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실용주의 패션' 여인, 어디로 가는 거지?
[다큐 3시간] 4호선 타고 안산-당고개 왕복 여행
▲ 한산한 토요일 오전 거리 ⓒ 이명주
9월3일 오전 9시21분
휴일 치고 이른 시간임에도 빈 좌석이 거의 없다. 대다수 사람들의 표정이나 복장이 나들이객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주5일 근무 시행 7년째지만 광범위한 사각지대의 반증 같기도. 지하철 타기 직전 재빨리 뽑아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여느 여행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설렌다.
출발 후 세 번째 정착연인 이촌에서 '둘둘이 모자' 판매원이 승차한다. 고무 재질에 오그렸다 폈다가 자유자재로 되는 창이 넓은 모자. 유용할 것 같지만 판매 욕구가 일진 않는다.
맞은편 정면.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셋이 지치지 않고 수다를 떤다. 가장 소란스런 한 명이 대화를 주도하고 다른 한 명은 열심히 호응, 나머지 한 명은 약간 소외된 느낌이다. 노약자좌석엔 외국인 중년 한 명과 한국인 중년 한 명이 거리를 두고 앉았다.
평소 일반좌석과 노약자좌석이 모두 비어있을 때 본인은 후자를 택해 앉는다. 두루두루 섞여 있는 게 좋다는 생각에서다. 언젠가 오랜 지기인 듯한 할아버지 두 분이 차를 탔는데 그 중 한 분이 "늙은이는 늙은이 좌석에 앉아야지" 하며 벗을 타박하는 걸 봤다. 또 한 번은 이제 갓 '신입 노인'이 된 듯한 남자가 일반좌석에 앉아 있다 청년이 들어오자 슬그머니 일어서는 것도 봤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일은 아름답지만, 편을 가르듯 구분짓는 것은 불편하고 냉정한 일 같다.
▲ 지하철 4호선 ⓒ 이명주
오전 9시37분
오른쪽 바로 옆에 앉은 남자의 문자메시지 목록이 보인다. 의도한 바는 없다. 카드결제 내역 뿐이다. 남자의 손가락이 심드렁하다. 구멍 난 남의 속옷을 우연히 본 것처럼 미안하다. 오늘 안에 그 남자에게 '지극히 사적인' 행복한 문자가 도착하길 빈다.
화사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백발의 파마머리 할머니가 들어온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개구름이 생각난다. 구두와 백(bag)까지 '깔맞춤'하셨다. 나이가 적건 많건 외모 관리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좋다. 보기에도 그렇거니와 일종의 자기애 같은 것이 느껴져 신뢰가 간다.
'하늘 할머니' 옆으로 얼굴이 뵈지 않는 여자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통화를 한다. 가래가 낀듯 걸걸한 고음인데다 말투가 거칠어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차량 내 대부분 승객들이 목소리의 진원지를 쳐다본다. 공공장소에서 저리도 무심하게 자기 사무를 볼 수 있는 사람이란 이해하기도 힘들 뿐더러 다소 공포스럽다.
오전 9시52분
▲ 지하철 안 풍경 ⓒ 이명주
이번 역은 서울랜드 대공원. 동물원이 있는 곳! 갈 때마다 기대한 것보다 재미있는 장소가 동물원이다. 그러고보니 4호선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참 많다. 대학가로는 성신여대, 한성대, 숙대가 있고 덕수궁, 광화문, 청계천, 서울광장 등을 둘러볼 수 있는 혜화, 명동과도 이어지고, 경마공원, 대공원과 함께 서울랜드가 있는 과천과도 연결된다. 그 외에도 수리산과 인덕원, 신길온천역이 눈에 띈다.
졸립다. 언제 탔는 지 정면 앞좌석에 샛노란 티셔츠를 입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이어폰을 끼고 있지만 시선은 주변 사람들을 따라 움직인다. 가끔 '사람 구경'에 정신이 팔리면 그 대상이 살아있는 사람임을 깜빡 잊고 너무 오래 쳐다보는 실수를 저지른다. 상대도 꾀나 당혹스러운 일일 텐데 가서 "미안합니다" 할 수도 없고 퍽이나 난감해진다.
오전 10시
금정역. 문이 열리고 여러 무리의 인파가 쏟아져 들어온다. 덥고 텁텁한 기운도 함께. 10여 일 전 숙대 근처로 이사하기 전까지 4호선은 그닥 탈 일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충동적으로 차에 올라 이렇듯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남다르다.
늦잠을 자거나 TV를 보고 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세상. 이런 생각을 하면 생판 남인데도 애튼한 심정이 된다. 비행기를 탈 때 상공에 떠 있는 그 순간 만큼은 기체 내 모든 이들과 '운명 공동체'라고 자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 종착역이 가까울수록 바깥 풍경이 푸르러졌다. ⓒ 이명주
오전 10시25분
출발 1시간 4분 만에 종착지인 안산에 도착. 계속 앉아 있으면 차량이 알아서 돌아나가는 건지 내려서 바꿔 타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앉아 있기로 한다.
단 한 명만이 지하철의 짧은 휴식을 지켜본다(내가 아는 바로는). 어린 날 읽었던 고래뱃속에 들어간 사람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사이 수 분이 흐른다. 의식이 돌아온 환자처럼, 차량 내 전광판에 종착지명이 '당고개행'으로 바뀐다. 그리고 새로운 승객들이 자신들이 오늘 첫 손님인냥 차에 오른다.
연극의 2막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잔뜩 들뜬 표정의 외국인 일행이 "원, 투" 라고 외치며 기념촬영을 한다. 그러고 보니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이들이 제법 보인다. 인근 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인지도. 한국 속에 한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나와 가까운 곳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음을 직감한다.
▲ 도심으로 갈 수록 어두워지는 풍경 ⓒ 이명주
이번역은 '고잔'. 찰랑찰랑하게 채워진 소주잔 속 투명한 소주가 생각난다. 고잔(苦盞). 쓴 잔. 소주 한 잔! 앙칼진 십대 소녀들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진다. 오는 길에 봤던 고성방가 아줌마와 맞먹는 수준이다. 왼쪽에 앉은 진갈색 피부의 외국인 남자 둘도 제법 소란스럽지만 그에 견줄 바가 아니다.
욕설의 비중이 전체 말의 50%를 차지한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무시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요즘 유치원과 초중고에서는 '공중도덕'이란 것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만큼의 비중으로 가르치는지 궁금하다. 나 어릴 적 초등학교 선생님은 우리를 조용히, 그리고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했다.
선생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떠들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합죽이가 됩시다, 합!" 하는 선창이 들린다. 바로 선생님의 목소리. 그럼 아이들이 마지막 "합!"에 입을 맞추려 본능적으로 따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2초 만에 교실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소녀들 앞으로 나아가 "합죽이가 됩시다, 합!"을 외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오전 10시40분
내내 앉아 있으나 뒷목이 뻐근하다. 허리도 쑤신다. 기왕 지하철 여행을 결심했다면 읽을 거리와 들을 거리, 그리고 약간의 주전부리를 준비하는 것도 좋겠다. 우측 45도 각도로 서로에게 귓속말을 하며 웃음 짓는 어린 남매가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개념 남매'다.
지루할 것을 대비해 갖고 온 어학기로 영어 듣기와 말하기 연습을 한다. 참으로 유용한 공간이다. 잠을 잘 수도 사색에 전념할 수도 있고, 책을 봐도 음악을 들어도 되고, 그저 오가는 사람과 차창 풍경을 음미해도 된다. 냉난방 서비스는 사계절 완벽하고. 대화하길 좋아하는 돈없는(혹은 검소한) 연인들에게 한여름 혹은 한겨울 데이트 코스로도 권장한다.
▲ 꽤나 유용할 것 같은 스템플러 모양의 미니 재봉틀 ⓒ 이명주
오전 11시40분
명동역. 오호, 저만치 오랫동안 찾던 '미니 재봉틀' 판매상이 걸어온다. 스템플러 모양의, 크기도 딱 그만한 휴대용 재봉틀이다. 가격은 3000원. 자취하면서 바지나 남방의
아랫단이 떨어질 때마다 아쉬운 물건이었다. 웬만해서 고개조차 들지 않는 사람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저 물건의 유용성을 나만 인정한 게 아닌가 보다. 벌써 3명째 구매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번에도 구매 실패. 가진 게 신용카드 한 장 밖에 없다.
오전 11시44분
도심 깊숙이 진입할 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메마르고 어둡다. 오이도행 때와는 대조적이다. 차창 풍경도 전자가 하늘과 나무 위주의 푸른색이었다면 후자는 회색빛과 흑빛의 연속이다. 외부환경과 내면의 심리상태가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기분을 밝게 해줄 음악이 듣고 싶다.
슬슬 사람구경이 지겨운 찰나 11시 방향 한 아주머니의 '초실용주의 패션'이 다시 시선을 끈다. 과하게 밝은 살색 발목 스타킹 밖으로 일명 '글레디에이터 샌들'을 신고 있는 중년 여인. 스타킹 위로 드러난 다리에는 멍 자국과 털, 핏줄 등이 선명하다. 한때는 어여쁘고 수줍은 소녀였고 아가씨였을텐데, 무엇이 저 여인을 저토록 극단적인 실용주의자로 내몰았을까.
▲ 한 아주머니의 '초실용주의 패션' ⓒ 이명주
오전 12시 21분
어느새 지하철 탑승 3시간. 조금 전 두 번째 종착역인 당고개에서 지하철을 청소하는 미화원 아주머니와 잠시 대화했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10시까지 근무를 한다 했다. "힘들겠다" 하니 "말하면 뭐하냐"며 웃는다. 어두운 터널 안에서 비질을 끝낸 여인과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배가 고프다. 라면의 쫀득한 면발과 얼큰한 국물이 생각난다. 이제 곧 출발지였던 숙대입구역. 어서 집으로 돌아가 출출한 속을 채우고 낮잠을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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