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200승, 한국야구사의 서글픈 순간
[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25] 2006년에 세운 통산 200승 금자탑
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기자말>
2006년 8월 29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광주 경기에서 한화 이글스 타선은 유난히 집중력이 돋보였다. 2회 초,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에 시달리던 기아 선발 전병두가 갑자기 흔들리며 김태균과 이범호에게 거푸 볼넷을 내주자 후속타자 이도형이 안타를 치고 나가 무사 만루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백재호, 조원우, 그리고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타석에 돌아온 김태균이 각각 2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어버렸다. 2회 초에 이미 7대 0.
반면 기아 타이거즈의 공격은 내내 무기력했다. 2회 말 반격에서 곧바로 외국인 타자 스캇 시볼이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한 점을 따라붙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한화의 선발투수는 최고구속이 시속 137킬로미터에 불과한 직구를 커브와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여러 가지 변화구들과 섞어 던지며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고, 승리투수의 요건이 갖춰진 6회 무사 1루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와 땀을 닦았다.
결국 경기는 한화의 10대 1 대승으로 끝났고,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홈팀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100발의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바로 그 날 원정팀 한화 이글스의 선발투수 송진우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개인통산 200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해 7월 30일 잠실 두산전에서 통산 199승을 넘어선 이후 꼭 한 달간 5번째 도전 끝에 보탠 귀중한 1승이었고, 그의 나이 만 40세 6개월 13일의 일이었다.
200승, 자신을 이겨내고 얻은 전리품
선발 5인 로테이션 체제가 일반적인 오늘날 보통 한 명의 선발투수가 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지킨다고 할 때 부여받게 되는 등판 기회가 25회 안팎이 된다. 그래서 선발투수에게 승패의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 몇 경기를 제외하면, 대략 5할 이상의 승률이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10승이다.
하지만 투수는 상대 타자하고만 승부하는 것이 아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부상의 위험과도 싸워야 하고, 자신의 체력 한계와도 싸워야 하며, 팀 내 경쟁자들과도 '출전기회'를 놓고 싸워야 한다. 그래서 한 시즌을 치르고 나면 각 팀에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개근하는 선발투수의 숫자가 2, 3명도 남지 않게 된다.
따라서 10승이란, 팀 내 경쟁에서 살아남은 뒤 한 시즌을 부상 없이 버텨낼 수 있는, 철저하고 성실한 몸관리에 성공한 투수가 주어진 기회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을 5회 이상 버텨내며 최소한의 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지켜내야 얻을 수 있는 훈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A급 선발투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시즌 10승이며, 한 시즌 20승을 기록한 투수에 대해서는 '슈퍼에이스'라는 호들갑스런 칭호를 붙여도 아깝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단한 10승을 20년 동안 쉼 없이 이어갈 때 도달할 수 있는 200승이란, 누구라도 쉽게 목표로 삼거나 현실적인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논할 수 없는 경지가 된다. 송진우의 기록은 바로 그 가능과 불가능, 현실과 초현실의 애매한 영역에 분명한 객관적 증거를 가진 목표선을 그은 것이고, 그로써 현존하거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모든 투수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불모지에 태어나 개척자가 되다
송진우는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충북 증평에서 태어나 청주 세광고 2학년 시절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모교의, 그리고 동시에 충북야구의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이끈 선구자였다. 약체 팀의 에이스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대로 그 역시 어린 나이부터 무리한 탓에 동국대 2학년 시절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 바람에 프로 진출도 동기들보다 1년 늦추어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프로무대에 오르자 그는 늦은 세월을 벌충이라도 하겠다는 듯 달렸다. 첫 발을 프로통산 다섯 번째로 기록되는 '신인 데뷔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나타난 그는 특히 선발과 마무리를 '오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병행'했다. 그래서 루키 시즌이던 1989년에 9승과 9세이브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선발투수로 전념하게 된 1995년 이전까지 6년 동안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경기에만 나섰던 '반쪽짜리' 시즌 두 개를 포함하면서도 무려 66승과 82세이브를 쌓아올린 성적은 완벽한 '2인분'의 활약이었다.
그 기간 중 1991년에는 11완투-11세이브를 기록하고 1992년에는 19승과 17세이브(25세이브포인트)로 다승과 구원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그런 초인적인, 하지만 비정상적인 활약 덕분에 신생팀 빙그레는 해마다 한국시리즈의 단골손님이 되는 리그 최강팀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선발투수로 전업한 뒤에도 1995년과 1996년 각각 13승과 15승을 올렸던 그는 입단 9년 만인 97년 9월 20일 인천 현대전에서 선발승을 거두며 역대 10번째로 100승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 1997년과 1998년에는 선수인생에서 처음으로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치솟는 동시에 승수도 6까지 떨어지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미 30대 중반으로 향하던 그에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무리와 과로가 독을 뿜기 시작한 것이었고, 이제 슬슬 선수인생의 종막이 시작되리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전망이었다.
하지만 송진우는 1999년 15승으로 재기한 데 이어, 그 해 겨울 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직을 맡아 선수협파동의 중심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2000년 5월 18일에 역대 11번째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곁들이며 13승을 올렸다.
2002년 4월 23일에는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146승을 넘어서는 147승째를 올려 한국프로야구사상 최다승 기록을 세우는 등, 한국 나이로 마흔에 접어든 2005년까지도 꾸준히 두 자리 승수를 기록해나가는 기적적인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하게 된다. 책임감이 커지고 위기감이 커지면 더 치밀하고 처절한 준비와 훈련으로 이겨나가는 송진우식 승부의 결실이었다.
초라한 시절, 찬란한 업적
투수에 관한 모든 최고, 최다, 최고령 기록들을 부수고 새로 쌓으며 달려온 송진우는 그렇게 2006년 200승을 돌파했고, 2008년 6월 6일에는 2000탈삼진을 넘어섰으며, 2009년 4월 9일에는 3000이닝 투구를 달성했다. 그리고 2009년 9월 23일, 공백 없이 21번의 시즌을 치르며 만 43세 7개월 8일까지 유니폼을 입은 기록을 남겼고, 그 순간까지 이어져온 그의 통산기록은 210승 103세이브 2048삼진, 3003이닝 투구였다. 그는 한·미·일을 통틀어 1982년 일본의 에나쓰 유타카(206승 193세이브)에 이어 두 번째로 200승-100세이브를 기록한 선수로 세계야구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은 아직 한국 프로야구의 침체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 정점을 찍은 뒤 기나긴 내리막을 걸어온 관중규모는 그 해에도 300만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있었고, 2003년에 이승엽과 심정수의 홈런대결이 일으켰던 반짝 특수는 그 해에 오히려 이승엽 선수가 뛰던 일본 프로야구중계방송의 시청율로 새나가는 부작용까지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송진우의 200승이 달성되던 2006년 8월 29일은 팬과 미디어의 외면 속에서 가장 위대한 기록의 탄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프로야구사의 가장 서글픈 순간이기도 했다. 그 날 광주 무등경기장에 발걸음해 대기록의 탄생을 지켜본 팬들의 수는 3360명에 불과했고, 중계권을 가진 SBS는 이승엽 출전경기를 중계방송하면서 송진우의 200승 달성경기를 이따금 작은 화면으로 이원 중계했을 뿐이었다.
2006년 8월 29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광주 경기에서 한화 이글스 타선은 유난히 집중력이 돋보였다. 2회 초,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에 시달리던 기아 선발 전병두가 갑자기 흔들리며 김태균과 이범호에게 거푸 볼넷을 내주자 후속타자 이도형이 안타를 치고 나가 무사 만루를 만들었다. 그로부터 백재호, 조원우, 그리고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타석에 돌아온 김태균이 각각 2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일찌감치 승부를 결정지어버렸다. 2회 초에 이미 7대 0.
반면 기아 타이거즈의 공격은 내내 무기력했다. 2회 말 반격에서 곧바로 외국인 타자 스캇 시볼이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한 점을 따라붙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한화의 선발투수는 최고구속이 시속 137킬로미터에 불과한 직구를 커브와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여러 가지 변화구들과 섞어 던지며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고, 승리투수의 요건이 갖춰진 6회 무사 1루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와 땀을 닦았다.
▲ 송진우그는 21번을 달았던 또하나의 전설 박철순과 함께 한국야구사에 '극기'의 상징으로 이름을 남겼다. ⓒ 한화 이글스
결국 경기는 한화의 10대 1 대승으로 끝났고,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홈팀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100발의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바로 그 날 원정팀 한화 이글스의 선발투수 송진우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개인통산 200승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해 7월 30일 잠실 두산전에서 통산 199승을 넘어선 이후 꼭 한 달간 5번째 도전 끝에 보탠 귀중한 1승이었고, 그의 나이 만 40세 6개월 13일의 일이었다.
200승, 자신을 이겨내고 얻은 전리품
선발 5인 로테이션 체제가 일반적인 오늘날 보통 한 명의 선발투수가 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지킨다고 할 때 부여받게 되는 등판 기회가 25회 안팎이 된다. 그래서 선발투수에게 승패의 책임이 지워지지 않는 몇 경기를 제외하면, 대략 5할 이상의 승률이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10승이다.
하지만 투수는 상대 타자하고만 승부하는 것이 아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부상의 위험과도 싸워야 하고, 자신의 체력 한계와도 싸워야 하며, 팀 내 경쟁자들과도 '출전기회'를 놓고 싸워야 한다. 그래서 한 시즌을 치르고 나면 각 팀에서 시즌 내내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고 개근하는 선발투수의 숫자가 2, 3명도 남지 않게 된다.
따라서 10승이란, 팀 내 경쟁에서 살아남은 뒤 한 시즌을 부상 없이 버텨낼 수 있는, 철저하고 성실한 몸관리에 성공한 투수가 주어진 기회에서 최소한 절반 이상을 5회 이상 버텨내며 최소한의 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지켜내야 얻을 수 있는 훈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A급 선발투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시즌 10승이며, 한 시즌 20승을 기록한 투수에 대해서는 '슈퍼에이스'라는 호들갑스런 칭호를 붙여도 아깝지 않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단한 10승을 20년 동안 쉼 없이 이어갈 때 도달할 수 있는 200승이란, 누구라도 쉽게 목표로 삼거나 현실적인 가능성의 영역 안에서 논할 수 없는 경지가 된다. 송진우의 기록은 바로 그 가능과 불가능, 현실과 초현실의 애매한 영역에 분명한 객관적 증거를 가진 목표선을 그은 것이고, 그로써 현존하거나 앞으로 등장하게 될 모든 투수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불모지에 태어나 개척자가 되다
송진우는 야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충북 증평에서 태어나 청주 세광고 2학년 시절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모교의, 그리고 동시에 충북야구의 첫 전국대회 우승을 이끈 선구자였다. 약체 팀의 에이스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대로 그 역시 어린 나이부터 무리한 탓에 동국대 2학년 시절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 바람에 프로 진출도 동기들보다 1년 늦추어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프로무대에 오르자 그는 늦은 세월을 벌충이라도 하겠다는 듯 달렸다. 첫 발을 프로통산 다섯 번째로 기록되는 '신인 데뷔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나타난 그는 특히 선발과 마무리를 '오간'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병행'했다. 그래서 루키 시즌이던 1989년에 9승과 9세이브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선발투수로 전념하게 된 1995년 이전까지 6년 동안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홈경기에만 나섰던 '반쪽짜리' 시즌 두 개를 포함하면서도 무려 66승과 82세이브를 쌓아올린 성적은 완벽한 '2인분'의 활약이었다.
그 기간 중 1991년에는 11완투-11세이브를 기록하고 1992년에는 19승과 17세이브(25세이브포인트)로 다승과 구원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하는 엽기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그런 초인적인, 하지만 비정상적인 활약 덕분에 신생팀 빙그레는 해마다 한국시리즈의 단골손님이 되는 리그 최강팀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선발투수로 전업한 뒤에도 1995년과 1996년 각각 13승과 15승을 올렸던 그는 입단 9년 만인 97년 9월 20일 인천 현대전에서 선발승을 거두며 역대 10번째로 100승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 1997년과 1998년에는 선수인생에서 처음으로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치솟는 동시에 승수도 6까지 떨어지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미 30대 중반으로 향하던 그에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무리와 과로가 독을 뿜기 시작한 것이었고, 이제 슬슬 선수인생의 종막이 시작되리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전망이었다.
▲ 송진우의 은퇴식송진우는 21년간 210승 153패 103세이브의 기록을 남기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는 투수판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몇 되지 않는 전설 중의 한 명이었다. ⓒ 한화 이글스
하지만 송진우는 1999년 15승으로 재기한 데 이어, 그 해 겨울 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직을 맡아 선수협파동의 중심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2000년 5월 18일에 역대 11번째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곁들이며 13승을 올렸다.
2002년 4월 23일에는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146승을 넘어서는 147승째를 올려 한국프로야구사상 최다승 기록을 세우는 등, 한국 나이로 마흔에 접어든 2005년까지도 꾸준히 두 자리 승수를 기록해나가는 기적적인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하게 된다. 책임감이 커지고 위기감이 커지면 더 치밀하고 처절한 준비와 훈련으로 이겨나가는 송진우식 승부의 결실이었다.
초라한 시절, 찬란한 업적
투수에 관한 모든 최고, 최다, 최고령 기록들을 부수고 새로 쌓으며 달려온 송진우는 그렇게 2006년 200승을 돌파했고, 2008년 6월 6일에는 2000탈삼진을 넘어섰으며, 2009년 4월 9일에는 3000이닝 투구를 달성했다. 그리고 2009년 9월 23일, 공백 없이 21번의 시즌을 치르며 만 43세 7개월 8일까지 유니폼을 입은 기록을 남겼고, 그 순간까지 이어져온 그의 통산기록은 210승 103세이브 2048삼진, 3003이닝 투구였다. 그는 한·미·일을 통틀어 1982년 일본의 에나쓰 유타카(206승 193세이브)에 이어 두 번째로 200승-100세이브를 기록한 선수로 세계야구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은 아직 한국 프로야구의 침체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 정점을 찍은 뒤 기나긴 내리막을 걸어온 관중규모는 그 해에도 300만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있었고, 2003년에 이승엽과 심정수의 홈런대결이 일으켰던 반짝 특수는 그 해에 오히려 이승엽 선수가 뛰던 일본 프로야구중계방송의 시청율로 새나가는 부작용까지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송진우의 200승이 달성되던 2006년 8월 29일은 팬과 미디어의 외면 속에서 가장 위대한 기록의 탄생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프로야구사의 가장 서글픈 순간이기도 했다. 그 날 광주 무등경기장에 발걸음해 대기록의 탄생을 지켜본 팬들의 수는 3360명에 불과했고, 중계권을 가진 SBS는 이승엽 출전경기를 중계방송하면서 송진우의 200승 달성경기를 이따금 작은 화면으로 이원 중계했을 뿐이었다.
▲ 송진우의 기록송진우가 은퇴하던 날, 대전 구장에는 그가 21년간의 선수인생동안 쌓아올린 역사가 기록되었다. 210승, 2048탈삼진, 30031이닝. 모두 한국야구 30년사가 낳은 최고의 업적이며, 앞으로 다시 30년간 후배 투수들이 목표로 삼아 달려야 할 관문이며 이정표다. ⓒ De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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