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길에 제주올레가..."
호클리밸리의 브루스트레일에 제주올레 생겨... 교민들 "감격"
▲ 캐나다 브루스트레일의 제주올레-호클리밸리의 아름다운 풍경. ⓒ 문창균
캐나다에서 제주올레 길을 걸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나는 진짜 제주올레 길을 캐나다에서 걸었다.
9월 10일(토) 아침. 캐나다 토론토에서 북동쪽으로 80km쯤 떨어진 브루스트레일 호클리밸리. 주차장은 인파로 넘쳤다. 족히 300명은 넘어 보였다. 지난 7월 19일 친구들과 이곳에 왔을 때는 적막강산이었다. 트레일을 걷는 3시간 동안 사람이라고는 서너 명 밖에 보이지 않던 곳이었다.
정각 10시.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주차장에서 브루스트레일 호클리밸리 구간으로 옮겨갔다. 숲속으로 50m쯤 오르자 호클리밸리 안내판이 나타났다. 안내판 아래로 하늘색의 낯익은 상징물이 보인다. 제주올레의 표식인 조랑말 모양의 간세다. 간세 아래 부분에는 설명이 붙어 있다.
"호클리밸리의 브루스트레일에 세워진 이 표식은 한국과 캐나다의 우정 및 국제적 협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주올레 2구간과 브루스트레일이 자매 결연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내문은 제주도와 한라산 등을 간결하게 소개하는 글로 맺고 있다.
제주올레 간세 앞에 캐나다 브루스트레일과 한국의 제주올레 관계자들이 함께 섰다.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과 브루스트레일의 실무 책임자 베스 컴링 등이 "감격스럽다" "기쁘다"와 같은 소감을 말한 후 브루스트레일의 제주올레 길을 여는 테이프를 함께 풀었다. 테이프 색깔도 제주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주황색과 하늘색.
'우정의 길' 제주올레-호클리밸리 트레일
'우정의 길'로 명명된 브루스트레일의 제주올레-호클리밸리 트레일은 9.6km 숲길이다. 그 길은 안내판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주최 측은 참가자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이끌었다. 평소에 보기 드문 '인파'가 몰릴 것에 대비해 혼잡을 피할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나온 듯했다.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하이킹 리더가 앞장 서고, 맨 뒤에 자원봉사자가 따랐다.
▲ 캐나다 브루스트레일의 '제주올레 우정의 길' 개막 행사에 모두 모인 듯했다. ⓒ 문창균
토론토에 사는 한인 150여 명, 브루스트레일 관계자 및 자원봉사자 150여 명 등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움직였으나 걷기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나는 요즘 암 투병 중인 원로 선배님과 함께 걸음을 걸었다. 그 선배님은 말했다.
"같은 길이라도 제주올레 이름을 붙이니 감회가 남다르구만."
남다른 감회는 그 선배님만 가지는 게 아닌 듯했다. 토론토의 한 산행모임을 이끌고 있다는 루시라는 이름의 한인 여성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격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요. 토론토 중국 커뮤니티에 산행 모임이 그렇게 많아도 어디 자기네 길이 하나라도 있나요? 브루스트레일에 우리의 길 제주올레가 생겼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어요."
토론토 한인사회에서 매주 트레일 걷기에 나서는 '꾼'들이, 제주올레 우정의 길 개막 행사에 모두 모인 듯했다. 1996년 산행 모임을 만들어 브루스트레일을 십수년째 걷고 있는 김운영씨는 "두 달 전에 이 소식을 브루스트레일 잡지에서 보고 맘 설레며 오늘을 기다렸다"고 했다.
"해마다 봄에 산신제를 지내왔는데, 이제부터는 산신제를 바로 여기 제주올레 우리의 길에서 지내도록 하겠다. 길을 보존하고 보수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
숲길은 푹신푹신했다. 하루 전에 답사차 이 길을 걸었던 서명숙 이사장은 바로 이 흙길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길은 오르막 내리막으로 계속 이어진다. 계곡이 보이면서, 산이 없는 캐나다 동부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진다. 한국의 계곡처럼 맑은 물이 흐른다. 나무 다리를 통해 그 위를 건넌다.
천천히 걸어 1시간 30분 쯤 지나자 반환점이라고 했다. 5km쯤 걸은 것 같다. 공터에 천막이 세워져 있다. 인터넷으로 참가 신청을 하면 점심을 제공하겠다고 하더니,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먹일까 궁금했다. 신청한 사람만 200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캐나다에 제주올레가 생기다니... 자랑스럽다"
캐나다 올레꾼들이 천막 앞에 길게 줄을 선다. 애그샐러드·참치샐러드·햄 등 다양한 샌드위치가 풍성하게 나와 있다. 종이팩에 담긴 사과·복숭아 주스와 물이 있고, 과수원에서 갓 따온 푸른색 햇사과도 나왔다. 역시 자원봉사자들이 각자 나눠 집에서 만들어온 음식이라고 했다. '홈 메이드'여서 그런지 맛깔스러웠다. 자기가 직접 도시락을 싸온 이들도 많아 음식은 더욱 풍성했다.
▲ 한국-캐나다 양국 대표 트레일의 자매결연을 축하하는 간단한 공연. ⓒ 문창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점심을 먹는 와중에, 천막 아래에서 기타와 북 소리가 들려온다. 양국 대표 트레일의 자매결연을 축하하는 간단한 공연이다. 수염을 기른 늙은 기타리스트가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제주올레 스카프를 목에 두른 건장한 중년 남자가 북을 두드린다. 서명숙 이사장이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춘다.
돌아오는 길. 반환점 가까운 곳에 걷기 힘겨워 하는 이들을 위해 출발 지점까지 가는 자동차가 준비되어 있다. 돌아가는 과정 또한 출발할 때와 똑같다. 모든 것이 번잡스럽지 않게, 조용 조용 진행된다. 사다리를 통해 담장을 넘어야 하는 등 어린이나 노약자에게는 다소 어려운 코스였으나, 주최 측은 섬세하게 고려하고 배려했다. 단 한 명의 낙오자나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브루스트레일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걷게 되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키작은 백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내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멤버십을 가지고 있니?"
나는 "없다"고 했다. 브루스트레일에서 걷기 시작한 지 두 달째인 나는 멤버십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 여성은 간단하지만 단호하게 설명했다. ▲브루스트레일은 1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년에 50달러씩 내는 회비가 트레일을 운영하고 보존하는 데 큰 보탬이 된다 ▲회원의 숫자와 관심은 브루스트레일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등등.
나는 브루스트레일을 온타리오 주정부나 캐나다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줄 알았다. 듣고 보니, 순전히 민간 차원에서 운영하는 길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 함께 걷는 옆 사람에게 멤버십 운운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실례가 되는 말일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회원이자 자원봉사 활동가로서 트레일을 운영·보존하는 데 관여하고 있다면 나도 그녀처럼 적극적으로 권유했을 것이다. 다름아닌 내가 주인이니까. "길 좋지요? 아름다운 길 계속 즐기시려면 멤버십 사세요"라면서….
나는 그 여성에게 오늘 집에 가서 가입하겠다고 말했고, 그날 밤 약속을 지켰다. 알고 보니 브루스트레일을 아무 생각없이 걸으며 즐긴 것이 이상하고 미안할 지경이다. 브루스트레일에 제주올레까지 생겨났는데 회원 가입쯤이야.
▲ 호클리밸리의 브루스트레일을 걷는 사람들. ⓒ 문창균
캐나다에 제주올레 길이 열리던 날, 행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날 저녁 서명숙 이사장과 김민정 홍보팀장은 빡빡한 2박3일의 일정을 끝내고 비행기에 올랐다. 앞으로 브루스트레일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주올레를 보고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표식을 보고 설명을 읽으며 제주도와 한국을 다시금 생각할 것이다. 서 이사장은, 이곳에서 만난 어떤 캐나다 사람이 제주올레에 대한 이야기를 듣더니 "한국 하면 공항이 먼저 떠오르는데 아름다운 하이킹 코스도 있군요"라며 반가워 했다고 전했다.
11월 제주 올레에서 브루스트레일 우정의 길 행사 열려
호클리밸리, 특히 캐나다의 가장 큰 도시 토론토에 사는 한인들에게는 추석을 이틀 앞두고 받은 보름달 같은 선물이었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 우리가 가꾸고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길이 생겼으니 여간 특별한 선물이 아니다. 그 많은 한국 사람들이 개장 행사에 참여해 축하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1월 제주도에서 개최되는 월드트레일컨프런스 기간에 제주올레 2코스에서 브루스트레일 우정의 길 개장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그곳에 몇 명의 캐나다 사람이 가서 축하할지, 나는 벌써부터 몹시 궁금하다).
지금 한국을 방문 중인 캐나다 사는 어느 선배는 "나도 가서 올레길 걷고 싶다"는 글을 동창회 사이트에 올렸다. 바로 댓글이 달렸다.
"10월 첫 주에 올레 길 갑시다."
캐나다에 손님만 오면,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시켰다. 그동안 서른 번 이상은 다녀오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지겨운' 폭포 대신 "올레 길 걸으러 갑시다"라고 자랑하게 생겼다. 깊고 푸르고 아름다운 숲길이니 아무리 자주 가도 지겹지 않고, 제주올레 길이니 이제는 정겨울 것이다.
브루스트레일의 열혈 자원봉사자이자 하이킹 리더로 활동 중인 헨리 김씨는 "한국에 트레일이 생겨서 캐나다와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사실에 감개가 무량하다. 캐나다에서 살아온 40년 세월 중에 오늘만큼 뜻깊은 날도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 호클리밸리의 브루스트레일에 설치된 제주올레 표식인 조랑말 모양의 간세. ⓒ 문창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성우제 기자는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며, <시사IN>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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