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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포경인은 한국인"

[르포- 고래 이야기①] 대곡리 반구대에서 울산만 장생포까지

등록|2011.10.03 13:46 수정|2011.10.03 13:56
난데없이 고래 이야기라니? 고래는 환경 보호의 상징적 동물이다. 또한 고래잡이, 즉 포경의 역사는 제국주의의 역사와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래는 우리 민족과 매우 친숙한 동물이었다. 정치적으로 격변이 많았던 여름이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하지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마침 한반도 동남쪽에 있는 고래 유적지를 탐방할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그 기록을 계간지 <문학바다>에 실었다. 가까운 <오마이뉴스> 독자들과도 나누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원고를 조금 손질해 보았다. 총 5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기자말

반구대 암각화 암벽한국 석기인들은 대곡천 너머 절벽 암반에 각종 암각화를 새겨 놓았다. ⓒ 김갑수


한반도의 동남해안에는 인간과 고래가 공연(共演)한 최초의 유적과 최종의 문화가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와 울산시 남구 장생포동의 '고래문화특구'가 그것이다. 반구대에는 선사 인간이 단애(斷崖)에 수놓은 고래 암각이 뚜렷하고, 장생포에서는 근·현대인이 해륙에서 무수히 처치한 고래 도큐멘트들이 공연(公演)되고 있다.

반구대와 장생포는 의외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암각화 골짜기에서 떠나 사행천인 대곡천을 타고 돌아 내려가다가 사연호수를 만나 통과하면 곧 태화강 본류와 합류한다. 태화강을 따라 바다 쪽으로 나가면 강폭이 날개처럼 펴지면서 울산만에 이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내륙을 휘감아 돌면 이내 장생포가 나타난다. 기껏해야 질러가는 물길로는 20km 정도, 돌아가는 찻길로도 40km 남짓이다. 옛날 거리로 쳐도 오십 리, 백 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짧은 공간적 간격에, 역사 이전의 고래 유적과 근·현대의 고래 문화가 6000년의 장구한 시간적 간격을 아우르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반구대의 신령스러운 분위기와 선사인의 암각화

작년에 개통된 KTX 울산역은 울산시가 아닌 언양읍에 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바 없지만 그것은 다소 씁쓸한 일이다. 작은 향토 언양이 가져야 할 역 이름을 광역도시 울산이 차지해 버린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울산역은 '태화강역'이라는 옛날식 이름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반구대는 새로 생긴 울산역 부근에 있다. 자동차로 35번 국도를 타고 경주 방면으로 10분 정도 가면 반구대 입구가 나타난다. 여기서 암각화가 있는 반구대 대곡천 계곡까지는 불과 십리 길이다. 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도보를 선택한다면, 무언지 모르게 특이한 느낌을 주는 남녘의 산야를 호젓이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2008년 개관한 암각화박물관은 고래의 형상을 본떠 지은 목조건축물로서 국내 유일의 암각화 전문 박물관이다.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등의 복제 모형물을 비롯하여 신석기와 청동기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에 먼저 들른다면 지척에 있는 실물 암각화를 보고 싶어 약간 조급해질 수 있다. 그래서 박물관의 것들을 주마간산 식으로 홀대하고 나오게 된다. 자세한 관람은 실물을 보고 나오는 길에 다시 해도 되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떠나 암각화 계곡으로 다가서는 산길의 풍광은 그윽한 경탄을 자아낸다. 청량한 대기, 유현한 수림, 육중한 동산, 외연한 기암, 수목 사이로 어른거리는 시냇물 모자이크, 천변에서 무성하게 자란 잡초 더미.... 이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색적인 천연을 조성한다. 빼곡한 대숲 옆에 고즈넉이 머무르는 연못, 산마루에 누란지위(累卵之危)로 얹혀 있는 정자, 까마득히 높은 나무에 지어진 까치집, 이쯤에서 하늘에 덧없이 부유하는 구름을 치어다보면 초동급부 아무개라도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고래 이야기와 겉도는 화제 같지만 암각화의 고래를 말하기에 앞서 반구대(盤龜臺)의 풍광을 짚을 수밖에 없다. 거북이가 넙죽 엎드린 모습을 띠는 반구대는 연고산 줄기가 내려오다가 문득 퍼질러 앉아버린 듯한 형세의 구릉이다.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옥계와 그 주변으로 드리워지는 연무는 자못 신령스러운 분위기까지 만들어 낸다.

옛날 한국과 중국에서는 정원(庭園, garden)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정원은 일본이나 서양에서 사용하던 용어다. 정원이란 자연을 인공적으로 꾸민 뜰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동양인이라면 자연을 꾸미는 일에 거부감을 갖는다. 그래서 정원이 아닌 원림(園林)이라는 말을 썼다. 필자 소견으로 반구대는 분명히 원림이다. 원림은 숲과 동산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정자나 집칸을 배치한 것이다.

대곡천이 대곡천은 울산만 장생포까지 이어진다. ⓒ 김갑수


반구대에도 정자와 서원이 있다. 고인(古人)들은 동산이나 계곡, 하물며 숲길이라도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자연을 생긴 그대로 놓고 완상(즐겨 구경함)할 줄 알았던 것이다. 중국 쑤저우(蘇州)에는 세계적인 원림들이 즐비하다. 이른바 '강남원림'이라 불리는 이 화려한 원림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반구대가 지니는 천연적 격조는 강남원림들을 능가한다.

저기 반구대가 보이네. / 여기 살던 힘센 사람들이 / 한곳에 모여 / 천지신명을 만나던 곳 / 이 땅의 혼령을 모시어서 / 숲을 일구고 / 바다를 일구어 / 사슴과 양과 호랑이와 / 소와 멧돼지와 족제비와 새를 거느리고 / 고래와 거북이와 물고기를 부르던 곳. / 저기 반구대가 보이네. / 장수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 상서로운 짐승 거북을 닮은 / 저 산등성이 아래 벼랑에 / 돌로 돌을 깎아 / 암각화를 새겼으니 / 6천 년 전 저기 저 벼랑에 / 꿈을 새기고 / 바다로 나아간 사람들 있었네. / 저기 반구대가 보이네, / 그때 그 모습대로 / 엎드린 거북 한 마리 보이네, / 선연히 보이네. - 이건청 시 <반구대를 바라보며>

인류 최초의 포경인, 반구대의 한국인

최초로 바다에 나가 고래를 잡은 인간은 네덜란드 바스크 인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딕>은 물론 시공디스커버리총서 <고래의 삶과 죽음>에서도 바스크 인을 인류 최초의 본격 포경인으로 지목한다.

중세 초기, 바스크 인은 대양에서는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시도했다. 그들이 고래 사냥에 이용한 작살은 부표에 매달아 놓은 자유 작살이었다. 그들은 '사냥개떼'와 같은 소형정을 타고 나와, 고래 한 마리를 향해서 가능한 한 많은 작살을 던졌다. 혁신적인 고래사냥 기술이 막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2004년 4월 영국의 BBC 방송은, 인류 최초의 포경인은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방송은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벌써 기원전 6000년부터 고래 사냥을 시작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면서, 이 암각화에는 참고래, 혹등고래, 향유고래 등 큰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선사 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과 부구와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가 제시되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반구대 암각화에 작살은 물론 부구가 있다는 것은 한국 선사인의 고래 사냥이 서양 중세의 혁신적 기술이었다고 하는 바스크 인의 것과 대등한 수준이었음을 밝히는 방증이다. 더욱이 암각화 가운데 향유고래 그림이 있다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유럽인은 18세기 초까지 향유고래를 사냥하지 못했다. 이 고래는 바다 복판에서 육식을 하며 사는 이빨고래로서 성질이 포악하기 때문이다.

허먼 멜빌의 흰 고래 모비 딕(Mobby Dick)도 바로 이 향유고래다. 향유고래는 수백 마리가 무리 지어 다니기도 한다. 무려 20km에 걸쳐 줄지어 헤엄치는 고래 떼가, 먼저 잠수하는 한 마리를 따라 일시에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유럽 포경선원들의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선사인이 새긴 암각화에 향유고래 사냥 사실이 시사되어 있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의 대안에 수백 미터에 걸쳐진 수십 미터 높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현장에 가더라도 대곡천이 가로막아 암각화에 근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차안(此岸)에 망원경을 설치해 놓았다. 필자는 반구대에 여러 번 가 보았는데 그 중 한 번은 운이 좋게도 대학 조사팀을 만나 강물을 건너 가 직접 암각화를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암각화 전문가인 울산대 전호태 교수는 "울산 지역의 중심부가 전반적으로 평지 사이로 얕은 구릉이 발달한 지형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고려하면, 수 킬로미터에 걸쳐 깊은 골짜기가 발달한 이 일대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독특한 면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이 암각화 제작 장소로 선정된 것은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특이한 지형 조건 및 분위기와 관련이 깊은 듯하다"고 말한다.

반구대 암각화에 표현된 물상은 총 296점이다. 그 중 48점이 고래 그림인데 선과 면만을 사용하고서도 고래의 분류학적 형질을 정확히 포착하여 반영했다는 점이 놀랍다. 이를 테면 복부에 강조된 폭 넓은 주름은 혹등고래, 등과 배가 흑백으로 구별되면서 약간 전방에 그려진 등지느러미는 범고래, 가장 앞에 위치한 등지느러미는 들쇠고래, 낫처럼 휘어진 등지느러미는 낫돌고래, 사각 머리와 길고 가는 턱은 향유고래의 특징을 각각 포착, 반영한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진 시대의 인류는 수렵시대였고, 이런 수렵 생활이 반영된 암각화는 세계 도처에서 그려졌지만, 고래의 종류를 확연히 식별할 수 있도록 표현된 것은 반구대 암각화가 유일하다. 또한 고래의 꼬리지느러미가 수평으로 그려져 있는 점은 보통 물고기와 다른 고래만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하여 한국의 고래 과학이 서양에 비해 수천 년이나 일찍 발달했다는 주장은 근사한 합리성을 갖는다.

암각화에는 한국의 선사인이 대형고래에 외경심을 품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개중에는 새끼를 업고 있는 고래를 그린 것도 있다. 이 밖에 14점의 인물상 중에는 고래를 부르는 인간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배를 타고 바다에 가서 직접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도 있다. 고래의 기름은 선사인의 중요한 에너지로서 조명과 난방을 해결해 주었고, 고래 뼈는 무기와 도구의 재질이었으며, 고래 고기는 요긴한 식량이 되어 주었다. 요컨대 한국 선사인의 삶은 고래와 밀접히 근연(近緣)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계간지 <문학바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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