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지켜온 순결, 그 신비로움을 훔쳐보다
합천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나를 돌아본 시간
▲ 합천들녘대장경축전으로 가는 길에 만난 합천들녘 ⓒ 정도길
"향후 100년간 이 목판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진본 목판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이 안내문은 과연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짐작이 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길게 늘어진, 좀체 줄어 들 줄 모르는 사람들의 행렬. 그 뒤에 서서, 애타게 기다렸다 다가선 끝에서의 만남. 기다림의 행복이 이런 것일까? 놀랍고 황홀했다. 흔히 보기 어렵고, 쉽게 대할 수 없는 경전, 대장경을 보았기에.
▲ 대장경천년축제합천 대장경천년축제 입구 ⓒ 정도길
지난 3일. 이런 귀중한 자료를 볼 것이라고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채, 합천 '2011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행사장을 찾았다. 약한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반야바라밀다심경'과 '대방광불화엄경' 두 개의 목판 장경. 이 목판은 세계에서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경판이다. 천 년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경판을 본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 아닐까. 안내원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진촬영이 금지돼 있다고, 경고성 목소리로 알린다. 그 옆엔 경호원도 감시에 열중이다. 할 수 없어 눈으로 도장을 찍었고, 마음으로 새기며, 머리로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 정바를 정. 무엇이 바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 정도길
대장경은 뭘까? 원래 불교 성전을 총칭하는 전통 용어는 삼장이다. 삼장이란 붓다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한 경장, 불교계의 실천규범과 계율을 정리한 율장, 후세의 불교 지식인들이 경장과 율장에 대해 해석해 주석하거나 해석한 논장을 아울러 일컫는다.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은 동아시아 한역 불교 경전의 집대성이자 대장경의 역사로, 판수가 정확히 8만1258장에 달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한역 대장 경판으로, 고려 고종 23~38년(1236~1251)에 걸쳐 간행되었다.
전시관마다 많은 인파가 줄을 서서 기다리며 관람에 열중이다. 박물관이나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힁허케 한 바퀴 둘러보고 지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 그런데 이곳은 나의 발길을 붙잡아 놓기에 충분했다. 평소 불교에 관한 관심이 높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되겠지만, 볼거리가 많았고 공부할 소재도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 이운행렬매주 토, 일, 공휴일 오후 3시부터 30분간 이운행렬 행사가 열린다. ⓒ 정도길
때 맞춰 야외에선 이운행렬 행사가 진행 중이다. 이런 행사를 본다는 것도 행운이다. 이운이란 불상이나 보살상을 옮기어 모시는 행사를 말한다. 사물놀이패가 한동안 흥을 돋우는 판을 벌이고, 오후 3시가 되자 행렬이 출발한다. 만장을 든 행렬이 앞장서고, 군사가 호위하며, 경판을 머리에 인 행렬이 뒤를 따른다. 경판을 지게에 진 보살, 소 등에 경판을 지게 한 소의 행렬도 계속 이어진다. 당시 대장경을 어떻게 옮겼는지 어느 정도 상상이 가고도 남는 모습이다.
▲ 합장우크라이나에서 왔다는 불자가 두 손 모아 합창한 채 이운행렬에 참가하고 있다. ⓒ 정도길
경판을 머리에 이고, 끈을 목에 묶어 떨어지지 않도록 한 후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걷는 보살. 행렬 사이에는 어린아이 보살도 끼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보살이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 외국인이다. 그녀는 우크라이나에서 3개월 전에 왔으며, 우연한 계기로 이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행사에 외국인이 참여했다는 게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많은 사진작가들이 사진촬영을 하느라 분주했을 정도였으니.
▲ 녹야전법상부처님 생애 중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사성제법을 설하시고 45년간 전법도생을 하시다. ⓒ 정도길
팔만대장경은 강화경의 대장경판당에 봉안되었다가, 고려 우왕 7년(1381) 이전, 혹은 조선 태조 7년(1398)경에 해인사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태조 7년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운반 과정에는 육로 이동과 해로 이동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운 좋게도 구경한 이운행렬 행사는 매주 토, 일, 공휴일에 오후 3시부터 30분간 열린다. 이런 행사를 보는 것도 오랜 추억으로 남을 것만 같다.
▲ 소원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명패 ⓒ 정도길
행사장 내 보리수 공연장으로 가는 길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다. 소원을 적은 명패를 달아 놓은 터널. 평범한 소시민의 소원을 훔쳐봤다. 진지함도 묻어나고, 어떤 것은 장난기도 배여 있다.
"나중에 커서 가수되게 해 주세요." "인간이 되자!" "수능대박"
"항상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세요."
"마음의 평정을 얻어 밝게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바로 그 위대한 '지혜'이다. 예를 갖추라."
사람 이름이 지혜인지, 지혜로운 단어 지혜인지, 위대함에 예를 갖추리. 그래도 소원은 소원이라는 생각에, 나는 '여기에 있는 이 소원 모두 꼭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라고 적었다.
▲ 생각천천히 걸으가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 ⓒ 정도길
이런 곳 여행은 단체여행보다는 혼자서 하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이다. 단체여행을 하다보면 시간에 맞춰야 하고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형식적인 관람으로 흐를 수밖에 없기 때문. 내겐 흥밋거리도 많았고, 공부거리도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듯, 희미한 빛의 조명만을 비추는 정신문화관. 어둠은 공포를 만들기도 하지만,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역할도 한다. 이곳에 새겨 놓은 글귀는 내가 누구인지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마음 속 복잡한 생각을 내려 놓으셨나요?
"나는 누구인가?"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 생각나는 누구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 ⓒ 정도길
이 밖에도 관심을 끄는 것이 많다. 대장경천년관 홀로큐브도 볼거리다. 국내에서 이런 전시실을 갖춘 곳은 별로 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대장경 전시실의 원형수장대는 동판 팔만대장경을 수장하고 이를 전시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동판 팔만대장경의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 토, 일, 공휴일 오후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운행렬 행사도 볼 수 있다.
▲ 대장경제작과정대장경제작과정. 바닷물에서 2년 바람결에 나무를 다스리는 시간. ⓒ 정도길
대장경축전은 지식문명관(활자로 연 신문명), 정신문화관(마음으로 부는 바람), 대장경천년관(덜어냄에 관한 지혜), 세계교류관(세계 예술인의 지혜), 세계시민관(하나를 위한 소통), 그리고 상징조형물(천년 지혜의 나무)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시간적 여유로움을 가진다면, 여행자에게 특별한 추억을 안겨 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불자라면 더더욱 좋은 공부의 마당이 되리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거제지역신문인 거제타임즈와 뉴스앤거제에도 송부합니다. 이 행사는 11월 6일까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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