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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도 배가 고프다”

시인 박언지 세 번째 시집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 펴내

등록|2011.09.27 15:35 수정|2011.09.27 15:35

시인 박언지박언지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도서출판 일광)를 펴냈다 ⓒ 박언지


"안녕하세요. 제가 일을 하면서 틈틈이 모은 글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부족함이 많습니다. 인사를 제 책으로 합니다. 행복하세요." -시인 박언지

글쓴이 고향인 창원과 가까운 김해와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 박언지가 세 번째 시집을 보내면서 시집 첫 장에 적은 글이다. 시인 박언지와 처음 맺은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5~6년 앞쯤 인터넷 공간인 네이버 블로그에서다. 시인인 그가 내 블로그를 먼저 찾아와 인사를 꾸뻑 올리니, 같은 길을 외롭게 걷고 있는 나로서는 살가운 벗처럼 반갑게 맞이할 수밖에.  

나는 그때부터 그가 틈틈이 블로그에 올리는 새로운 시들과 그가 예전에 썼던 여러 시들을 읽을 때마다 박 시인은 참으로 이 세상을 올곧게 보려 애쓰고, 올곧게 살아가는 시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때문에 그를 언젠가 온라인 세상에서 벗어나 오프라인 세상에서 직접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동래 범어사 아래쪽이나 해운대 같은 바닷가에 앉아 동래파전에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어 마시며 서로 속내를 터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박 시인도 그러하길 바랐으나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내가 그만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 까닭에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아쉽다. 그래도 이렇게 시집이라도 받아 읽을 수 있으니 작은 행복 아니겠는가.   

박언지 시인이 이번에 쓴 시편들을 꼼꼼하게 읽고 있으면 이 세상과 세상살이는 저마다 홀로 우쭐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더불어 삶'이라는 것을 깨치게 한다. "비로자나불 앞에 / 절을 하고 있는 / 여인의 기도를 / 창호지에 비치는 / 햇살"(숲속의 낮은 울림)이 가만가만 듣고 있는 것처럼.  

바다 닮은 이 세상살이 물안경에 비춘 시편들

"산새를 쫓아 숲길을 걷다보면 오월의 밝은 햇살을 받아 싱싱한 물오름의 신비스러운 자연의 빛깔 때문에 풀리지 않는 공허함과 갈증 같은 감정이 어느새 내가 길 잃은 새가 아닐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책머리에' 몇 토막

지난 2010년 7월 허리춤께 두 번째 시집 <갯벌에도 집이 있다>(2010. 11. 30. 오마이뉴스)를 펴낸 박언지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도서출판 일광)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두 번째 시집에 이어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결코 바다를 멀리 할 수 없는 시인이 바다를 쏘옥 빼다 닮은 이 세상살이를 물안경에 비춘 시편들이다.  

모두 4부에 실린 80편에는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소라, 전복, 조개, 여러 물고기, 바다풀, 섬 등이 때로는 하현달, 노을, 물음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물안개, 두레밥상, 길이 되기도 한다. 여름 광안대교, 을숙도에 가면, 진달래, 만리포, 빨래, 생채기, 새벽 바다, 뜨개질을 하며, 광안리 해변에서, 낙동강, 노점상 국수 한 그릇 등이 그것 

시인 박언지는 26일(월) 저녁 전화통화에서 시 쓰기에 대해 "초록잎 사이로 보이는 적갈색의 잔가지에 눈이 가는 미련처럼 시를 쓰는 마음이랄까"라며 "아니면 먼 길 떠나는 나그네의 아슴푸레한 뒷모습을 사색하고 또 시원한 바닷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수평선의 일렁거림의 눈동자를 보기 위해 바닷가에 서 있는 마음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닐까"라고 귀띔했다.

수평선은 꽉 참과 비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화두

벅언지 세 번째 시집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 이번 시집은 두 번째 시집에 이어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결코 바다를 멀리 할 수 없는 시인이 바다를 쏘옥 빼다 닮은 이 세상살이를 물안경에 비춘 시편들이다. ⓒ 일광

허기진 섬 하나
겉과 속이 뒤바뀐 허상처럼
손가락으로 바다를 비우고 있었다.

나무도 속이 비어 있었고
매미 소리는 더욱 더
큰소리로 속을 비우고

사물이 보이지 않는
유폐된 시간
수평선을 그으며
옹이 된 섬은
짙은 어둠 속을 비우고 있었다.

뇌세포처럼 엉켜 있는
수초들이 어지럼증을 참으며
졸음이 오는 오후
타는 노을 되새김질하듯
바다는 물살을 또 비우고 있었다.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 모두   

이 시에서 말하는 "허기진 섬 하나"는 시인 자신이다. "겉과 속이 뒤바뀐 허상처럼 / 손가락으로 바다를 비우고 있"는 것은 썰물 때를 맞은 섬이기도 하지만 이 고된 세상살이를 비우고자 애쓰고 있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섬이 바다를 비우는 것처럼 뭍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나무도 속이 비어 있었고 / 매미 소리는 더욱 더 / 큰소리로 속을 비우고" 있다. 

내 몸과 마음 깊숙이 꽉 차 있는 그 무엇을 비운다는 것. 그것은 곧 "사물이 보이지 않는 /
유폐된 시간"에 "수평선"을 긋는 일이다. 그 유폐된 시간에 그은 수평선을 타고 앉아 "옹이 된 섬은" 또 한 번 "짙은 어둠 속을 비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평선"은 그저 우리가 바라보는 수평선이 아니다. 꽉 참과 비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화두다. 

"짙은 어둠"은 모든 것을 비운 그 자리이다. "짙은 어둠 속을 비우"고 나야 그 자리에 새로운 새벽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수초들이 어지럼증을 참"는 것도, 바다가 "타는 노을 되새김질하듯"이 "물살을 또 비우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꽉 찬 세상을 맴도는 절망에 빠져 있을 게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꼬옥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 

"바다는 언어 대신" 파도로 말한다

어둠을 깨우는
파도
집어등처럼 반짝거리는
아파트의 불빛은
풀잎마다 맺혀 있는
갈무리해야 할 시간
숲속에서 들려오는
나무들의 기도로
바다는
새벽을 열고 있다-'새벽바다' 모두

박언지 시인은 바다를 이 세상에 빗댄다. 바다를 비우고 있는 섬은 이 세상살이를 비우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바다와 이 세상,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온갖 생물들을 이 세상살이라 여긴다. "아파트의 불빛"이 밤바다를 떠다니는 "집어등처럼 반짝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다든 뭍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숲속에서 들려오는 / 나무들의 기도"를 들으며 "새벽을 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허긴, 어찌 사람이 우주 삼라만상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눈이나 비가 내리면 어쩔 수 없이 눈과 비를 맞아야 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끊을 수 없는 끈처럼 이어져 있지 않다면 먹거리는 또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섬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 바다를 이 세상살이에 빗댄 시들은 이 시집 곳곳에 엎드려 있다. 그 시들은 세상과 세상살이를 비워 새로운 세상과 세상살이를 담으려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있다. "꼬막 손가락 깍깍깍"(아가)라거나 "바다는 / 언어 대신 / 파도를 만들었다"(어느 날), "파도는 / 햇빛 찬란한 / 바람을 잃었노라"(주홍글씨), "던져주는 새우깡 향기는 / 바다의 통곡소리가 되고"(석모도 가는 길) 등이 그러하다.

시는 세상을 비우고, 시인은 세상살이마저 비우고

"잃어버렸다. / 텃밭에서 방금 채취해 온 푸성귀가 / 어머니 손가락 사이로 / 조물조물 배어나온 손맛 / 그랬다. / 주린 배를 채웠던 시절 / 꽁보리밥 맑은 장국에도 / 밥 한 그릇 뚝딱... 오늘은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 배가 고프다. / 먹어도 먹어도 /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다 / 식탁에 잘 차려진 음식만큼 / 가족들은 줄어들고 흩어졌다."-'두레 밥상' 몇 토막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문인호는 작품해설에서 '오늘은'이란 시를 들추며 "대화체의 짧은 시 속에는 적어도 단편소설 한 작품 속에서나 느낄만한 내용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라며 "시인은 담고자 하는 이야기를 아주 쉬운 테크닉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이 짧은 시 한 작품을 통하여 보들레르의 시 한 행이 스탕달의 소설 한편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맞먹는다는 말을 상기해 볼만 하다"고 썼다.

시인 박언지 세 번째 시집 <섬은 바다마저 비우고>는 '시는 세상을 비우고, 시인은 세상살이마저 비우고'란 뜻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에서 비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담으려 애쓴다. 하긴, 창고에 곡식과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알차고 더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더 채울 수 있겠는가. 

시인 박언지는 경남 김해(지금 부산 강서구)에서 태어나 2002년 봄 계간 <문예시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푸성귀에 대한 명상> <갯벌에도 집이 있다>가 있으며, 수필집 <강변의 추억>을 펴냈다. 부산문인협회, 농민문학회 회원, 시를 짓고 듣는 사람 부회장, 글길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제6회 초허 김동명 문학상, 제4회 한국 가람문학상, 제4회 시마당 낭송 대상 등을 받았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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