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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생활 접고 산골로 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귀촌 9년째 박계해씨 <빈집에 깃들다> 펴내 ... 고단함-즐거움이 수채화처럼

등록|2011.09.18 14:15 수정|2011.09.18 15:08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간혹 궁금할 때가 있다. 인터뷰나 취재 대상이 되었던 사람이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박계해(51)씨다. 2002년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때, 18년간 교단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들어간 직후 그녀를 만나 인터뷰했던 적이 있다.

얼마 전 그녀가 책을 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책 <빈집에 깃들다>(도서출판 민들레 간)를 구해 읽었다. 단숨에 읽을 수도 있었지만, 두고두고 읽어 보았다. 9년간의 귀촌일기를 수채화처럼 그려 놓았다.

▲ 교단생활을 접고 농촌에 들어가 사는 박계햬씨가 최근 <빈집에 깃들가>를 펴냈다. ⓒ 도서출판 민들레


"남편이 귀농을 선언했을 때, 나는 열여덟 권째 교무수첩을 절반쯤 쓰고 있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기만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나는 망설임 없이 이삿짐을 쌌다. 떠나기로 한 바에야 떠난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승용차를 타고 음악회에 가는 대신 마늘을 까며 라디오를 듣겠다는 정도의 각오를 했을 뿐 생계에 대한 뚜렷한 준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경남 양산 개운중학교 교사였던 박씨는 남편과 2002년 가을 경북 문경 어느 산골마을로 들어갔다. 고입검증고시를 치른 딸과 초등학교를 갓 졸업했던 아들을 부산에 남겨놓고 말이다. 십대의 아이들을 일찌감치 독립시켰던 것이다.

남자의 귀농이 아닌 여자의 귀촌 이야기다. 산골 할머니 곁에 살다보니 '선생님'보다 졸지에 '새댁이' 돼 버렸다. 새 집을 짓지 않고 빈집을 얻어 살며 그 집에 깃이 들도록 했다. 좌충우돌, 알콩달콩 사면서도 가슴 찡한 산골 이야기가 담겨 있다.

▲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박계해씨가 귀촌일기를 쓴 <빈집에 깃들다>를 펴냈다. 사진은 빨래를 늘거나 밭을 가꾸고 있는 박계해씨의 모습. ⓒ 도서출판 민들레


시골 아주머니로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듯 조용한 나날들이다. 창가에 앉아 고요한 마을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정말 내가 지금 여기에 이 풍경 속에 있긴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문득, 느린 걸음걸이로 그 풍경 속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바로 나'임을 깨닫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기쁨을 느낀다."

박씨 부부가 살았던 집의 주인은 서울에 살았다. 집주인은 소와 꿩, 개를 키우다가 실패하고 서울로 갔던 것. 흉가로 변해버린 집을 얻어 굴뚝에 연기를 피우며 깃이 들도록 한 것이다. 이들 부부가 그 마을에 들어갔을 때는 먼저 귀농했던 가족이 세 집 더 있었다. 박계해씨는 이들과 함께 시골 아주머니로 살아가고 있다.

옆집 아주머니가 도시 아들 집에 가서 며칠 집을 비우면 옆집 소한테 쇠죽을 끓여 주어야 하고, 마을에 초상이 나면 가서 음식을 만들기도 한다. 박씨는 "일은 잘 못하지만 오로지 흉 잡히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부지런히 설쳤더니 듣기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했다"고 자랑해 놓았다.

▲ 박계해씨는 귀촌의 고단함과 즐거움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가 된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를 펴냈다. ⓒ 도서출판 민들레

"고요한 마을에서 고요함에 대한 욕망을 제대로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이 난간함을 자주 겪으리란 예감이다. 대문도 없고 방문을 잠그는 자물쇠도 없는데다 노크하는 문화도 없으니 마음을 열기도 전에 생활의 모든 것을 다 열어놓아야 했다."

텔레비전도 없이 사는 모양이다. 박씨는 "비가 조금 흩뿌리다 그치더니 수상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할머니들도 오늘과 내일 비가 올 거라고 하셨다. 우린 텔레비전이 없으니 일기예보를 못 들었다"면서 "비 오기 전에 얼른 고구마 순을 심어야겠기에 장에 갔다"고 해놓았다.

마을 이름도 그렇고 사람들 이름도 예쁘다. '봄이 아빠' '새벽 아빠' '치실 할머니' '꽃샘떡집' '발발이네 아주머니' '대나무집 아주머니' '샘물 할머니'가 사는 마을은 '모래실'이다. '돌이'와 '돌순이'라는 개들이 짝짓기 하는 '거사'도 볼 수 있는 마을이다. 마을사람들은 솔잎을 따다 효소도 만들고, 천연염색을 하기도 한다.

"소나무들이 즐비한 곳에서 솔잎을 땄다. 한 줌 뜯을 때마다 아무 대응 능력이 없는 이의 머리칼을 잡아 뜯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래서 나무를 옮겨 가면 조금씩 땄다."

산골 풍경이 그려져 있다. 노루가 농삿일에 방해를 놓기도 한다. "새벽에 논에 나갔다 온 승희(남편)씨는 일부 논은 노루가 다녀간 흔적들이 역력하고 노루가 뭉개버린 논둑을 다시 보수해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노루가 몰래 다녀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며 빙긋 웃음이 나온다. 이런 나를 농부라고 부를 수 있을지…"라고.

▲ <빈집에 깃들다> 표지. ⓒ 도서출판 민들레

"요즘 우리 집 천장 위에서는 경사가 났다. 아마도 쥐가 새끼를 낳은 듯하다. 봄에는 다람쥐만 살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쥐들이 입주를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다세대 주택을 분양한 것 같다. 밤마다 천장에서 운동회라도 벌이는지 내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래서 끈끈이를 사다가 놓아도 보고 쥐약도 놓고 했는데, 어찌나 영리한지 살짝살짝 피해 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산에서 눈가루가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 길로 뒷산으로 산책을 갔다. 역시 작은 발자국들이 곳곳에 있어서 짐승들이 다녀간 흔적을 말해주었다. 어딘가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숲속의 주인들에게 합장을 했다. '너희들처럼, 걸친 것 없이, 쌓아둔 것 없이도 언제나 자유롭기를….'"

산골마을 투표날 풍경에다 1000평 밭에 작물을 심은 뒤 '인디언 농법'으로 가꾼 일, 노인대학 졸업식을 한 뒤 매달 '졸업기념일'인 29일마다 모임을 갖기로 한 약속, 극단에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분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연극 지도, 산골에 와서 처음 시작한 천연염색으로 읍내에 가게를 열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처음 빈집에 깃든 지 구 년이 흘렀다. 사십대였던 우리는 오십대가 되었고 십대였던 아이들은 이십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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