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세대주택에 '상실'이란 여자가 살았다"
[서평] 시인 심인숙 첫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
▲ 시인 심인숙이 시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원망하거나 멀리하려는 것은 아니다 ⓒ 푸른사상
눈앞에서 파랑도가
마법사의 주문처럼 탁, 사라지고 없다
나에게 그 모자를 십 분만 빌려다오 아니면 오 분만 오- 오 분만
내게 모자를 씌워다오
목마처럼 겅중겅중 하늘로 날아오르겠다
허리띠는 저 혼자 훌훌 곤두박질치겠지만
아랫도리와 배꼽도 사라지고 모자만 살아남는 즐거움,
시간의 칸막이 속을 주유하며
공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나를 불러볼까
파출소를 지나 개울을 건너
개성여관으로 아버지를 찾아나설까
그러나 오 분은 너무 촉박하므로
미안하다, 파랑도야
양떼구름 속으로 첨벙! 바로 달려들겠다
모자는 어디에 숨겼니?
코끼리바위에게 주었니 갯메꽃에게 씌워주었니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파랑도는 싯푸른 각을 세우며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저 멀리 붉은 산호초에 둘러싸인 고깔모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파랑도에 빠지다' 모두
시인 심인숙. 그가 문단에 나온 뒤 5년 만에 낸 첫 시집도 어쩌면 그런 고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끝없는 몸부림, 자유를 향한 '깃털'을 찾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지난 3월 끝자락에 나온 그 시집을 뒤늦게 읽고 이제야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도 어쩌면 올해 들어 그 어느 해보다 더 심각한 돈가뭄에 허덕여 그 '깃털'을 잃어 버렸던 탓인지도 모른다.
시인 심인숙 첫 시집 제목이 된 '파랑도에 빠지다'란 이 시도 마찬가지다. 파랑도는 제주도 남서쪽 150㎞에 발을 담그고 있는 바다 속 암초섬, 즉 이어도다. 이어도는 어떤 섬인가. 이어도는 제주민 가슴팍에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아들이나 남편이 살고 있다는 그 전설 속에 나오는 섬 아니던가. 1984년 제주대학팀 조사에 의해 그 실체를 찾아 파랑도(破浪島)란 새로운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심인숙 시인은 왜 이 파랑도에 빠지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지푸라기 하나 잡을 수 없는 이 고단한 세상에서 모든 것을 훌훌 내던져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제주민들이 이상향으로 그리는 그 파랑도를 통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고 싶었던 것일까.
날아가는 돌멩이에도 입이 있다
"문을 연다. 뒤늦게, / 문이란 문은 무두 열어젖힌다 // 꽃들은 어디서 왔나 / 일렁이는 꽃물결에 숨 가쁘다. // 생이여, 고맙다! // 화려한 봄날이어서 / 나비처럼, / 내 어머니도 한 번쯤 다녀가시겠다." -'시인의 말' 모두
시인 심인숙 첫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푸른사상). 이 시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원망하거나 멀리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이 모난 세상과 이 모진 세상살이를 꼬옥 끌어안고 파랑도 같은 세상을 끌어당기기 위해 온몸으로 시를 쓴다. 시인이 '상상'으로 쓰는 시는 지상낙원 같은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는 '깃털'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모두 4부에 61편이 '상상의 날개'를 달고 마구 퍼덕이고 있다. '수건돌리기 게임', '달빛을 재는 체중계', '할머니 귓속에 딱새가 산다', '집을 비우다', '엘리베이트는 상중(喪中)입니다', '해를 먹는 아이', '숫자나무 위를 나는 호랑나비', '내가 웃는다', '옛집을 지나며', '날아가는 돌멩이에 입이 있다' 등이 그 시편들.
수건돌리기 게임을 "누군가 흑백풍경을 돌"리고 "구름시계를 돌"리는 것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이 뱅뱅 도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인 심인숙.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뒤틀린 현실에 뿌리 박아 그만이 지닌 독특한 '상상의 힘'을 통해 이 세상살이를 야무지게 꼬집는다. 까닭에 그가 시에 불어넣는 '상상'은 헛된 꿈이 아니라 끝없는 자유를 담는 그릇이다. "날아가는 돌멩이에도 입이 있다"라는 시처럼.
그는 문장 블로그에서 "시는 시인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다. 나와 같아서, 나와 달라서 읽게 되는 시의 종류는 무궁하다"고 썼다. 그는 "시에도 골라 읽는 즐거움이 있다. 환기력을 주는 시를 만날 때, 우리는 긴 여운 속에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바라보게 된다"며 "당신은 시에서 어떤 힘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느 시에서 발견할 수 있었나요?"라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되묻는다.
현실과 상상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 심인숙 첫 번째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이 모난 세상과 이 모진 세상살이를 꼬옥 끌어안고 파랑도 같은 세상을 끌어당기기 위해 온몸으로 시를 쓴다 ⓒ 푸른사상
다닥다닥 붙어사는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한다. 청상과부 선아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쭉한 부안댁이다.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는 여인들.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고 있다.
- '숭어' 몇 토막
심인숙 시인이 지닌 '상상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그는 상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시인은 현실과 상상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세상을 엿본다. 이 세상을 '상상' 없이 그저 그런 눈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의 섬'인 그 파랑도를 결코 끌어당길 수도 맞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숭어'란 이 시는 지난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다. 시인은 캄캄한 밤에 셋방에서 사는 여인들이 "봉숭화꽃 가득한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팔짝팔짝 튀는 숭어에 견준다. 이들 셋방 아줌마들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이 못난 세상을 결코 '좋은 세상'으로 이끌 수 없다.
시인은 이 젊은 셋방 아줌마들이 목욕을 하며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고,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 같은 비음이 흘러" 나오는 모습에서 파닥거리는 숭어를 본다. 이 시에서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숭어는 곧 셋방 아줌마들이자 그들 바람이며, 새로운 세상에 닿을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길라잡이다.
"저곳엔 한때 상실이란 여자가 살았다"
다닥다닥 붙어앉은 다세대주택 속에 낯익은 창이 보인다
저곳엔 한때 상실이란 여자가 살았다
반지하로 내려앉은 안방 창문을 가리느라 그녀가 붙여놓은 바닷속 물고기 스티커,
유유히 물밑을 헤엄쳐 다니던 아가미는 황톳빛 물방울을 내뱉고 있었다
-'옛집을 지나며' 몇 토막
글쓴이가 지난 해 이맘 때 지금 사는 중랑구 면목동 다세대주택 반지하로 이사를 왔을 때에도 "안방 창문을 가리느라 그녀가 붙여놓은 바닷속 물고기 스티커"가 "황톳빛 물방울을 내뱉고 있었다". 여기서 아가미에서 내뱉는 황톳빛 물방울은 반지하에 스며든 습기 때문에 얼룩이 진 물고기 스티커를 뜻한다.
그래. 글쓴이가 살고 있는 이 다세대주택 반지하에도 모든 것을 '상실'한 그런 여자, 심인숙 시인이 살았던 곳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상실'이란 시인이 스스로에게 붙인 다른 이름이다. 시인은 물고기 스티커를 통해 다세대주택 반지하, 늘상 습기가 가득한 그 셋방 창문을 바닷속이라 여긴다. 때문에 물고기 스티커가 "유유히 물밑을 헤엄"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이 현실과 상상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꿈, 파랑도를 끌어당기는 시는 이 시집 곳곳에서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고 있다. "지금 방은 거대한 공처럼 튕겨지고 있어요"(공놀이)라거나 "내 겨드랑이에서도 까닭 없는 날개가 돋아나네"(흰나비), "밥 속엔 밥알만한 꽃"(꽃마(魔)에 들다), "초저녁달이 도르래를 내리고 있어요"(달과 노래하는 중이에요), "구름은 시들었다"(구름편지) 등이 그러하다.
"TV 속으로 걸어간 그, 어느 수평선 돌아 나오고 있을까"
"TV를 보던 그가 / 내 무릎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 바람소리를 듣는다 / 해초냄새가 난다... TV 속으로 걸어간 그는 / 어느 수평선을 돌아 나오고 있을까 / 나는 자꾸 어둑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먼 바다에 켜진 저녁불빛을 따라 / 슬며시 / 나도 바닷속으로 걸어나간다"
- '바다로 나가다' 몇 토막
시인 이승하(중앙대 교수)는 "인숙의 시는 역동적이다. 형용사보다 동사를 훨씬 많이 구사하는 이유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 때문일 것"이라고 되짚는다. 그는 "살아 있지 않는 자연 대상물일지라도 심인숙의 시에서는 살아 숨 쉰다"라며 "시인 늦깎이로 시단에 나와 그 누구보다 활발히 시작 활동을 전개하여 첫 시집을 내는 심 시인의 부지런함은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원자 속의 전자와 저 태양의 움직임과 다를 바 없다"고 썼다.
시인 김기택은 "심인숙의 시를 나오게 하는 힘은 '가벼움의 본능'"이라며 "그의 시어들은 뒤꿈치에 날개를 달고 있어서 날아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일상에서 마주친 것이든 그의 혀에 닿는 것들은 모두 달, 별, 햇빛, 공기, 구름, 새, 나비, 공 등의 이미지로 변하여 제멋대로 솟구치고 튀어 오르고 날아다닌다"고 적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맹문재(안양대 국문과 교수)는 '상상력의 시학'이란 이번 시집 해설에서 "화자는 기억의 장면들을 통해 현재의 삶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귀띔한다. 그는 이 상상력은 "현재의 삶을 방기하거나 소비하거나 파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마치 숙제를 하듯이 자신의 일상에 달라붙어 삶을 일구려 애쓰는 시인이 심인숙"이라고 평했다.
시인 심인숙 첫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는 자유를 찾아가는 상상력이 빚어낸 '가벼움'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은 바슐라르가 말한 "삶의 가장 깊은 본능의 하나인 가벼움의 본능" 그 뿌리다. 시인은 '가벼움'이란 날개를 양 어깨에 달고 '무거운 삶'을 입에 문 채 퍼더덕 날아올라 저만치 휘이잉 날아간다. 끝없는 자유가 춤추는 그 나라로.
시인 심인숙은 인천에서 태어나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숭어'가 당선되었고, 2006년 <문학사상>에 '파랑도에 빠지다'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상상력이란 가슴에 폭삭 안으며 끝없는 자유로 나아가고 있다. 그 자유는 삶을 이끄는 지렛대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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