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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인은 왜 그 절 뒷방에서 펑펑 울었을까?

시인 양문규 첫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펴내

등록|2011.10.06 16:14 수정|2011.10.06 16:14

시인 양문규그가 12년이 지난 그때 그 서러운 이야기를 담은 첫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을 펴냈다 ⓒ 이종찬


지난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깃발을 들 무렵, 신경림 시인이 민예총 실무를 맡기면서 첫 서울살이에 들어간 시인지망생이 있었다. 그가 지금 천태산 자락에 있는 은행나무를 껴안고 살고 있는 양문규 시인이다. 그는 그때 민예총에서 3년을 일했고, <한국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이 되었다. 그 뒤 열림원 기획위원을 거쳐 1995년부터 S문학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S문학사에 들어간 그날부터 곧바로 주식회사로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S문학사가 돈이 너무 없어 곧 문을 닫게 될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부터 입땀 발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뛰어 그해 주주 120여 명을 모았다. S문학사는 주주들이 낸 2억 원에 이르는 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공동체 문인주식회사를 차렸다.

양문규 시인은 이때부터 기획실장을 맡아 경영에 참여했다. S문학사는 주식회사가 된 뒤 '순풍에 돛단 듯' 잘 나아가다가 또 한번 어려움에 빠진다. 이때 IMF가 불어 닥친다. 회사에서는 이를 내세워 '구조조정'을 들먹이며 그에게 회사를 그만 두라는 말을 건넨다. 그는 이때 회사 편집위원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회사가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임금 없이 일할 것을 제안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가 울분과 슬픔만 가득 안고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다시 내려가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 그가 12년이 지난 뒤 그때 그 서러운 이야기를 담은 첫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을 펴냈다. 이 산문집에는 그가 겪은 서울살이와 낙향한 뒤 이곳저곳을 떠돌며 느꼈던 피멍든 가슴앓이가 가을바람처럼 서늘하게 스친다.    

"나를 비춘 그 산문들이 해진 나를 되찾게 해주었다"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지 만 12년이 훌쩍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고향의 농막, 천마산 중화사, 천태산 영국사, 기호리 옛집 등을 거쳐 2008년 따뜻한 봄날 오늘의 여여산방에 들었습니다. /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기쁨과 행복, 아픔과 상처가 늘 공존했습니다. 꿈과 희망으로 세상을 노래할 때에도 좌절과 절망은 있었으며, 아픔과 상처가 가슴을 저밀 때에도 기쁨과 행복은 찾아들었습니다." -'책 앞에' 몇 토막

양문규 시인이 펴낸 첫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시와에세이). 이 산문집에는 시인이 1999년 서울살이를 뒤로 하고 충북 영동으로 내려간 뒤 부대낀 세상살이가 화두처럼 박혀 있다. 시인은 이 산문을 지난 2001년부터 2005년까지 5년 동안 영동 천태산 영국사 뒷방지기로 살면서 썼다. 꽃이 피면 꽃이 핀다고 펑펑 울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펑펑 울면서.

이 책은 모두 2부에 산문 32편이 천태산(715m)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가 갈바람에 파르르 떨며 떨구는 은행잎처럼 노오란 울음을 흘리고 있다. '흰 소의 눈를 가지고 있다' '반딧불이가 난다' '쓰러진 자의 꿈' '기러기 울음만도 못한 시' '다시, 사랑을 위하여' '내 몸에는 시인이 살아 있다' '감나무의 추억' 등이 그 글들.

시인 양문규는 5일(수) 전화통화에서 "이번에 첫 산문집을 내게 됐다"라며 "이 산문은 솔직히 책으로 묶지 않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가슴에 담아간다고 스스로 다짐한 글"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 산문은 낙향한 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천태산 영국사 뒷방지기로 살 때 쓴 글"이라며 "그때 나는 마음이 움직이는 그 모습 그대로 그렸다"고 되짚었다.

그는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왜 산문에 매달리게 됐느냐?"는 물음에 "시도 많이 썼지만 서울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를 안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깊은 산 중에 나를 유폐시키다보니 지나간 날들에 나를 다시 한번 비춰보며 나를 다시 찾고 싶었다"라며 "나를 비춘 그 글들이 해진 나를 되찾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천태산 은행나무는 부처님이자 벗이며 시

시인 양문규 첫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이 산문집에는 그가 겪은 서울살이와 낙향한 뒤 이곳저곳을 떠돌며 느꼈던 피멍든 가슴앓이가 가을바람처럼 서늘하게 스친다. ⓒ 시와에세이

"바쁘게 뛰어다니던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스스로 고향 땅에 유배되었다. 고향 인근 천태산 영국사에서 불사(佛事)를 벌일 때 인부들 숙소로 쓰던 판잣집 방에 들었다. 이후 주지 스님과 함께 대나무들을 베어 잘라, 겉모습이 흉한 판잣집 외벽에 붙여 거처를 대나무집으로 바꾸었다." -248쪽

시인 양문규는 이때 마음을 이렇게 쓴다. "이 방에서 참 많이 울었네요. 꽃이 피면 핀다고, 눈이 오면 온다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해야 될 텐데 나가지는 못하고 문자만 수천 통 날렸을 겁니다"라고. 그는 "천태산 은행나무는 천년을 넘게 생의 중심을 잃지 않고 서 있다"라며 "나뭇등걸 속에 울음을 내장하고, 더 큰 울음을 키우고 있"다고 못 박았다.

그가 천태산 은행나무 곁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도 "더 큰 울음을 키우고" 있는 은행나무에게서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생명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마음을 "오늘도 그렇게 웁니다. / 나의 삶에도 큰 울음이 배어 있길 바랍니다... 먼 훗날 누군가도 은행나무 곁으로 다가서길" 바란다고 내비쳤다.

그는 그 은행나무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보듬고 키워 뭇 생명에게 삶의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는 자연 그대로의 부처, 너무도 큰 당신"이라고. 그렇다. 사람이 큰 어려움에 빠지면 무언가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시인 양문규가 기댄 곳은 은행나무였다. 따라서 천태산 은행나무는 시인 양문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은인이자 그를 쏘옥 빼닮은 분신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는 "천태산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은행나무가 있어 다행이었다"라며 "은행나무는 종교나 다름없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친구이자 시였다"라고 귀띔했다. 이는 곧 그 은행나무 때문에 서울살이에서 얻은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비울 수 있었으며, 그 '비움'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어느 세월 하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 없다"

"그때 나는 새삼 문학이라는 것과 작가라는 것, 문학의 진보와 운동, 실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닌데 하면서, 동료 문인들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지요... 그 뒤로는 주체할 수 없는 설움에 못 이겨 폭음으로 몇 개월을 지내다 다음해(1999년)에 낙향하였습니다. 첫째가 초등학교 5학년 열두 살, 둘째가 네 살 되던 해였습니다." -92~93쪽

시인 양문규는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내려간 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낮술도 깡으로 마시면서 거지처럼 농막에서 지낸다. 그래도 그에게 상처를 너무 깊이 입힌 서울살이는 계속 마음을 콕콕 찌르기만 한다. 그는 그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천마산 중화사를 거쳐 2001년에 영국사 뒷방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때 명지대 대학원(박사과정)에 다니면서도 한 서린 서울을 쳐다보지 않고 산다. 그가 이때 발표한 시에 그 쓰린 마음이 눈물을 찍어낸다. "오로지 하나의 집 위에 / 향그런 열매를 달던 꽃나무 // 모진 바람 몰아친다 / 저 밖의 바람 / 모스러진 꽃나무 모가지를 꺾고 / 그 커단 바윗덩이 우물을 메운다 // 집을 비운다".

그는 이 산문집 '책 앞에'에서 서울살이 10년과 영동살이 10년에 대해 "어느 세월 하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 없이 소중한 자산"이라고 썼다. 그는 "서울에서의 민예총, 열림원, S문학사 등은 삶의 외연을 넓히는 데 부족함이 없이 풍요로운 삶을 선사"했고, "영동에서의 농막에서부터 여여산방까지는 자연의 질서 위에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가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궁구하는 사유를 제공"했다고 되짚었다.

그가 이처럼 다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천태산 영국사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약 500살)였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천년 은행나무가 함께 했다"라며 "천태산 은행나무는 기쁨과 행복, 꿈과 희망, 고통과 분노, 좌절과 절망 등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함께 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은행나무가 참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가 해마다 은행나무 시제를 지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 양문규 첫 산문집 <너무나 큰 당신>에서 '너무나 큰 당신'은 서울살이에서 쓰러진 꿈을 다시 일으켜 세운 천태산 은행나무다. 그는 지금도 이 은행나무를 부처님처럼 품에 꼬옥 껴안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시를 쓴다. 따라서 이 산문집은 시인이 속내 깊숙이 꼭꼭 숨겨둔 삶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시인 양문규는 1960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1989년 <한국문학>에 '꽃들에 대하여'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가 있으며, 평론집으로는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를 펴냈다.

민족예술인총연합 총무국장, 열림원 기획위원, 실천문학사 기획실장 등을 맡았으며, 1999년부터 서울생활을 벗어나 고향 영동에 있는 농막, 중화사, 영국사를 거쳐 천태산 자락에 '여여산방'이라는 둥지를 틀고 있다. 지금 계간 <시에> 편집주간과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 사람들' 대표를 맡고 있다.
덧붙이는 글 <문학in>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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