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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는 독경소리, 사리를 보았습니다

[현장] 정무 큰스님 영결식 및 다비식

등록|2011.10.04 17:01 수정|2011.10.04 19:00

▲ 두 손을 모으고 극랑왕생을 기도하는 사람들 ⓒ 임윤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새벽 4시에 집을 나섭니다. 하늘은 맑고 별빛은 총총합니다. 입에서 '어이~ 추워' 하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라서 그런지 도천 큰스님에 이어 하루 차로 입적하신 정무 큰스님의 영결식이 치러지는 화성 용주사엘 가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섭니다. 

2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니 조금 느긋하게 출발할 수도 있었겠지만 정무 큰스님의 영결식은 지금껏 다녀왔던 여느 스님들의 다비식과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대개 스님들의 영결식과 다비식은 한곳에서 다 치러졌지만 정무 큰스님은 용주사에서 영결식을 치른 후 150여리쯤 떨어진 석남사로 법구를 이운해 석남사에서 다비를 하기 때문이었죠. 자칫 시간차가 발생할 수도 있어 조금 서둘렀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 우거지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안성에 들러 용주사에서 석남사까지 길을 안내해 줄 석남사 신도들을 동승시켜 용주사에 도착하니 거반 8시입니다.

▲ 정무 스님 영결식, 2011년 10월 3일 용주사 ⓒ 임윤수


▲ 영결식장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 임윤수


▲ 햇살이 좋았습니다. ⓒ 임윤수


▲ 정무 큰스님 ⓒ 임윤수


소복을 입은 상주처럼 조화가 길게 도열해 있는 입구를 지나 영결식장으로 들어가니 아직은 한적하고 영결식장은 준비 중입니다. 영결식장은 용주사 효행박물관 맞은편, 생활관 앞마당에 마련되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 가슴에 살아 계신 듯

영결식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느 스님의 영결식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의자를 날라 줄 맞춰 정리하고, 의자 하나하나를 깨끗하게 걸레질 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입니다. 다른 스님들의 영결식장에서 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느껴지는 어른들이었지만 정무 큰스님의 영결식장을 정리 정돈하고 있는 사람들은 앳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젊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조계종 총무원에 재지중인 박상희님이 '스님이 살아 계셨을 때 대학생들한테 잘 해주셨나 봐요'하며 젊은이들의 정체를 설명해 줍니다. 스님께서는 생전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 법사를 역임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은 바로 그 대불련(한국대학생불교연학회) 소속 학생들로 자발적으로 동참해 3일째 밤낮으로 일손을 돕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 잠자리도 추모행렬에 앉았습니다. ⓒ 임윤수


다니고 있는 대학이 다르고, 전공과 연령 또한 차이가 나고 달랐지만 정무 큰스님으로 배운 것을 큰스님이 가시는 길에 봉사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식장을 정리하고, 음료 봉사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발산하고 있는 발랄함에서 정무 큰스님께서 생전에 펼치신 가르침의 그림자가 싱그러운 젊음으로 향불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영결식장에서 뵙는 정무 큰스님은 효행과 청빈한 모습

오전 10시가 되니 명종 5타를 시작으로 영결식이 시작됩니다. 새벽에는 겨울옷을 챙겨 입어야 할 만큼 춥더니 영결식이 시작될 쯤엔 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할만큼 햇살이 좋습니다.

영결사와 추도사, 조사에 담긴 정무 큰스님은 백장청규 정신을 실천으로 옮겨온 이 시대 청빈의 사표이셨고 공부하는 스님이셨습니다. 용주사를 효행 본찰의 반석에 올려놓으신 효행 스님이셨으며 강단 있는 수행자며 지도자였습니다.

▲ 석남사에 마련된 새끼줄 연화대 ⓒ 임윤수


영결식을 마친 운구행렬이 용주사를 출발하기에 앞서 다비를 치를 연화대가 마련되어 있을 석남사로 먼저 출발을 하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구불구불하게 난 서운산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가니 석남사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다비장은 석남사가 마주 보이는 맞은편에 있는 공터였고, 연화대는 하얀 천을 두르고 정무 큰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50리 길을 달려온 운구행렬

오후 1시 40분쯤이 되니 영결식을 마치고 150리 길을 숨 가쁘게 달려왔을 운구행렬이 계곡 길을 따라 석남사 입구로 들어섭니다. 인로왕번, 명정, 삼신불번, 오방불번, 십이불번, 위패, 영정, 법주, 스님의 법구를 모신 캐딜락, 스님에 이어 알록달록한 만장을 든 신도 순으로 선 이운행렬이 석남사 앞으로 들어섭니다.

▲ 150리 길을 달려와 석남사로 들어서고 있는 운구행렬 ⓒ 임윤수


▲ 만장행렬 ⓒ 임윤수


▲ 다비장에서 마주 보이는 석남사 ⓒ 임윤수


▲ 다비장으로 들어서는 정무 큰스님 법구 ⓒ 임윤수


▲ 거화, 스님 불 들어갑니다. ⓒ 임윤수


캐딜락으로 모셔온 스님의 법구가 8명이 멜 수 있도록 만들어진 상여에 옮겨져 다비장으로 올라갑니다. 스님의 법구를 연화대로 모시고, 오후 2시에서 몇 분쯤 지나서 불을 붙이는 거화를 합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글썽글썽한 목소리로 '스님, 불 들어갑니다'하고 외치는 소리는 서러운 메아리가 되어 서운산 자락에 그렁그렁한 눈물처럼 울립니다.  

연기를 토해내며 타들어 가는 것은 연화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무 큰스님을 태워야 하는 제자들의 마음도 애통하고 절통한 표정으로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대학생이던 1969년부터 정무 큰스님과 인연이 있다는 허안(61)씨가 말하는 정무 큰스님은 우여곡절 많은 근대 한국불교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하고 가슴 아프게 기억 될 출가수행자이신가 봅니다.

▲ 불꽃을 토하고 있는 연화대 ⓒ 임윤수


▲ 스님들이 돌아가며 하던 독경소리 끝까지 끊이지 않아 ⓒ 임윤수


▲ 연화대를 꾸린 현호씨(54세, 왼쪽)과 연화회 대표 유재철님 ⓒ 임윤수


▲ 다비장 주변에 걸린 걸개 추모글 ⓒ 임윤수


▲ 반쯤은 타들어간 연화대 ⓒ 임윤수


▲ 떠날 사람은 거반 떠난 다비장 ⓒ 임윤수


▲ 연화대를 꾸린 새끼줄 타래 ⓒ 임윤수


1시간에 한 번밖에 없는 버스를 놓치면 수원서부터 용주사까지 걸어 다니신 스님, 어쩔 수 없어 설렁탕 한 그릇을 먹다 걸어온 시비에 면구스러움을 당하지만 솔직히 인정하고 참회하니 도리어 시비를 삼던 사람이 설렁탕 값을 내주고 나간 일화로 기억하는 스님은 도도 하리 만큼 강직한 분입니다.

연탄을 때던 시절, 교통의 불편함 덜어드리려 제자들이 승용차를 사드리니 그 차로 연탄이나 배달해 쓰라며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스님을 떠올리는 허안씨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스님은 청빈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혜덕이라는 법명을 버리고 '정무 스님'으로 살아오면서 감내해야 했던 갈등, 세속의 상징인 아파트에서 잠시나마 생활해야 했던 정무 큰스님의 생전을 회상하는 허안씨의 표정은 아픔과 번민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허안씨를 통해 볼 수 있는 정무 큰스님의 가장 큰 모습은 검소한 모습, 검소한 생활이셨습니다.

▲ 석남사 대우언에서 건너다 본 연화대 ⓒ 임윤수


▲ 연화대를 살펴보고 있는 상좌 스님들 ⓒ 임윤수


▲ 거반 다 사그라진 연화대 ⓒ 임윤수


▲ 스님의 법구가 남긴 움푹 패인 흔적 ⓒ 임윤수


▲ 드러난 뽀얀 유골 ⓒ 임윤수


영결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서 일부러 들어왔다는 박아무개(49·여)씨가 그리는 정무 큰스님은 큰 스승과 사별을 해야 하는 슬픔이며 사제의 애틋함이었습니다. 개개인의 기억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정무 큰스님을 그리는 공통 모습은 생전에 보이신 검소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무 큰스님을 다비한 연화대는 새끼줄 연화대

정무 큰스님을 다비하는 연화대는 새끼줄 뭉치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연화대를 꾸린 사람은 지난 2008년 1월 30일, 덕유산 원통사에서 정공 스님을 다비한 연화대를 꾸렸던 현호(54)씨였습니다. 

▲ 하늘에 걸린 반달과 연화대 ⓒ 임윤수

서로를 기억하고 있으니 정무 큰스님을 다비하고 있는 연화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무 큰스님을 다비한 새끼줄 연화대는 중앙으로 조금 경사지게 땅바닥을 고르고, 시멘트 블록을 가로로 뉘어 놓고 그 위에 아나방(구멍이 뻥뻥 뚫린 철제 발판)을 얹은 후 도넛처럼 동글동글하게 말려있는 새끼타래 240개를 쌓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시멘트블록을 가로로 뉘어 놓는 것은 통풍을 위해서이고, 새끼 타래를 차곡차곡 쌓고 구멍을 메워줘야 하는 것은 연소 중 신체부위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기름은 어느 정도를 쓰는 것이 좋고, 산세와 지형에 따라 방향을 어떻게 잡아 연화대를 설치해야 하는지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처음에야 봉선사 조실이신 밀운 스님께서 알려주시고 지시해 주어서 할 수 있었지만 반복되는 경험으로 나름대로의 비법을 터득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열기를 가두느라 멍석을 덮고 물을 뿌리는데 현호씨가 하는 다비는 거화를 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불을 붙여 이렇게 가만 놔두면 너무 빨리 타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단호하게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새끼줄 타래가 거반 다 사그라진 연화대 ⓒ 임윤수


▲ 불을 밝히고 탑돌이를 하듯 연화대를 돌고 있는 사람들 ⓒ 임윤수


▲ 연화대 하반부 ⓒ 임윤수


▲ 유골 ⓒ 임윤수


잿불에 감자를 묻으면 감자가 익기만 하고 타지 않듯이 열기를 가둔다고 멍석을 씌워 물을 뿌리면 온도는 더 올라갈지 모르지만 타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가열과 연소기구(burn mechanism)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봐왔던 다비식 중 독경소리가 끊이지 않은 다비식은 처음

어른 키 높이로 수북하였던 연화대가 거화 후 3시간쯤이 지나니 야트막해졌습니다. 연화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야트막해졌지만 거화를 시작하여 서운산 자락에 울려 퍼지던 독경소리는 점점 울림이 커졌습니다.

거화를 하면 당연히 들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무아미타불 정근 대신 독경소리가 들렸습니다. 독경소리가 너무 맑고 매끄러워 시작하자마자 CD를 틀어 놓았나 보다하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두 분씩 짝을 이뤄 직접 독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 나비도 사리가 궁금한지 스님 옷깃에 앉아 보고 있습니다. ⓒ 임윤수


▲ 습골과 사리 ⓒ 임윤수


젊은 스님이 하는 독경소리는 진짜로 CD를 틀어 놓은 듯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정근 대신하는 하는 곡경은 천수경, 금강경, 화엄경, 반야심경 등으로 습골을 하고 다비를 완전히 끝낼 때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22분 스님의 다비현장에 있었지만 다비식 처음부터 끝까지 독경소리가 끝이지 않는 현장은 정무 큰스님 다비식장이 처음입니다. 우스갯소리인지 진담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들려오던 이야기, 상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이야기에 내심 꼬부라졌던 마음이 끊이지 않는 독경소리에 활짝 펴졌습니다.

독경소리가 다비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은사 스님을 모시는 상좌스님들의 지극함은 물론 6시간 만에 모든 과정을 끝마칠 수 있는 능숙한 연화대 운영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정무 큰스님 법구는 사리 덩어리

반달로 가고 있는 달이 하늘에 걸린 시간, 열기가 줄어든 연화대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유골을 거둡니다. 백옥처럼 뽀얀 유골이 나오는가 했더니 동글동글한 사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콩알 크기부터 좁쌀 크기 정도의 사리, 흑진주처럼 까맣기만 한 것과 유색을 띤 것까지 다양한 수백과의 사리를 연화대에서 오롯하게 거뒀습니다.

▲ 동글동글한 사리 ⓒ 임윤수


▲ 습한 유골과 사리를 다비장 영단에 모셨다 스님들이 석남사로 모시는 것으로 다비는 끝났습니다. ⓒ 임윤수


조심스럽게 거둔 유골, 정성스럽게 모신 사리를 미리 준비해 놓은 2개의 유골함에 모시지만 유골함이 턱 없이 모자랍니다. 모자라는 유골함 대신에 유골과 사리 뭉치를 한지에 싸 다비장에 차려놓는 영단으로 모십니다. 2개의 유골함과 한지로 싼 4개의 유골과 사리 모임이 상좌스님들의 품에 안겨 석남사로 옮겨지니 정무 큰스님의 다비식이 끝이 납니다. 

저녁 8시, 일련의 다비가 끝났습니다. 다비식 내내 누구보다도 가슴을 졸이던 현호씨의 근심도 끝났고, 탑돌이를 하듯 연화대 주변을 돌던 불자들의 발걸음도 끝났습니다. 정무 큰스님을 보내는 슬픔을 맑은 물(?) 몇 잔으로 달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뒤로 하며 서운산 계곡을 내려오지만 하늘에 걸린 반달이 쏟아내는 달빛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달빛을 따라가면 정무 큰스님이 임종게로 말씀하신 "내가 이 세상에 인연이 있어서 왔다가 정직하고 열심히 바르게 살다가니 도솔천 내원궁에서 함께 만나자"고 하신 도솔천 내원궁이 거기 일지도 모르지만 사바세계의 범부는 다만 죽음을 슬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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