을 종종 한다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는 "인생을 아주 헛되게 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보람을 느낀다고.

1968년 4월에는 후진 양성과 체육 발전에 공적을 쌓은 체육인에게 주는 제6회 대한민국체육상 지도상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 관장은 아마추어 복싱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술회했다.

그해 4월 25일 오전 10시 문교부(교육부)가 주관하는 시상식은 많은 체육계 인사와 시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당시 김 관장은 부부동반으로 참석, 상장 및 금메달과 부상으로 상금 30만 원을 받고 감격해 했다고. 사모님도 "그때 30만 원은 시골의 작은 집 한 채 값이었어요. 꿈만 같아서 눈물을 다 흘렸어요!"라며 당시 심정을 전했다.  

1969년 9월에는 한국 대표팀 코치로 선발된다. 그해 9월 12일부터 일본 '고라구엥 후낙원'에서 열리는 제1회 아세아 주니어복싱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대표 선수 8명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것. 김 관장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지방 소도시 체육관 관장이 국가대표팀 코치로 추천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 1965년 아세아 선수권 대회에서 3체급을 석권하고 집에 찾아온 제자들과 함께. 뒤쪽 왼편부터 시계바늘 방향으로 황영일 선수, 김완수 관장, 서상영 선수. 박구일 선수 ⓒ 조종안


김관장 지도를 받으며 60년대에 이름을 떨친 선수로는 박구일(65년~69년 아시안게임 라이트 웰터급 금메달), 이원석(아시아선수권 플라이급 챔피언. 65년 프로 전향, 밴텀급 동양챔피언 5차 방어 성공, WBA 1위), 서상영(65년 아시아선수권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황영일(65년 아시아 선수권 밴텀급 챔피언), 김세일(1966년 한·일 친선 고교 복싱대회 플라이급 우승) 등이다.

또한 김현호(77년 아시아선수권 슈퍼헤비급 챔피언)에 이어 김의진(77년 아시아선수권 라이트미들급 챔피언), 곽동선(제6회 킹스컵 국제복싱대회 밴텀급 우승), 오영호(제13회 킹스컵 국제복싱대회 라이트플라이급 우승), 유성룡(제1회 한국·오키나와 교환경기 라이트급 우승) 등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활약하며 군산의 권투를 세계무대에 올려놓았다.

군산 복싱체육관에서 배출된 수련생은 9800여 명에 달하며 이들 중 국제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27명, 입상은 아시아복싱대회 금메달 13개, 은메달 6개, 동메달 3개이며 전국복싱대회에서는 370여 명이 입상했다. (2000년 기준, 군산 시사 참조)

아마추어 복싱 끝까지 지켜

▲ 1960년대 말 군산체육관 모습. ⓒ 조종안


세월의 변화에 따라 모든 스포츠가 프로로 바뀌었다. 그러나 김 관장은 오로지 아마추어 복싱을 고집하면서 우수한 선수를 배출했다. 10회 이상 치르는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3회로 끝나는 아마추어에서 기본기를 익혀야 하므로 체육관을 찾는 복서 지망생이 끊이지 않았다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심판으로 활동했던 김 관장. 그는 아직도 식지 않은 복싱에 대한 애정을 "지금은 선수들을 지도할 힘은 없지만, 대회에 참여할 수는 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체육관을 작은아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그를 '복싱을 위해 태어나 복싱을 위해 사는 사람' 외에는 달리 표현할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수선수 발굴에 마지막 혼을 불사르고 있는 김 관장은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월명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가 그곳에서 하루를 계획하며 외길 복싱인생을 되돌아보곤 한다고. 그는 "의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 관장은 "모두가 못 살던 때였지만, 특히 복싱하려는 젊은이들은 생활이 유별나게 어려웠었다"고 회고했다. 배고픔을 함께 하면서 배출된 제자들이어서 그런지 명절이나 생일 때면 초로의 신사들이 집 대문을 두드린다고. 몇 년 전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이원석 전 동양챔피언이 다녀갔단다.

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도 올 추석명절에는 어디에 사는 어느 선수가 문안 인사를 올지 궁금한 마음이 앞섰다.

추억의 앨범

ⓒ 조종안


덧붙이는 글 기사에 사용된 흑백사진은 모두 김완수 관장이 제공한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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