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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잘려'가며 만들었는데...그들이 '잘렸다'

[기타에게 자유를! 음악엔 혁명을! ③] 다른 기타 이야기, 콜트-콜텍 '꿈의 공장'

등록|2011.09.14 11:44 수정|2011.09.14 13:43
2007년부터 시작된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은 1700일 가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9월 1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음악 다큐 <꿈의 공장>은 이러한 투쟁 과정을 담아냄과 동시에, 화려한 무대 뒤에 가려졌던 음악산업의 불편한 진실을 거침없이 드러낸 작품입니다. 영화의 개봉이 이 힘겨운 싸움에 작은 힘이 되길 바라며, 배급사 '시네마 달'이 [기타에게 자유를! 음악엔 혁명을!]이라는 타이틀로 연재기사를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 영화 <꿈의 공장>의 한 장면. ⓒ 시네마달

꿈에 그리던, 김성균 감독의 음악다큐 <꿈의 공장>이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한번쯤은 글을 써야지 하다 4차 희망의 버스 준비를 한다고 내내 밀어두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 깨어보니 또연에게서 '내일까지는 꼭'이라는 문자가 다시 들어와 있다. 그렇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지.

그러니까, 2008년 9월쯤이었을 것이다. '기륭전자비정규직 1000일 투쟁 공동대책위'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64만 원을 받던 파견직 노동자들과 함께 그간 두 번의 고공농성과 두 번의 국회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점거, 그리고 당시엔 마지막 남은 10명의 조합원들 전원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 있는 때였다. 희망의 버스 일을 하는 지금처럼 경황이 없을 때였다.

어느날 촛불문화제가 끝난 후, 한 노동자들이 잠깐 만나고 싶다고 찾아왔다. 어수룩하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이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이었다. 요지는 공장에서 쫓겨난 지 500일을 맞는데, 그 문화제를 같이 준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사실 난감했다. 기륭 1000일도 버거운데, 이젠 콜트-콜텍 500일이라니. 가능하다면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잊고도 싶었다. 하지만 쉽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2007년 겨울, 대전 콜텍공장에 들려 르포작업을 돕던 때, 천막에서 재정사업용 수세미 뜨개질을 하던 이들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깁슨, 알바네즈, 휀다 등 전 세계에 유통되는 기타의 1/3을 주문자생산방식으로 만들어 왔으면서도 누구 하나 기타 한 대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 하나 없이 꽉꽉 닫아놓은 공장 안에서 쉴 새 없이 알을 까내야 하는 양계장의 닭들처럼 시름시름 병들어 가던 사람들. 기계톱에 손가락을 잘리고, 빼빠질과 연마질로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꽉 막힌 도장장에서 유기용제를 마시며 일하다 거개가 기관지염과 천식에 시달리던 노동자들. 그래도 예쁜 자개 문양을 달고 전 세계로 나가는 기타들을 볼 때면 흐뭇해하던 노동자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여 년 밤낮없이 기타만 만들던 사람들이었다.

콜트-콜텍 얘기를 사명으로 받아들인 김성균 감독

며칠 후 기륭 콘테이너가 있는 골목 슈퍼 옆에서 벗들인 문화연대 원재와 유아를 만났다.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해결해 나가보자는 상기된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가을바람이 선선하던 날로 기억한다. 당시 그들을 위한 국제 록페스티벌을 해보면 정말 좋겠다는 꿈을 이야기하며 잠시 서로 설레던 생각이 난다. 사진을 찍는 노순택과 노래하는 연영석, 명인, 그리고 <클럽 빵>사장 김영등과 파견미술가 모임 등이 모여 첫 회의를 하던 때가 기억난다. 지금은 인천 인권영화제 팀의 기선과 민주노동자연대 등이 참여해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 후로 3년여, 생각해보면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김진숙처럼 이들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기도 했다. 2007년 12월엔 인천 콜트의 이아무개 조합원이 분신을 했다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다. 고공농성도 해봤다. 양화대교 옆 강변 15만KW의 전류가 흐르는 40여m 송전탑에 올라 고공단식까지 하기도 했다. 이어진 방화동 본사 점거, 그리고 2007년의 일주일간의 콘서트, 매달 마지막째 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홍대 앞 클럽 빵에서 열던 연대콘서트. 2008년 모던록 페스티벌. 그리고 미국, 독일, 일본 등 6번에 걸친 해외원정투쟁. 눈물겨운 일도 많았고, 기쁜 일들도 많았다.

그 모든 일을 기록해주는 소중한 벗들이 있었다. 김성균 감독과 강성훈이었다. 난 단 한번 그들에게 말을 건넸을 뿐인데, 그들은 이 일을 자신들의 어떤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간 3년여 동안 정말이지 필름 값 한번을 줘보지 못했다. 문 닫힌 공장이 있는 대전과 인천을 오가는 동안 여비 한번, 나중엔 독일과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6번의 원정투쟁 기록 과정에서도 미안하지만 한두 차례 빼고는 항공비조차 마련해주지 못했다.

어느 해는 사진기를 팔았다고 했고, 어느 해는 카메라를 팔았다고 했다. 우리 역시 어떤 해는 콘서트 티켓을 팔았고, 어떤 해는 그림을 팔아야 했다. 간신히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여비를 맞추고 나면 땡이었다. 노동자들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벌이가 없는 가난한 다큐작가들의 생활을 아는지라 미안하고 마음이 짠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는 한국 부자 120위 박영호

▲ 영화 <꿈의 공장>의 한 장면. ⓒ 시네마달


그 첫 작품이 <기타(其他) 이야기>였다. 기타가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들은 기타(其他)의 사람들이 되어 쫓겨났는지, 왜 홍대 앞 뮤지션들과 문화예술인들이 그들과 함께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어떤 꿈을 노래했는지를 담은 아름다운 이야기 다큐였다. 서울과 인천의 인권영화제에 초청되고, 공동체 상영 등을 통해 조금씩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의 잘린 꿈이, 부서진 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다시 2탄 <꿈의 공장>이 만들어졌다. 현재 이 꿈의 공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박영호 사장은, 한진중공업의 조남호 회장처럼 공장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빼돌렸다. 조남호가 몇 년 사이 3000여 명의 한국노동자들의 목을 자르고 현재 수빅조선소에서 다시 2만 여 명의 비정규노동자들의 생과 노동을 빼앗고 있듯, 박영호는 지금 인도네시아와 중국에서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을 다시 노예처럼 부리고 있다.

조남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정리해고 이전 10여 년 동안 매년 100억원대의 흑자를 내고도 1년 적자를 이유로 2007년 인천과 대전공장 노동자들 전체를 정리해고하고 위장폐업에 들어갔다. 상장도 하지 않은 1인 대주주인 박영호는 수천억에 달하는 자산가로 근 30년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기타를 원하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천문학적인 부를 강탈해 한국부자 순위 120위에 올라 있기도 한 이다.

2009년 11월 고등법원조차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의 근로기준법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부당해고라고 판결 내렸지만 사측은 위장폐업을 풀지 않고 지금껏 단 한 번의 교섭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조남호처럼 국회 환노위가 증인 신청을 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법원은 웬일인지 2년여 째 판결을 미루고 있다. 4차 희망버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사업장 문제가 아님에도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공동투쟁단'으로 함께 나선 일은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대 노동자들의 삶은 이렇게 고통과 배제 속에 초국적으로 얽혀 있다.

잃어버린 <꿈의 공장> 찾아 전세계를 헤맨 노동자들

▲ 영화 <꿈의 공장>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이렇게 잃어버린 <꿈의 공장>을 찾아 전 세계를 헤매야 했던 기타(其他)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꿈의 공장>은 담았다. 다국적 하청에 하청으로 내몰리는 자본의 사슬을 역순으로 찾아가는 힘겹지만 당당한 여정들이었다.

해외의 뮤지션들 역시 이런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연대에 함께 해주었다. 2010년 1월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적인 악기쇼 'NAMM Show(이하 남쇼)'에 갔을 땐, 세계적 록그룹 'RATM'의 탐 모렐로와 남쇼의 공식 초청홍보대사이자 방금 전 미식축구 프로리그 결승전에서 공연을 하고 온 피닉스 벤자민 등이 공식 지지 선언과 공연에 함께 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말했다. "노동자들의 아픔이 서린 기타, 착취 받는 기타로는 노래할 수 없다"라고.

영국의 기타 회사 아발론의 스티브 맥윌리스는 "우리는 박영호 사장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거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기타 회사 ESP의 맷 매시안다로 회장도 "우리는 더 이상 콜트와 관계가 없다, 박영호 사장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도 거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라고 했다. 주 거래사인 휀다사에서는 세계 여론에 밀려 결과적으로는 졸속이었지만 지난 1년여 동안 공식적인 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그 모든 세계적 과정이 이 <꿈의 공장>에 섬세하게 담겨져 있다.

그들과 함께 해 온 3년여. 사실은 매번 미안했었다. 2009년엔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 일로, 다시 2010년엔 기륭전자비정규직 끝장투쟁으로, 그리고 그 과정에 떨어져 다치며 꼭 필요할 때마다 자리를 비워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 다시 병상에서 목발을 짚고 나오며,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공공연히 약속했던 것은 올해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일과 <콜트-콜텍 기타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노동자모임>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계획은 우리가 처음 만나 꿈꾸었던 그 일.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국제 록스티벌'을 열자는 것이었다. 1만여 명의 제안자들을 모으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문화가, 우리들의 문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름다운 자리를 통해 밝혀보자는 꿈이었다. 초국적 자본의 흐름에 맞서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연대의 자리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매월 마지막째 주 수요일, 홍대 클럽 빵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더 알차게, 더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꼭 작년 이맘 때였던 것 같다. <꿈의 공장>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 되었을 때 근 40여 명이 몰려가 신나했던 2박 3일의 기억. 가장 값싼 바닷가 민박을 찾아 헤매던 일. 아침에 깨어나 바닷물에 몸을 담갔을 때 그 파랗고 시원하던 느낌. 맑던 하늘. 신나하던 우리들의 모습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내려갈 때 김진숙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 요청을 해볼까 했었지. 부산지역의 노동자들이 함께 이 <꿈의 공장>을 봐줬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하고 싶었었지.

조남호·박영호 같은 사장 없는 '꿈의 공장' 올까

▲ 영화 <꿈의공장>의 한 장면. ⓒ 시네마달


이렇게 우리의 삶은 모두 연관되어 있다. 나는 올해 다시 그 <꿈의 공장>을 찾아 부산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으로 향했고, 그 여정은 끝이 쉬이 보이지 않은 채 칼날처럼 이어지고 있다. 수배 생활로 들어왔고, 끝내 그토록 가고 싶었던 8월 30일 <꿈의 공장> 특별시사회엘 갈 수 없었다. 우리가 지난 3년여 동안 걸어왔던 세계의 길이, 전국의 십여개 개봉관에서 상영된다는데도 가 볼 수가 없다. 그런 나를 오히려 위로하고, <희망의 버스> 꼭 승리하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콜트-콜텍 동지들에게 눈물이 난다.

아,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노동과 생을 갉아먹는 거머리같은 사장들이 없는, 조남호 같은, 박영호 같은, 이건희 같은, 정몽준 같은 사장들이 없는, 회장들이 없는 <꿈의 공장>을 가져 볼 수 있을까. 실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인인 <꿈의 공장>을 가져볼 수 있을까. 245일째인 김진숙과 그의 동료들을 생각해도, 5년째 길거리 생활인 콜트-콜텍과 재능교육비정규직 동지들을 생각만 해도 자꾸 눈물만 난다. 이 억울함을, 이 분노를 어떻게 갚아줘야 할까. 이 사랑의 마음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까.

누군가 다시 나를 대신해 어둔 상영관의 한 자리에 앉아주길 바라본다. 희망의 버스의 한 좌석 좌석이 차 나가듯, 콜트-콜텍 기타만드는 노동자들이 <꿈의 공장>으로 가는 이 긴 여행의 한 좌석 좌석이 채워지면 좋겠다. 지금은 버스와 상영관의 좌석에 앉아 있지만, 우리 언젠가는 이 사회의 썩은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저 광장으로 달려 나갈 것이라는 마음들을 담아 앉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우리 지치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서로를 북돋으며 힘써 달려 나갔으면 좋겠다. <희망의 조선소>와 <꿈의 공장> 노동자들 모두 화이팅! 아름다운 우리 모두 화이팅! 처음 콜트-콜텍과 함께 써보았던 시 한 편 올려놓아 본다.

꿈의 공장을 찾아서
-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연대의 노래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인천으로 빠지는 길가
섬처럼 버려진 조그마한 악기공장이 있다 콜트악기다
전자기타를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대전 지나 계룡IC로 빠지면
또 문 닫힌 공장 하나가 있다 콜텍악기다
통기타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30년 동안
사람들 몰래 세상을 튜닝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던 이들이 있다
세계 기타의 삼분의 일을 생산했다
하나같이 시골 장터 옹기처럼 수더분한 사람들
짝눈이도 있고 3급 장애인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지문을
기타 몸체처럼 잔금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게 만들었다
창문 하나 없던 공장에서 유기용제를 다루며
자신의 폐를 기타통 속처럼 숭숭 구멍 내
작은 호흡에도 울리게 했다

사장은 그런 노동자들의
지문과 기침과 땀과 눈물을 화폐로 바꿔
1000억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더 값싼 기계들을 찾아
공장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빼돌렸다
화폐의 가치만이 신기루처럼 쌓여가는 세상에서
1000일째 갈 곳 잃은 사람들

지금은 문 닫힌 공장
그러나 한때 이곳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노래를 낳던
희망의 공장이었다 세상의 모든 혼돈을
가지런히 조율하던 사랑과 연민의 공장
세상의 모든 가녀린 목소리들을 하나로 묶던 연대의 공장이었다

노래가 노래를 배반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
삶이 삶을 배반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위해
이 공장을 살려내라
이 공장은 우리 모두의
꿈의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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