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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이런 사상가가 있었다!

류영모의 삶과 사상, 철학을 맛보는 책 <다석 류영모>

등록|2011.09.30 17:56 수정|2011.09.30 17:56

▲ 70년대의 류영모 모습 ⓒ 두레

다석 류영모를 처음 알게 된 때가 80년대 초 함석헌 선생이 발간한 '씨알의 소리'를 접하고였다.

'씨알의 소리'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10년 된 해인 1970년 4월 19일에 창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통권 제 2호가 나오자마자 박정희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가 복간되고 다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폐간되었다 복간되기를 반복하면서 국민들의 희망이 되었다. 나도 그때  '씨알의 소리'를 구해 읽었고 그때 류영모란 이름을 알았다. 그리고 함석헌도 귓동냥처럼 듣게 되었다.

잠시 류영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함석헌에 대해 이야길 해보자. 류영모와 함석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런 함석헌이 잡지를 펴내면서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라는 글을 통해 언론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알의 눈이고 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씨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씨알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일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정부가 강도의 소굴이 되고, 학교 교회 극장 방송국이 다 강도의 앞잡이가 되더라도 신문만 살아 있으면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민중의 눈을 쥐고 입을 쥐고 손발을 쥐고 있으면서 그것을 아니합니다. 집권자는 아무리 강해도 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라의 주인 씨알은 영원합니다."

언론이 국민을 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권력을 위해 존재하고 시녀 노릇을 했던 시절 함석헌은 언론이 진정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따끔하게 혼내주고 있다. 사실 언론이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가 잘 돌아가지 못한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더라도 알 수 있고 지금 21세기에도 그런 현상은 재현되고 있다.

근현대 들어와 사상가 사라지고, 남의 사상만 판쳐

▲ 류영모(왼쪽)와 함석헌(오른쪽) ⓒ 두레


그럼 류영모는 누구인가. 씨알 사상을 대중화시킨 평화주의자 함석헌의 스승이 류영모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석헌은 알아도 류영모는 잘 모른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더욱 모른다. 헌데 그를 알고 따르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말과 글로 우리 사상을 펼친 이가 다석 류영모라고.

사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조선을 대표할 만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등이다. 그러나 근현대에 들어와 철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 사상을 가진 이는 거의 없다. 앞서 말했듯 남의 사상을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우리말과 글로 우리만의 사상을 정립한 이는 더욱 그렇다. 허면 우리말로 우리 사상을 이야기한 사람이 없을까. 있다. 류영모다. 류달영은 류영모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사상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온갖 사상의 수입국이었는데 이제 20세기에 다석 류영모가 나타나서 사상 수출국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그럴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류영모가 누구나 인정하는 사상가로서의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스페인은 세르반데스를, 이탈리아는 단테, 영국은 셰익스피어, 러시아는 톨스토이, 독일은 괴테 같은 이를 철학이나 사상의 간판 인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전 세계인이 알고 있고, 이들의 글들을 읽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류영모는 일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추앙받을 뿐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한다. 류영모가 우리말과 글로 우리 사상을 이야기한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먼저 그의 사상들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책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대중성을 확보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면 창고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씨알' '빛고을'이란 말 처음 쓴 사람..."'관존민비' 양반사상 버려야"

▲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한 큰 사상가 <다석 류영모> ⓒ 두레

<다석 류영모>(두레)를 읽다보면 독자들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그의 신앙관과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의 이야기, <성서조선>을 발행한 김교신과의 만남, 그리고 쉰 두 살에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와 그의 삶과 사상. 그리고 류영모의 씨알정신의 형성과정과 영성신앙으로 발전하는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미 대중화된 '씨알'에 대한 것들도.

일단 '씨알'이란 말을 흔히 함석헌이 처음 사용했다고 알고 있는데 류영모가 사용했다는 사실. 광주(光州)를  빛고을이라 부르는데 이 '빛고을'도 류영모가 처음 썼다고 한다. 또 '훈민정음'을 '씨알 글씨'라 부르고, '단군'을 '등걸', '무등산'을 '없는 뫼'라 부르는 등 생소하지만 참신한 말들을 숱하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민중' '민초'의 의미로 알고 있는 '씨알'에 대해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류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정신이란 기존의 관존민비(官尊民卑)가 아닌 민존관비(民尊官卑) 사상이라고 한다. 예수가 자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했는데 그 섬김의 정신이 씨알정신이라 한다. 민중, 민초의 의미를 뛰어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반성할 것은 내가 남을 이용하려는가 남을 섬기려는가이다. 내가 집사람을 더 부리려 하는가 아니면 더 도우려 하는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집이거나 나라이거나 세계이거나, 남을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무조건 하고 봉사하자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다. 지식을 배우러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보자 대우 받자는 생각에서다. 이는 관존민비의 양반사상이다. 버려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순수한 우리글로 표현한 것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말글로 류영모가 지은 시조들을 읽을 수 있다. 헌데 안타깝게도 우리말인데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석의 시조 한 편을 옮겨 보겠다. 읽고 한 번 의미를 파악해 보는 것도 괜찮을성싶다.

                  있도 없

더할 나위 없이 바로 살고 바로 죽어야 돼
죽을 나윈 안난 셈 쳐 살 나윈 죽을 셈 속에서
옛다시 있다시 가온데 나 싫들 좋음, 있도 없
덧붙이는 글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한 큰 사상가 <다석 류영모> /두레/ 박영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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