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궁에 살면 지나간 권세가 다시 돌아오느냐
[정치풍자소설 '대권무림' 38] 에피소드4 - 묵언의 바다, 백성들의 소리 없는 외침
'칠종칠금'의 고사는 모두 알 것이다. 제갈량이 적장 맹획을 그 특유의 계책으로 사로잡고도 오랑캐(중국은 '중화'라는 믿음이 있다. 즉 자신들만이 세상의 주인이요, 한족 이외는 다 오랑캐라는)들의 존경을 받는 그를 죽이는 것보다는 살려서 교화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놓아준 고사를 후세는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맹획은 자신을 살려 준 제갈량의 계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촉한으로 쳐들어온다. 승상의 곁에 있던 촉한의 모든 장수들은 대부분 그를 죽이라 간하지만, 제갈량은 어찌 된 일인지 다시 그를 놓아준다. 그리하여 또 다시 살아 돌아간 맹획은 군사를 정비하여 다시 쳐들어오고, 제갈량은 다시 그를 살려 보내기를 일곱 차례나 반복했다는 나관중의 소설 속 얘기다.
일곱 번이나 잡히고도 무사하게 목숨을 보전한 오랑캐의 용감한 장수 맹획은 드디어 제갈량의 한 수 높은 계책과 인내에 탄복,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며 촉한에 진심 어린 항복을 한다는 얘기인데, 이처럼 권모술수에도 진심은 서려 있고, 리더의 품격이 곧 사해(四海)를 움직일 수도 있다는 진리다.
"나를 죽여라."
맹획이 말하자 제갈량은 책사특유의 빈정대는 듯한, 네 생각 따위는 이미 살아 있는 관음보살인 내 손 안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를 죽이면 내 칼 끝에 묻는 것은 붉은 핏방울뿐이겠지만, 너를 살리면 촉한의 영토가 늘고 너의 백성이 천년 세세 융성할 것이다. 너라면 어떤 길을 택하겠느냐?"
제갈량은 진수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에는 유비를 도와 천하를 삼분한 출중한 지략가 정도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촉한의 승상이 되어 유비와 더불어 천하를 경영하고, 아들 유선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하다 사마의와의 전투 도중 숨을 거둔 존상으로. 그러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통해 장량과 더불어 천하의 지략가로 환생한 전대미문의 책사가 되어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달아나게 했다(死孔明走生仲達)'는 고사로 후대가 존경하는 모든 지략가들의 사표, 즉 선생이 되었다.
형주로 쫓겨 간 유비가 제갈량을 방문했을 때, 동생인 제갈균을 먼저 보게 되는데 형제가 닮았는지, 아니면 혼자 사는 줄 알았는지 착각하여 두 손을 덥석 잡는데, 동생의 말뽄새 또한 형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겠다. 제갈량에게는 동생뿐 아니라 형인 제갈근도 있었는데, 삼형제의 지략이 그야말로 난형난제 유비나 휘하 장수들이 헷갈렸겠다.
하여간에 유비가 제갈균에 이끌려 제갈량을 만나는 자리에는 아마 재갈근과 제갈균, 두 형제가 배석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비의 휘하에는 중국 민중의 절대 신(관성제군)인 운장 관우와 익덕 장비는 불만이 있었겠지만 당시 두 사람은 은자를 찾아가는 유비에 반대파였으니 제갈량에게 무척이나 불만이 많았겠다. 그러나 형이 가는 길에 아우들이 어쩔꼬, 따라나서서 수행했다 한다.
경륜 읽기가 다 끝난 후, 유비가 허벅지를 때리고 제갈량도 두 손을 모아 충성을 맹세하고 '천하삼분지계'를 받아들인 유비를 따라 나설 때 제갈량이 서둘러 말했다나.
"본초, 와룡에게는 삼형제가 있습지요. 이곳 형주의 아름다운 정토는 나와 우리 형제들의 지혜와 지략을 한층 고양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에 법도와 패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었지요.
내 형제들의 지모는 나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강호의 그 어떤 비바람도 숨죽이게 할 수 있습니다. 현덕 제후께서 나와 더불어 우리 형제들의 은거지략에서 발산되는 향기 높은 지혜의 그늘을 덮으신다면 천하는 공의 것입니다."
하여 그들은 유비가 내어 준 우차를 타고 유비의 헐벗은 성으로 같이 가게 된다. 그러나 유비는 애초 은거협사하며 세상을 넘보던 와룡(臥龍)인 제갈량에게만 마음이 있었던 듯, 제갈근과 제갈균은 홀대했나 보다. 제갈량의 아우인 제갈균은 인내의 쓴 약을 잘 먹고 홀대를 이겨내어 벼슬이 나중에 장수교위까지 이르게 되지만, 참다못한 제갈근은 결국 오나라로 가 손권을 섬겨 제갈량에 못지않은 업적을 손권에게 안겨주게 되니 말이다.
손무를 알아본 오자서에 의해 천하를 경영한 합려나, 조조가 탐낸 책사 서서에 의해 제갈량을 알게 된 유비를 중국의 역사는 담담하게 기술하지만 제아무리 명군이라도 한계는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단어가 없지만, 만약 합려가 오자서의 눈과 손무의 머리를 이고 강호에 나서고, 유비가 제갈량의 뜻대로 제갈근을 기용하여 수하의 용맹한 장수들과 더불어 책략의 완성도를 높여 그들이 흔히 말하는 천하에 도전했더라면, 와신상담이라는 고사는 없었을 것이고 춘추시대의 종언은 더 빨라졌을지도 모르며, 유비는 아마 삼국 시대의 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과거가 생기기 전의 인재등용 방식은 엽관이나 경륜 읽기, 그리고 명망가의 천거에 많은 부분 좌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도 지금에도 하늘의 뜻에 따라 탄생하는 지도자의 곁에는 참으로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즐비하다. 물론 그들 모두는 나름의 인격과 지식, 지혜로 단련된 정치철학을 가지고 지도자의 경영 패러다임에 대로는 동참하고, 때로는 조언하며 나라의 반석을 세웠고, 또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 나라 어느 조직 패거리의 보스형 지도자의 말처럼 안 되면 '머리는 빌리면 된다.' 그러나 성공한 지도자라고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걸 보면 머리를 빌리는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일인가를 잘 알 것도 같다.
'아방궁 같은'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태왕들의 퇴임 후 사저가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대한민주무림대국의 무림정부 수립이 60년 조금 넘었고, 그 사이 에 태왕들은 10명이 거쳐 갔으니, 그들의 퇴임 후 사저가 다 '아방궁 같은'인 것인가? 무림대국을 건국한 태왕은 자신이 신뢰하고 단련한 절대 비권인 '민주주의권'을 따르며 스스로 하와이소탐국으로 망명했고, 나라를 부흥시킨 철권태왕은 부하무상의 총성에 졸(卒)했으니 아방궁에 살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태왕 쟁탈전으로 쫓겨 난 두 태왕은 검소하여 사저로 돌아갔으니, 남는 것은 여섯 분의 태왕님. 하늘이 점지하여 나라를 다스리신 태왕에 대한 예의는 당연하지만 저들 스스로 중화라 믿는 허풍의 공력이 하늘을 지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이 땅에서 '아방궁 같은'이라는 비유를 들이 댈 퇴직한 태왕의 자리는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같은 다른 나라의 일이다. 작금 명박경술사 태왕의 경솔한 처사에 흉흉한 백성들의 민심이 펄펄 끓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
칠종칠금으로 오랑캐를 감화시킨 제갈량의 지략과 같은 참모가 유비의 눈과 같은 지도자를 모시고 나아가는 브레인스크린으로 세상을 수용하고, 지혜를 창조하는 선량이 그리운 건 모든 백성들의 희망이다. 죤 그레이의 '화성남, 금성녀'에게 필요한 이해와 관용으로,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가 지적하는 창조적인 삶의 원천으로 불교의 법륜(法輪)을 깨닫는다면 성겁(成劫)을 사는 오백나한이 되어 도솔천에 기거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터이니, 까짓 이승에서의 아방궁이 뭐 대수겠는가?
원조모모 경원미모령과 무념무상 원순희망제작창이 연일 '백성의 소리통'과 '생동화상 화면빨'에 출연하여 단기간에 섭렵한 정책 무예의 깊은 시름을 한 바탕 드러내 놓는 사이, 그들을 보좌하는 최대도방 한나라도방의 맹주와 민주공방의 맹주 또한 주야로 분주하였다. 한나라방의 사활이야 도방의 인기도 급락과 비견하여 마땅한 처사였고 도대체 무림의 공방으로서 가르치려는 무도의 본질이 희미해진 민주도방의 분발도 눈물겨웠다.
그러나 역시 가장 화면빨과 소리통의 주목을 받는 것은 서울특별공방의 맹주로 부상하려는 형조 출신의 미모령도, 시민무림의 절대 강자 출신의 희망제작창도, 두 사람의 이력과 재산을 둘러 싼 케케묵은 갈등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기인 복지권을 수용한 도방의 희망대로 미모령의 손을 잡고 신발끈을 동여맨 근혜여랑위와 관악골 학승들의 융합을 이루고 융합과학의 참된 무림의 선진화를 앞당기려는 철수바이러스공에게 희망제작창이 '싸랑해'를 외치는 날이 언제인가였다. 그렇게 서울특별공국 비상맹주선출비무대회의 결전일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맹획은 자신을 살려 준 제갈량의 계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촉한으로 쳐들어온다. 승상의 곁에 있던 촉한의 모든 장수들은 대부분 그를 죽이라 간하지만, 제갈량은 어찌 된 일인지 다시 그를 놓아준다. 그리하여 또 다시 살아 돌아간 맹획은 군사를 정비하여 다시 쳐들어오고, 제갈량은 다시 그를 살려 보내기를 일곱 차례나 반복했다는 나관중의 소설 속 얘기다.
"나를 죽여라."
맹획이 말하자 제갈량은 책사특유의 빈정대는 듯한, 네 생각 따위는 이미 살아 있는 관음보살인 내 손 안에 다소곳이 놓여 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를 죽이면 내 칼 끝에 묻는 것은 붉은 핏방울뿐이겠지만, 너를 살리면 촉한의 영토가 늘고 너의 백성이 천년 세세 융성할 것이다. 너라면 어떤 길을 택하겠느냐?"
제갈량은 진수가 저술한 정사 <삼국지>에는 유비를 도와 천하를 삼분한 출중한 지략가 정도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촉한의 승상이 되어 유비와 더불어 천하를 경영하고, 아들 유선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하다 사마의와의 전투 도중 숨을 거둔 존상으로. 그러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통해 장량과 더불어 천하의 지략가로 환생한 전대미문의 책사가 되어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달아나게 했다(死孔明走生仲達)'는 고사로 후대가 존경하는 모든 지략가들의 사표, 즉 선생이 되었다.
형주로 쫓겨 간 유비가 제갈량을 방문했을 때, 동생인 제갈균을 먼저 보게 되는데 형제가 닮았는지, 아니면 혼자 사는 줄 알았는지 착각하여 두 손을 덥석 잡는데, 동생의 말뽄새 또한 형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겠다. 제갈량에게는 동생뿐 아니라 형인 제갈근도 있었는데, 삼형제의 지략이 그야말로 난형난제 유비나 휘하 장수들이 헷갈렸겠다.
하여간에 유비가 제갈균에 이끌려 제갈량을 만나는 자리에는 아마 재갈근과 제갈균, 두 형제가 배석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비의 휘하에는 중국 민중의 절대 신(관성제군)인 운장 관우와 익덕 장비는 불만이 있었겠지만 당시 두 사람은 은자를 찾아가는 유비에 반대파였으니 제갈량에게 무척이나 불만이 많았겠다. 그러나 형이 가는 길에 아우들이 어쩔꼬, 따라나서서 수행했다 한다.
경륜 읽기가 다 끝난 후, 유비가 허벅지를 때리고 제갈량도 두 손을 모아 충성을 맹세하고 '천하삼분지계'를 받아들인 유비를 따라 나설 때 제갈량이 서둘러 말했다나.
"본초, 와룡에게는 삼형제가 있습지요. 이곳 형주의 아름다운 정토는 나와 우리 형제들의 지혜와 지략을 한층 고양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에 법도와 패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었지요.
내 형제들의 지모는 나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강호의 그 어떤 비바람도 숨죽이게 할 수 있습니다. 현덕 제후께서 나와 더불어 우리 형제들의 은거지략에서 발산되는 향기 높은 지혜의 그늘을 덮으신다면 천하는 공의 것입니다."
하여 그들은 유비가 내어 준 우차를 타고 유비의 헐벗은 성으로 같이 가게 된다. 그러나 유비는 애초 은거협사하며 세상을 넘보던 와룡(臥龍)인 제갈량에게만 마음이 있었던 듯, 제갈근과 제갈균은 홀대했나 보다. 제갈량의 아우인 제갈균은 인내의 쓴 약을 잘 먹고 홀대를 이겨내어 벼슬이 나중에 장수교위까지 이르게 되지만, 참다못한 제갈근은 결국 오나라로 가 손권을 섬겨 제갈량에 못지않은 업적을 손권에게 안겨주게 되니 말이다.
손무를 알아본 오자서에 의해 천하를 경영한 합려나, 조조가 탐낸 책사 서서에 의해 제갈량을 알게 된 유비를 중국의 역사는 담담하게 기술하지만 제아무리 명군이라도 한계는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단어가 없지만, 만약 합려가 오자서의 눈과 손무의 머리를 이고 강호에 나서고, 유비가 제갈량의 뜻대로 제갈근을 기용하여 수하의 용맹한 장수들과 더불어 책략의 완성도를 높여 그들이 흔히 말하는 천하에 도전했더라면, 와신상담이라는 고사는 없었을 것이고 춘추시대의 종언은 더 빨라졌을지도 모르며, 유비는 아마 삼국 시대의 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과거가 생기기 전의 인재등용 방식은 엽관이나 경륜 읽기, 그리고 명망가의 천거에 많은 부분 좌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도 지금에도 하늘의 뜻에 따라 탄생하는 지도자의 곁에는 참으로 무수히 많은 인재들이 즐비하다. 물론 그들 모두는 나름의 인격과 지식, 지혜로 단련된 정치철학을 가지고 지도자의 경영 패러다임에 대로는 동참하고, 때로는 조언하며 나라의 반석을 세웠고, 또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 나라 어느 조직 패거리의 보스형 지도자의 말처럼 안 되면 '머리는 빌리면 된다.' 그러나 성공한 지도자라고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걸 보면 머리를 빌리는 것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일인가를 잘 알 것도 같다.
'아방궁 같은'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태왕들의 퇴임 후 사저가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대한민주무림대국의 무림정부 수립이 60년 조금 넘었고, 그 사이 에 태왕들은 10명이 거쳐 갔으니, 그들의 퇴임 후 사저가 다 '아방궁 같은'인 것인가? 무림대국을 건국한 태왕은 자신이 신뢰하고 단련한 절대 비권인 '민주주의권'을 따르며 스스로 하와이소탐국으로 망명했고, 나라를 부흥시킨 철권태왕은 부하무상의 총성에 졸(卒)했으니 아방궁에 살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태왕 쟁탈전으로 쫓겨 난 두 태왕은 검소하여 사저로 돌아갔으니, 남는 것은 여섯 분의 태왕님. 하늘이 점지하여 나라를 다스리신 태왕에 대한 예의는 당연하지만 저들 스스로 중화라 믿는 허풍의 공력이 하늘을 지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이 땅에서 '아방궁 같은'이라는 비유를 들이 댈 퇴직한 태왕의 자리는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같은 다른 나라의 일이다. 작금 명박경술사 태왕의 경솔한 처사에 흉흉한 백성들의 민심이 펄펄 끓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
칠종칠금으로 오랑캐를 감화시킨 제갈량의 지략과 같은 참모가 유비의 눈과 같은 지도자를 모시고 나아가는 브레인스크린으로 세상을 수용하고, 지혜를 창조하는 선량이 그리운 건 모든 백성들의 희망이다. 죤 그레이의 '화성남, 금성녀'에게 필요한 이해와 관용으로,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가 지적하는 창조적인 삶의 원천으로 불교의 법륜(法輪)을 깨닫는다면 성겁(成劫)을 사는 오백나한이 되어 도솔천에 기거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터이니, 까짓 이승에서의 아방궁이 뭐 대수겠는가?
원조모모 경원미모령과 무념무상 원순희망제작창이 연일 '백성의 소리통'과 '생동화상 화면빨'에 출연하여 단기간에 섭렵한 정책 무예의 깊은 시름을 한 바탕 드러내 놓는 사이, 그들을 보좌하는 최대도방 한나라도방의 맹주와 민주공방의 맹주 또한 주야로 분주하였다. 한나라방의 사활이야 도방의 인기도 급락과 비견하여 마땅한 처사였고 도대체 무림의 공방으로서 가르치려는 무도의 본질이 희미해진 민주도방의 분발도 눈물겨웠다.
그러나 역시 가장 화면빨과 소리통의 주목을 받는 것은 서울특별공방의 맹주로 부상하려는 형조 출신의 미모령도, 시민무림의 절대 강자 출신의 희망제작창도, 두 사람의 이력과 재산을 둘러 싼 케케묵은 갈등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기인 복지권을 수용한 도방의 희망대로 미모령의 손을 잡고 신발끈을 동여맨 근혜여랑위와 관악골 학승들의 융합을 이루고 융합과학의 참된 무림의 선진화를 앞당기려는 철수바이러스공에게 희망제작창이 '싸랑해'를 외치는 날이 언제인가였다. 그렇게 서울특별공국 비상맹주선출비무대회의 결전일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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