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대중', 폭력으로 건드리면... 폭발한다
[민교협 릴레이 기고] '1%에 맞선 99%의 투쟁, 점거하라' 운동, 어디로?
▲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가 지난 15일 오후 "우리는 99%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뉴욕 맨해튼 번화가인 타임스퀘어까지 행진했다. ⓒ 최경준
스페인의 텐트 시위 등에 영향을 받아 지난달부터 미국 뉴욕 리버티 플라자 공원(주코티 공원)에서 시작된 '1%에 맞선 99%의 투쟁, 점거하라' 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째를 맞은 10월 15일, 세계 80여 개국 900여 개 도시에서 이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이날 서울 여러 곳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이처럼 이 운동이 한 달 만에 지구적 연대투쟁으로 발전하게 된 이유와 이 운동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운동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는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체제는 그 전도를 알 수 없는 구조적 대위기의 늪 속에 깊숙이 빠져 있다. 이 위기는 아마도 미국 헤게모니 하에서 조직된 전후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최종적 위기로 규정될 만하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 촉발시킨 세계금융위기가 이 최종적 위기의 제1 국면이었다면, 이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개입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국가재정위기라는 새로운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이 위기의 제2 국면을 표시한다. 국가재정위기는 국가개입에 의해 일시적으로 진정되었던 금융위기를 재차 불러일으키고 있고, 이는 다시 세계경제를 한층 더 극단적인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런데 시장도, 국가도 실패자로 낙인 찍은 이 위기의 밑바닥에는 자본의 엄청난 과잉축적이라는 특정형태의 자본주의체제의 사활에 관련되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과잉축적이란 자본이 이젠 더 이상 적합한 투자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산업의 전 부문에 이미 너무 많이 과잉투자되어 있고, 또 이 상태가 야기하는 낮은 이윤율로 인해 아무리 팔아도 적합한 이윤을 창출하기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음을 가리킨다.
1980년대에 들어와 세계자본주의의 운동을 주도하는 초국적 거대자본들의 주된 자본축적 방식이 '산업적 축적'에서 '금융적 축적'으로 변모하고, 또 이를 통해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지배체제'로 변모한 것은 사실은 산업부분의 이러한 과잉축적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융적 축적에의 의존은 그러나 산업자본의 과잉축적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오늘날의 상황은 그간의 국가개입으로 회생된 금융적 축적이 다시 파탄에 직면하고 있지만, 자본축적 방식을 금융적 축적에서 다시 산업적 축적으로 돌이킬 능력을 자본주의가 더 이상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점에서 이 위기의 자본주의적 해결책은 대공황의 발발과 대규모의 전쟁 수행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대공황의 발발은 자본 자체도 대대적인 폐기와 대규모적인 평가 절하의 피해를 입어야 하고, 전 세계 인민을 급속하게 자본주의 타도로 내몰 가능성을 높이는, 자본에게도 피할 수 있으면 가능한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그러나 시장도, 국가도 실패한 상황에서 늦든 빠르든 대공황의 발발은 불가피한 것 같다. 실제로 우리는 오늘날 세계자본주의가 대공황의 수렁 속으로 시나브로 빠져들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한편, 여러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수행은 전쟁을 발발시킨 나라 자체도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지 모르는 도박이다. 인류는 오늘날 미국이 자국이 처한 자본의 과잉축적위기 해소에 기여할 만한, 중국 같은 대국을 대상으로 하는 핵전쟁을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공격받은 나라가 미국에게 보복을 가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상태를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대중반란... 대중혁명의 시대이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지배체제의 수립은 창출된 부를 미증유의 수준에서 금융자본과 대기업 및 소수 불로소득층에게로 집중시키고, 비정규직과 실업층의 급증, 소득양극화와 빈곤의 세계화 등을 가져왔다.
그런데 오늘날 금융위기와 이를 이은 국가재정위기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위기부담이 더욱 대규모적으로 대중에게로 전가되고 있다. '20 대 80 사회'가 '1 대 99 사회'로 변했다는 지적은 이런 사태진전을 가리킨다. 이를 배경으로 대중반란·대중혁명의 물결이 지구를 덮치기 시작했다. 이 시대는 자본의 과잉축적 위기가 그 최종적 폭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시대인 동시에 대중반란·대중혁명의 시대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한 젊은 노점상이 분신자살한 것이 계기가 된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이 대중반란·대중혁명의 시대의 문을 열어 젖혔다. 이 혁명이 불러일으킨 중동·아프리카 혁명은 올해 2월 이집트혁명에서 그 잠정적 정점에 도달했었다. 이어 대중반란의 물결은(중국과 북한으로 확산되기를 바란 보수지배층의 기대를 거스르면서) 국가재정위기에 빠져들기 시작한 그리스, 스페인, 영국 등 유럽국가들과 칠레, 캐나다 등 아메리카 대륙으로 밀려들기 시작했고, 최종적으로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심장 뉴욕의 월가를 덮쳤다.
'월가를 점거하라' 시위는 대중반란·대중혁명이 제2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제1 국면이 세계자본주의의 변방에서 시작된 반란·혁명이 중심부로 확산되어 간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면, 현재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제2 국면은 미국에서 시작된 운동이 유럽대륙과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운동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지배체제가 지구적 수준에서 대중에게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 재스민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고 있는 운동이다. 어떤 이들은 이 시대의 반란·혁명이 68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젊은 층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고, 자발적인 대중투쟁이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일리가 없는 견해가 아니다. 그러나 68혁명은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상승기에 일어난 혁명이고, 선진국들에 한정된 반권위주의 혁명이라는 성격을 기본적으로 지녔었다.
이와는 달리 이 시대의 반란·혁명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최종적 파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기에 일어나고 있고, 세계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발원한 운동이 중심부로 향하고, 중심부의 운동이 다시 주변부의 반란·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운동이다. 나아가 이 시대의 반란·혁명은 주변부의 반민주적 정치체제 하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들과 겹치고 있지만 어디서나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반란·혁명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점거운동의 특징은?
▲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에 분노하면서 시작된 미 뉴욕 '월스트리트 점령(Occupy Wall Street)' 운동이 조직력을 갖춘 노조와 시민단체 등의 가세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지난 5일(현지 시간) 오후 로어 맨해튼 폴리스퀘어에 모인 1만5000여 명의 시위대. ⓒ 최경준
대중반란·대중혁명의 제2 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는 '1%에 맞선 99%의 투쟁, 점거하라' 운동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이 운동의 제1의 특징은 오늘날 세계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층이라 할 만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가, 특히 프레카리아트에 속한 젊은이층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의 피해를 입고 있는 사회 각계각층의 '워킹푸어들'이 이 운동에 대거 합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카리아트와 워킹푸어들은 노동유연화와 사회양극화를 강제하는 신유주의적 자본축적과정 자체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둘째, 프레카리아트가 주축을 이루고 워킹푸어들이 합류하고 있는 이 '점거운동'은 그간 자신이 처한 구조적 압박을 개인의 힘으로는 더 이상 타개해 나갈 수 없음을 인지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개시한 운동이며, 광장에서의 만남과 토론을 통해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면서 모두가 사회적으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존재임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자, 또 이에 기반을 두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들이 공감하는 투쟁의 과제를 함께 찾고, 함께 투쟁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에서는 시위 자체보다 시위에 앞서 행해지는 광장에서의 만남과 참여자들의 직접민주주의적 토론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이 운동은 원자적 개인들을 사회적 개인으로, 수동적 존재를 능동적 존재로, 절망의 늪에 빠진 나약한 존재들을 구조적 악에 대항하는 수많은 가이 포커스(Guy Fawkes)들'로 전환시키는 운동이고, 공감이 만들어내는 공동의 힘으로 구조적 힘에 맞서는 운동이다. 프레카리아트와 워킹푸어들의 자기주체화 과정이 이 운동의 진정한 핵심이다.
셋째, 오늘날 제도정당들은 대부분 어디서나 밑으로부터의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에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회당이 집권하고 있는 그리스의 사례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다시피 좌파정당들조차 대부분 위기부담을 대중에게 전가시키는 자본의 반동적 시도의 공모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정세 속에서 현 시기의 점거운동은 정당이나 노조에 의해 위로부터 동원된 대중이 아니라, 그런 시도들에 분노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대중이 주축을 이루는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운동에서는 대중의 자발적이자 직접민주주의적인, 비제도적 실천이 주된 동력을 제공해주고 있고, 제도권 정당이나 노조와 같은 기존의 조직으로써는 조직화되기 어려운 대중의 참여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운동은 대의제 민주주의와 제도정치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 운동은 제도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추후 자신도 일정하게 제도적 운동으로 전화시켜 나갔겠지만, 주되게는 제도화의 용기(容器)에 담기에는 그 용기가 너무나 작은 대중의 절실한 염원들을 실현시키기 위한 비제도적 투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광장민주주의, 점거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대중 자신의 직접적인 자기정치조직이라 할 수 있는 지역 총회와 지역 평의회와 같은 자기조직화의 길로 나아가면서 제도정치에 압박을 가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넷째, 이처럼 점거운동은 정치로부터 소외되었던 대중 자신이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대중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실천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실천의 진정한 힘은 그것이 평화적 운동인가 아닌가, 합법운동인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평화적 운동으로 전개하되 언제든지 법을 넘어설 수 있는 위력적인 참다운 대중정치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 운동을 합법운동의 틀 안에 가두려는 시도들이 생겨날 수 있고, 역으로 올해 영국런던 빈민가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대중폭동이 점거운동을 대체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합법운동의 덫에 걸린 운동은 체제에 타격을 주기에는 너무 순치된 운동이고, 폭동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운동이라기보다는 절망의 몸부림 그 자체일 따름이다. 이와는 달리 대중의 수평적인 만남과 직접민주주의적인 토론을 통해 대중의 감성적 공감과 이성적 판단들이 상승작용 하는 이 점거운동의 주된 운동형태는 법을 넘어서는 평화적 대중운동이지 않을 수 없다. 지배층이 이런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한다면, 이는 대중의 분노를 더욱 폭발시키고,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스스로 단축시키는 결과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점거운동, 어디로?
'1%에 맞선 99%의 투쟁, 점거하라' 운동,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과잉축적위기의 자본주의적 타개책으로 성립되었지만 이제 그 수명을 다하는 있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지배체제에 대한 대중의 반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운동은 밀물이 밀려왔다가 빠지고 다시 밀려오는 방식으로 밀려오는 것과 같이 일시적으로 잠잠해 질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보면 지역적으로 더욱 확산되고 저변과 외연을 지속적으로 넓혀나가는 운동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월가 점거운동은 끝날 수는 있어도 점거운동 자체는 지구적으로 확산될 것이고, 한 곳이 끝나면 다른 곳에서 이어받고, 이어 받는 곳의 운동이 다시 정지된 곳의 운동을 재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다가 다시 하나로 합류하는 운동으로 전개될 것임이 틀림없다. 인류의 압도적 다수가 처한 오늘날의 현실이 이 운동을 일시적인 운동으로 끝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점거운동 자체가 이 현실에 대한 대중의 자기각성과정을 대규모적으로 진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들이 제출하는 요구들은 다기다양하다. 그러나 그 요구들에 담긴 기본적인 염원은 (자본주의의 극복의 요구로 전화할 잠재력을 지닌)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지배체체로부터의 해방이다. 물론 이 운동이 지도자 없는 대중의 직접민주주의적 운동이므로 현실변혁적인 적합한 대중적 구호 아래 일사분란하게 전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운동은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대중은 스스로 운동과정에서 자신의 요구들을 보다 보편적인 요구들로 만들어 나가고, 이런 보편적인 요구들을 실현시킬 새로운 정치적 형태들을 끊임없이 창출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구조적 맥락과 운동의 주체 측면과 관련시켜 본다면, 대중의 요구들은 크게 보면 자본주의 극복의 지향성이 담긴 신자유주의반대로 수렴되고, 정치적으로는 대중의 의한 정치의 직접적인 전유와 직접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운동으로 발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좌파정당의 역할은 무엇보다 이 과정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촉진시키는 데에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지배층이 이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양보책들을 강구할 가능성이 없지 않고, 자본주의의 위기를 구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운동의 급진화를 막기 위한 각종 개혁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제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과잉축적위기가 만들어내는 대중의 삶의 위기가 깊어 질대로 깊어진 상황 속에서 보다 급진적인 변혁을 위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는 개혁책이 아니라. 이반하는 대중들을 체제에 '재통합'하기 위해 제시되는 모든 개혁책들은 미봉책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지배층의 주된 대응방식 역시 양보책보다는 반동적 배제책의 강구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다시 점거운동의 급진화를 한층 더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현재의 점거운동은 광장점거운동에서 더 나아가 공장점거운동, 직장점거운동, 최종적으로는 권력점거운동 등으로 무한히 발전해 나갈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대중이 자본의 공세에 수동적으로 밀리기만 하는 상태를 끝장내고, 자본운동이 만들어내는 노동의 위기 등을 점거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형태로 돌파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적 진출이 눈부시게 이뤄지는 시대가 개막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적 진출, 이는 대중의 수동화에 기초해 있는 대의정치와 제도정치가 자본운동이 대중의 삶의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태를 막지 못하고 있는 데에 대한 대중 자신의 심판이다. 또한 점거운동은 우리에게 역사를 진정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은 궁극적으로 대중 자신에게 있음을 가르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김세균 기자는 서울대 정치학 교수입니다. 이 글은 <참세상>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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