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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된다', '보여진다'...기자들에게 내미는 고발장

[서평] 김지영이 쓴 <피동형 기자들>

등록|2011.09.27 15:29 수정|2011.09.27 17:47
"또 내년에는 국세 세입예산이 사상 처음으로 200조원을 돌파, 205조9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27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1년 국세수입 전망 및 2012년 국세 세입예산'에 따르면, 올해 국세 수입은 당초 예산안 187조6000억원보다 5조2000억원 증가한 192조8000억원으로 전망됐다."

27일자 <조세일보>에 실린 '올해 국세 5.2조원 더 걷힐 듯...192.8조 예상' 기사는 곳곳에서 피동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사뿐만 아니다. 신문 기사에서 판단된다, 보여진다, 분석된다 등의 피동형 표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수많은 글쓰기 교본이 우리말 문장은 능동문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가르치지만, 언론은 능동문으로 쓸 수 있는 문장도 피동문으로 쓰고 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풀이되어진다, 추정되어진다, 관측되어진다 등의 이중피동을 쓰기도 한다. <피동형 기자들>은 이처럼 피동형을 남발하는 '피동형 기자들'에게 내미는 엄중한 고발장이다.    

주어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

▲ <피동형 기자들> 겉그림. ⓒ 효형출판

우리 언론이 피동형 표현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피동형 기자들>이 돋보이는 것은 이 문제를 피동형을 사용하는 기자들의 심리와 연결하고 나아가 저널리즘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위의 기사를 보자. 본디 예상과 전망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상됐다'와 '전망됐다'는 피동형을 사용하니 누가 예상하고, 전망하고 있는 것인지 불확실해졌다. 이처럼 '피동형 문장에서는 행동 주체가 잠복한다' 그래서 피동형 문장은 무책임한 문체다. 예상과 전망의 주체는 기자가 아닌 정체불명의 제3자가 되고, 자연스레 책임도 제3자가 진다. 영문법에서도 수동태(우리의 '피동형')를 쓸 때는 다음과 같은 사유가 있다고 한다.

① 행위의 주체를 밝히고 싶지 않거나 불분명할 때
② 행위의 책임을 언급하고 싶지 않을 때
③ 행위의 주체보다는 객체를 강조하고 싶을 때
④ 행위가 완료됐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 언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피동형은 대개 ①과 ②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문득 한나라당 서울시장 유력후보이며, 자위대 발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나경원 최고위원이 떠오른다. 이명박 대통령(당시 대통령 후보)이 광운대 특강에서 "BBK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말한 동영상이 등장했을 때, 나경원 최고위원(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은 주어가 없으므로 이명박 대통령이 BBK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주어경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어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교훈은 양상은 좀 다르지만, 피동형 문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자들은 피동형의 '주어 없음'에 기대 마음껏 예상하고, 전망하고, 판단한다. 피동형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섣부른 예단과 근거 없는 추측을 기정사실화한다.

주어를 숨기고 정체불명의 제3자를 끌어오니 얼핏 보면 객관보도 같지만, 사실은 기자의 의견과 주관으로 가득한 기사다. 피동형 문장은 사실과 의견의 구분이라는 저널리즘의 기본적인 원칙을 뒤흔들고 있다. 그래서 피동형 문장을 바로 잡는 일은 단순히 우리 말글을 바로잡는 일이 아니다. 우리 저널리즘을 바로잡는 일이다.    

5공의 유산, 피동형 문장

저자는 무책임한 피동형 문장의 남발을 80년대 초 군부독재와 연결해 설명한다. 5공화국은 정권 유지를 위해 언론통제에 힘썼다.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대량 해고했고,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언론사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언론규제법을 제정했다. 보도지침을 통해 어떤 사안을 보도해야 할지, 어느 정도의 비중과 어떤 논조로 보도해야 할지를 지시했고, 언론사들은 보도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1988년 국회 언론청문회 당시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의 진술에 따르면, 제5공화국 기간 중 홍보조정실의 보도 지침은 평균 70퍼센트가량 반영됐다. 또 유재천 당시 서강대 신문학과 교수의 분석으로는 친여 성향 신문은 '보도 불가' 지침 중 96퍼센트를, '보도 요망' 지침은 100퍼센트 지면 제작에 반영했다. - <피동형 기자들> 25p.

이런 상황에서 기자들은 소신대로 기사를 쓸 수 없었다. 군부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기사를 써야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피동형 문장 뒤에 숨었다. "내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더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잠깐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나온 신문 사설을 보자.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역사적 출범
어떤 의미에서든 전두환 대통령의 영도 아래 전개될 새 시대, 새 역사는 우리의 5천년 민족사에 금자탑적 분수령으로 가름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고 보아진다.
<경향신문> 8월 27일 2면 사설 중

새 시대의 출범
새 시대를 이끌 정치 엘리트 집단은 5․17 조치 이후 급격히 부상한 군부 엘리트를 포함하여 국가발전에 공헌해온 지역사회 일꾼, 관료 엘리트 그리고 아직 그 능력이 시험되지는 않았으나 참신하고 양심적인 자세를 갖춘 신진인사들이 주력을 이룰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서울신문> 8월 27일 2면 사설 중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개막
이러한 목표는 전 대통령뿐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모든 국민이 합심하여 이룩하도록 노력해야 될 일이겠으나 이와 아울러 당장 국가안보태세를 공고히 하고 우방과의 우호협력관계를 두터이 하여 북괴의 침략야욕을 사전에 억제하고 안으로는 조속히 국내질서를 확립하여 모든 것을 정상화하는 노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동아일보> 8월 28일 2면 사설 중

새 시대의 개막
전 대통령의 정치적 비전은 이미 국보위가 단행한 사회개혁을 통하여 널리 인식되고 있다.
<조선일보> 8월 28일 2면 사설 중

4개 신문 모두 전두환과 5공화국을 정당화하는 대목에서 본다, 추측한다, 기대한다, 인식한다고 적어야 할 문장을 피동형으로 처리했다. 여기서 5공화국과 피동형 문장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마 내놓고 군부독재 정권을 찬양할 수 없어 피동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피동형 문장은 기자로서 양심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5공화국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지금, 기자들이 더 많은 피동형을 남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 언론의 피동형 사용 빈도는 피동형(수동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일본의 일간지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사실의 무미건조한 나열이어야 할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도 피동형 문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바야흐로 '피동형 기자들'의 시대다.

피동형 남용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저자가 <경향> <동아> <조선> <중앙> <한겨레>를 대상으로 피동형 남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1개 면당 평균 피동형 수가 가장 많은 곳이 <한겨레>였다. 그다음은 <경향> <조선> <중앙> <동아> 순이었다. 2009년 3월 23일 자 신문만을 비교했기에 한국 일간지의 피동형 남용 실태를 제대로 조사했다고 말하기는 부족하지만, 실증조사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능동과 피동, 세계관의 차이

좋은 책은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 이전에는 범상하게 스쳐 지나가던 것이 새로운 의미와 느낌으로 다가온다. <피동형 기자들>은 내 시야를 넓혔다. 신문 기사를 읽다가도 '전망된다', '판단된다'를 발견하면 눈에 거슬리고, 이 글을 쓰면서도 불필요하거나 문법적으로 틀린 피동형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거듭 확인했다. 저널리즘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다는 점에서 언론인 지망생이 아니라도 저널리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피동형 기자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한 가지 흠을 잡자면 결론에서 피동형의 문제를 우리말 바로쓰기의 차원으로 축소하는 것 같아 아쉽다. 우리말 바로쓰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대중의 언어생활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에 언론의 잘못된 언어 사용은 심각한 문제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피동형의 문제는 동시에 저널리즘의 문제고, 저널리즘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문제다. 피동형 문장은 주관과 의견으로 채색된 창을 객관과 사실의 투명한 창으로 포장해 현실 세계를 호도한다. 능동과 피동의 차이는 대중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주체가 먼저 나오느냐 아니면 객체가 먼저 나오느냐에 따라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자동사를 쓰느냐 타동사를 쓰느냐에 따라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 파울러 Roger Fowler

그래서 능동과 피동의 문제는 바른말 고운 말 쓰기의 차원을 넘어선다. 언론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전달하는지, 우리 저널리즘이 올바로 서 있는지를 진단하는 하나의 척도다. 그렇다면 피동형 문장과 '피동형 기자들'로 가득한 우리 저널리즘이 서 있는 위치는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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