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석 "연기 20년? 여전히 반짝반짝"
[인터뷰] 연극 <우어파우스트>에서 공연 중인 정보석의 연기관에 대하여
▲ 명동예술극장내 분장실겸 배우 대기실에서 오마이스타를 맞은 배우 정보석. 검은수트와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가 환하게 웃고 있다. ⓒ 민원기
시트콤에서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준 '보사마' '주얼리 정'과 연극 <우어파우스트>의 고뇌에 찬 파우스트 박사 사이의 간극. 사실 장르를 넘어 이 만큼 연기의 너른 지평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설혹 '하이킥'의 '야동 순재'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김만석'씨를 연기하는 동시에 작년 연극 <돈키호테> 무대에 섰던 '노장' 이순재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지평을 무궁무진하게 확대해 나가고 있는 배우 정보석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다. 1986년에 데뷔한 이래, 영화와 TV드라마, 연극을 넘나들었으며, 또 주연으로 출발, 조연을 거쳐, 다시금 정보석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반짝반짝 각인시키고 있는 값진 배우 말이다.
한창 상연 중인 연극 <우어파우스트>도 다르지 않다. "언제라도 연극 공연은 환영"이라는 정보석은 젊은 독일 연출가 다비트 뵈슈가 한국 배우, 스탭들과 작업한 이 괴테의 전통 연극에서 또 한 번 배움의 자세로 연기에 임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연기를 배워 나가고 있다"는 정보석을 9월의 어느 날 <우어파우스트> 공연 연습에 한창이던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 정보석은 연극<우어파우스트>에서 악마와의 거래로 부와 명예를 다 이룬 학자 파우스트를 맡았다. 그가 명동예술극장 내 <우어파우스트>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민원기
"사실 쉽지 않았어요. 다른 연극과 달리 파우스트의 감정선이 삭둑삭둑 잘려나갔거든요. 파우스트의 감정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아요. 연출가의 상상력이 뛰어나서인지 일반적인 <파우스트>와는 분명 달랐거든요.
결국 제가 그 비워있는 부분을 어떻게 메워가는 가가 중요했죠. 메피스토가 악한 면을, 파우스트가 선한 면을 지녔다고 봤을 때, 이 작품의 파우스트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죄의식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파우스트'는 초인이 아닌 소시민의 허무와 고뇌를 그리는 구나..."
사실 <우어파우스트>는 일반적인 고전극을 상상하면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서른 셋의 나이로 독일에서 인정받은 연출가 뵈쉬는 열린 무대 사용부터 메피스토를 전면에 내세우는 파격적 해석, 그리고 현대적 음악의 사용 등 현대극의 특성을 마음껏 활용했다. 오히려 메피스토보다 신이 줄고 감정선을 파악하기 힘든 파우스트 역할이 손해를 볼 정도랄까. 이에 대해 정보석은 배우로서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듯했지만, 그 만큼 배움의 시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속상하기도 하고, 굉장히 괴로운 거예요. 그러다 집에 들어가서 혼자 고민하다 웃어버렸어요. '나이가 이만큼이 됐는 데도 (욕심을)버리지 못하고 엉뚱한 걸 고민하는 구나 하고. 작품도 좋고 연출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데 말이죠.
사실 지금은 개인의 욕망이 판 치는 세상이잖아요. 연출가는 현재를 그렇게 악마의 세상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저를 돌이켜 봤죠. 나한테도 그런 허무가, 공허가 있나. 이런 느낌은 충분히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 겠구나 싶었죠. 또 다른 동기가 생긴 거예요."
그러면서 정보석은 배우로서의 공허감도 토로했다. 그는 "20년 넘게 연기를 했으면서도 '연기가 이거다'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어요. 언젠가는 알았던 것 같은데 연기를 할수록 더 어려워요. 그게 바로 배우로서의 공허감인 것 같아요"라고 털어 놓는다. 중견 배우에게 드는 이런 진솔한 고백이 오히려 신선할 정도다. 그렇게 정보석이란 배우에겐 여전히 소년같은 구석도 엿보인다.
▲ 연극 <우어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를 연기하는 정보석이 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 민원기
'미중년' 정보석은 언제나 새롭고 싶다
'미중년', 정보석을 비롯해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중견 남자배우를 일컫는 수식이다. 그렇게 '보사마'로도 불린 그이지만, 오히려 정보석은 20여 년 전 연기를 시작했을 때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기에 진정한 '미중년'일 수 있을지 모른다. 토크쇼 <청담동 새벽 한 시>을 시작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심야심당을 배경으로 선후배들을 초대해 놓고 사는 얘기를 탁 터 놓고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다 싶었단다. 하지만 어디 방송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제의가 와서 시작했는데, 작가들은 참 뭔가 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구성을 타이트하게 하는 것 보다는 둘이 앉아서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거든요. 자기 개인 사건도 좋고, 또 꼭 사회적으로 빠지지 않아도 교육감이니 서울시장 얘기도 할 수 있고요.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솔직히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얘기들을 나누고 싶어요."
지금의 정보석을 만들어 준 건 분명 2년 여 전 방송된 MBC 일일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이다. 바로 직전 정보석은 대하사극에 출연하며 자신의 입지가 줄어져만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시트콤을 통해 지평을 넓힐 수 있었고, 그러므로 연기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배우에게 있어 새로움은 필수 덕목이니까.
▲ 배우 정보석 ⓒ 민원기
그 선택받는 자의 위치를 신중하게 여겨서일까? 전성기 때 한 우물만 파야지 생각하게 만들었던 영화와의 인연이 제대로 닿지 않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젊은 날의 초상>을 비롯해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정보석은 물 밑 듯이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고르던 존재였다. 하지만 시장 환경이 변한 지금, "안 만들었으면 좋을 것 같은" 작품에 출연하기보다 독립영화라도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줄 수 있는 감독과 작업하고 싶단다. 조만간 스크린을 통해 정보석의 색다른 연기를 볼 날이 멀지 않은 듯 보였다.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의 의미 있는 작품들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저에 대한 색다른 이미지를 나타낸다면 배우의 지평을 확장시켜 주는 거 잖아요. 그에 대한 로망은 당연히 존재하죠. 이제는 시장이 좀 커져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조짐들이 보이고 있는데, 그렇게 아시아권으로 시장이 확대되고 또 더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 진다면 제가 출연할 작품도 곧 만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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