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문순태는 지금도 왜 밥을 빨리 먹을까
[서평] 문순태의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 읽고서
무등산의 작가 문순태
문순태의 산문집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의 첫 장을 펴고는 한 자리에서 단숨에 읽다시피 끝장까지 읽었다. 그는 1941년 생이고 나는 1945년 생으로 거의 동시대를 살아온 탓인지 그가 태어난 광주 무등산 기슭과 내가 태어난 구미 금오산 기슭과는 공간의 차이가 수백 리 있음에도 마치 이웃 마을인 양 내 유소년시절을 되새기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발 1187미터의 무등산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유년시절에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산 너머 넓은 세상을 동경했었고, 광주로 나가 살면서부터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 그가 교직(광주대)에서 65세 정년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지난 추억의 실오라기를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다. 아내는 내 밥 먹는 속도에 맞추느라 위장병까지 생겼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나와 밥 먹는 습관이 같기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25를 만나 한 동안 고향을 떠나 걸식하듯 떠돌음 했던 우리 가족은 4년 동안 외가에 빌붙어 산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외가에 소꼴을 베어주고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밥상 앞에 앉은 나는 늘 외삼촌 눈치를 보며 후닥닥 밥을 먹어치우고 방에서 뛰쳐나와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늦게 먹으면 "저 자식, 무슨 밥을 저렇게 많이 주었어"하고 외삼촌이 고함을 쳐댔기 때문이다.
- 19쪽'외갓집 가는 길'
정말 그 시절은 극소수를 빼고는 세 끼 밥 먹는 집은 없었고, 하루 한두 끼는 죽이나 수제비, 범벅, 국수요, 밥조차도 쌀이나 보리보다 배추나 무, 콩나물 등 나물을 더 많이 넣은 나물밥이 대부분이었다. 흰 쌀밥을 먹는 날은 명절 날이나 제삿날로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조상 덕에 이밥"이었다.
어머니 향기
농사꾼의 아내였던 어머니는 도시로 나와 살면서부터는 텃밭을 갖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오죽 텃밭이 갖고 싶었으면 집안에 있던 화분의 꽃들을 모두 뽑아버리고 고추나 가지 모종을 하셨을까. 오래전의 일이다. 내 소설집 <고향으로 가는 바람>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직후, 아내와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축하화분의 난이나 꽃을 모두 뽑아 없애고 대신 고추와 가지를 심어놓으셨다.
- 22쪽 '어머니 텃밭'
그 어머니는 꽃은 들이나 산에 가면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하면서 난이나 장미보다 먹을 수 있는 풋고추나 호박, 가지 한 개가 더 소중하다고 그랬던 것이다. 아들집에 살면서 도시의 2층 슬러브 집 마당에 호박을 심어 온통 호박넝쿨로 집을 뒤덮어 놓았다고 했다.
그 어머니가 연로하여 병원에 입원하시던 날, 어머니는 당신이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아들에게 저금통장과 도장을 맡겼다.
"나 죽으면 이 돈으로 관이나 사거라."
어머니를 입원 시키고 돌아온 아들은 그날 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원고지를 메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청국장 냄새가 난다
세월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쓰디 쓴 삶의 발효
사무치게 보고 싶은 오늘
그 향기 더욱 푸르고
빛이 바랠수록 그립다
이튿날 날이 밝은 뒤 아들은 돌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 키 높이만한 오석에 <어머니 향기>라는 시비를 세웠다.
그의 거친 삶이 큰 작가로 만들다
문순태, 그는 6․25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다. 그가 전남 담양군 남면 구산리 남면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다. 늦은 점심으로 삶은 감자를 먹고 있을 때였다. 붉은 별을 붙인 그물모자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사격자세로 다발총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이후로 소년 문순태는 끔찍한 동족상잔, 피의 제전 6․25 한국전쟁을 두 눈과 두 귀로 보고 들었다.
나는 요즈막 백아산에 자주 간다. 백아산 골짜기마다 6․25의 영혼들이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6․25를 소리로 듣는다. 골짜기를 흔든 총소리며 아무도 없는 물방앗간에서 삐꺼덕거리며 돌아가는 빈 물레방아 소리, 때로는 피를 토하는 듯한 울부짖음과 죽어가면서 마지막 내지른 비명이 잠든 나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때마다, 6․25 때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뙤록뙤록 살아난다. 이제는 잊힌 그들의 이름을 찾아주고 떠도는 고혼에 안식을 주기 위한 진혼제를 올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되살려주고 떠도는 고혼을 달래주기 전에는 6․25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2쪽 '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
6․25로 인해 내 삶은 유년시절부터 순탄치 못했다.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인 내가 초등학교를 네 곳(담양군 남면 인안분교, 신안군 비금 중앙, 화순군 이서 서유, 광주 학강)이나 옮겨 다녀야만 했었고, 대학도 세 학교(전남대 철학과, 숭실대 기독교철학과, 조선대 국문학과)를 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굴곡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11쪽 '나의 삶 나의 소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였다.
5월 21일, 정오를 알리는 애국가 소리에 맞춰 계엄군의 총부리에서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는 장면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27일 도청에서의 마지막 밤, 새벽의 어둠을 찢는 듯한 가두방송의 애절한 목소리가 극장을 나온 후에까지도 귓전을 맴돌았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광주사람이라면 그날 새벽의 처절했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177쪽 '<화려한 휴가>의 교훈'
문순태는 한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보고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삶이 고난의 길이었기에 그는 큰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산문집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감탄과 감동, 때로는 공감과 공분을 느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일찍 어머니를 잃었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늘그막에도 타향에서 어슬렁거리는 데 견주어, 그는 당신 문학의 밑바탕이 된 어머니를 오래도록 모신 것과 퇴직 후 다시 고향 무등산으로 돌아간 점 때문이다. 지금 그는 고향 생오지 마을에 '생오지 문학의 집'을 꾸며놓고 당신 기억 창고에 가득 찬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음미하며 원고지에 옮기고 있다.
이 책 3부에서는 이성부, 한승원, 황풍년, 5부에서는 김현승, 김동리, 허백련, 김대중, 박현채, 유공희, 이청준, 진양욱, 신복진 등 질곡의 현대사를 꿋꿋하고 치열하게 산 여러 인물의 일화를 들을 수 있다.
볕 좋은 날 그가 사는 생오지 마을로 찾아가 무등산 산채에 막걸리를 마시며 미처 원고지에 토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 표지 ⓒ 오래출판사
그런 그가 교직(광주대)에서 65세 정년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지난 추억의 실오라기를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다. 아내는 내 밥 먹는 속도에 맞추느라 위장병까지 생겼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나와 밥 먹는 습관이 같기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작가 문순태 ⓒ 박도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밥상 앞에 앉은 나는 늘 외삼촌 눈치를 보며 후닥닥 밥을 먹어치우고 방에서 뛰쳐나와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늦게 먹으면 "저 자식, 무슨 밥을 저렇게 많이 주었어"하고 외삼촌이 고함을 쳐댔기 때문이다.
- 19쪽'외갓집 가는 길'
정말 그 시절은 극소수를 빼고는 세 끼 밥 먹는 집은 없었고, 하루 한두 끼는 죽이나 수제비, 범벅, 국수요, 밥조차도 쌀이나 보리보다 배추나 무, 콩나물 등 나물을 더 많이 넣은 나물밥이 대부분이었다. 흰 쌀밥을 먹는 날은 명절 날이나 제삿날로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조상 덕에 이밥"이었다.
어머니 향기
농사꾼의 아내였던 어머니는 도시로 나와 살면서부터는 텃밭을 갖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오죽 텃밭이 갖고 싶었으면 집안에 있던 화분의 꽃들을 모두 뽑아버리고 고추나 가지 모종을 하셨을까. 오래전의 일이다. 내 소설집 <고향으로 가는 바람>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직후, 아내와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축하화분의 난이나 꽃을 모두 뽑아 없애고 대신 고추와 가지를 심어놓으셨다.
- 22쪽 '어머니 텃밭'
그 어머니는 꽃은 들이나 산에 가면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하면서 난이나 장미보다 먹을 수 있는 풋고추나 호박, 가지 한 개가 더 소중하다고 그랬던 것이다. 아들집에 살면서 도시의 2층 슬러브 집 마당에 호박을 심어 온통 호박넝쿨로 집을 뒤덮어 놓았다고 했다.
그 어머니가 연로하여 병원에 입원하시던 날, 어머니는 당신이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아들에게 저금통장과 도장을 맡겼다.
"나 죽으면 이 돈으로 관이나 사거라."
어머니를 입원 시키고 돌아온 아들은 그날 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원고지를 메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청국장 냄새가 난다
세월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쓰디 쓴 삶의 발효
사무치게 보고 싶은 오늘
그 향기 더욱 푸르고
빛이 바랠수록 그립다
이튿날 날이 밝은 뒤 아들은 돌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 키 높이만한 오석에 <어머니 향기>라는 시비를 세웠다.
▲ 생오지 문순태 '문학의 집' 뜰에 있는 '어머니의 향기' 시비 ⓒ 박도
그의 거친 삶이 큰 작가로 만들다
문순태, 그는 6․25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다. 그가 전남 담양군 남면 구산리 남면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다. 늦은 점심으로 삶은 감자를 먹고 있을 때였다. 붉은 별을 붙인 그물모자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사격자세로 다발총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이후로 소년 문순태는 끔찍한 동족상잔, 피의 제전 6․25 한국전쟁을 두 눈과 두 귀로 보고 들었다.
나는 요즈막 백아산에 자주 간다. 백아산 골짜기마다 6․25의 영혼들이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6․25를 소리로 듣는다. 골짜기를 흔든 총소리며 아무도 없는 물방앗간에서 삐꺼덕거리며 돌아가는 빈 물레방아 소리, 때로는 피를 토하는 듯한 울부짖음과 죽어가면서 마지막 내지른 비명이 잠든 나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때마다, 6․25 때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뙤록뙤록 살아난다. 이제는 잊힌 그들의 이름을 찾아주고 떠도는 고혼에 안식을 주기 위한 진혼제를 올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되살려주고 떠도는 고혼을 달래주기 전에는 6․25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2쪽 '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
6․25로 인해 내 삶은 유년시절부터 순탄치 못했다.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인 내가 초등학교를 네 곳(담양군 남면 인안분교, 신안군 비금 중앙, 화순군 이서 서유, 광주 학강)이나 옮겨 다녀야만 했었고, 대학도 세 학교(전남대 철학과, 숭실대 기독교철학과, 조선대 국문학과)를 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굴곡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11쪽 '나의 삶 나의 소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였다.
5월 21일, 정오를 알리는 애국가 소리에 맞춰 계엄군의 총부리에서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는 장면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27일 도청에서의 마지막 밤, 새벽의 어둠을 찢는 듯한 가두방송의 애절한 목소리가 극장을 나온 후에까지도 귓전을 맴돌았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광주사람이라면 그날 새벽의 처절했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177쪽 '<화려한 휴가>의 교훈'
▲ 생오지 마을 '문학의 집' 전경 ⓒ 박도
문순태는 한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보고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삶이 고난의 길이었기에 그는 큰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산문집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감탄과 감동, 때로는 공감과 공분을 느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일찍 어머니를 잃었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늘그막에도 타향에서 어슬렁거리는 데 견주어, 그는 당신 문학의 밑바탕이 된 어머니를 오래도록 모신 것과 퇴직 후 다시 고향 무등산으로 돌아간 점 때문이다. 지금 그는 고향 생오지 마을에 '생오지 문학의 집'을 꾸며놓고 당신 기억 창고에 가득 찬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음미하며 원고지에 옮기고 있다.
이 책 3부에서는 이성부, 한승원, 황풍년, 5부에서는 김현승, 김동리, 허백련, 김대중, 박현채, 유공희, 이청준, 진양욱, 신복진 등 질곡의 현대사를 꿋꿋하고 치열하게 산 여러 인물의 일화를 들을 수 있다.
볕 좋은 날 그가 사는 생오지 마을로 찾아가 무등산 산채에 막걸리를 마시며 미처 원고지에 토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 문순태 문학의 배경인 광주 무등산 ⓒ 박도
▲ 산책길에 강아지를 안아주는 작가 문순태 ⓒ 박도 주요작품집에는 『고향으로 가는 바람』『징소리』『철쭉제』『된장』『울타리』『생오지 뜸부기』가 있고, 장편소설에는『타오르는 강』『걸어서 하늘까지』『그들의 새벽』『41년생 소년』등을 발표했다. 한국소설문학 작품상, 요산문학상, 이상문학상 특별상. 채만식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광주대 문예창작과를 정년퇴임한 후 담양군 생오지 마을에 정착해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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