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용돈 백만 원씩..."살다 보니 이런 날도"
포도 수확을 마치고...1년 농사가 남긴 아름다운 기억들
근 한 달에 걸친 포도 수확의 대장정이 끝났다. 아직 최종 결산 등의 마무리는 남았지만 지난 1년간의 수고와 땀이 결실로 돌아오는 시간들이다.
올해는 주 생계 농사인 포도 농사가 한 필지 700평에서 두 필지 1700평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물론 임대한 밭이다. 과연 나와 아내의 체력과 농사 경력으로 해낼 수 있을 지 걱정도 됐지만 귀농 5년차의 목표인 경제자립을 위해 부딪쳐보기로 결심했다.
극심히도 추웠던 올해 초, 순 정리 작업부터 시작해 가지 정리, 약 쳐주기, 알 솎기, 봉지 씌우기, 풀 베기 등 1700평 규모의 포도 작업은 군대생활 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힘겨운 노역으로 다가왔다.
폭우 속에서도 강행해야 했던 '알 솎기의 추억'
무엇보다 가장 힘든 기억은 제한된 시간 안에 해야 하는 알 솎기였다. 포도 농사 중 가장 중요하다는 알 솎기는 장마가 한창일 때 끝내야 봉지를 씌우고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놉(일당 받고 일하는 것)으로 쓸 인력들은 이미 기존에 농사짓는 주민들과 전속(?) 계약이 돼 있어 우리 같은 귀농자들은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 솎기는 처음에 달리는 포도 알 100~200알을 평균 70~80알로 줄여주는 일이다. 한 송이 한 송이 사람의 손으로 알을 솎아주어야 나중에 보기 좋은 모양의 크기로 열매를 맺기에, 급하다고 대충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도 겨우 한 골 정도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데 그런 골이 약 50여 개가 되었다. 도저히 우리 부부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지만 닥치는 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비는 일손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전국에 폭우가 쏟아지던 유월의 어느 날, 우비 속으로 파고드는 빗물과 한기를 참아가며 알 솎기를 하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엊그제 하루 동안 일을 도와 준 귀농선배였다.
"비 오는데 지금 뭐하나?"
"포도밭에서 알 솎기 하고 있어요"
"아이구,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일을 한다고?"
"비가 와도 해야지요. 시간도 없는데…."
다음 날 아침, 그 선배는 "비 맞고 일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도와주러 왔다"며 포도밭에 나타났다. 우리 부부에겐 정말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마침 올해 안식년 비슷하게 한 해 농사를 쉬고 있는 형편이기에 부담 없이 도와준다는 말에 너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선배 부부와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사람을 약간 써서 겨우 봉지작업까지 마치고 나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내게 감동적으로 도움을 준 귀농선배는 내가 쥐어준 감사의 성의도 할 수 없이 받더니, 그 돈의 일부로 내게 통기타 한 대를 선물해주었다. 30년 된 '맛이 간' 기타를 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또 한 번 감동을 먹고 말았다.
부모님이 도와주신 덕에 수확과 출하를 끝내다
비로 얼룩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하늘은 기나긴 장마에 보답이라도 해주려는 듯 연일 햇볕을 내려주었다. 맑은 가을 날씨가 수확 막바지에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한 것이다.
이제는 포도 따는 일과 포도를 마지막으로 손보는 선별 작업, 그리고 출하할 일만 남게 되었다. 이 중요한 일 역시 돈 주고도 구할 사람이 없었다.
'감동의 선배'는 일이 생겨 도와 줄 형편이 아니었고, 결국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추석을 쇠고 급하게 내려오셨다. "귀농한 아들 둔 덕에 노년에 웬 고생이냐"는 부모님께, 이번 수확 끝나면 일당 두둑하게 드리겠다고 공언을 하니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신 것 같았다. 평소 생활비도 제대로 못 드린 처지에 이번에 수고비라도 넉넉히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행히 봉지 뜯고 포도송이를 선별하는 작업은 그리 힘이 드는 일은 아니라 75세의 모친도 큰 무리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올해 팔순의 부친은 나와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고, 포도즙 짤 포도 알을 선별하고, 정리 작업 등 온갖 일을 도맡아주셨다.
공판장과 직거래 작업장을 오가며 하루 평균 80~90상자를 출하하는 작업이 근 20일간 계속되었다. 그동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도와주었지만 늦은 밤 12시까지 계속되는 작업에 피로는 쌓여만 갔다.
공판장에 나갈 시간, 택배차가 올 시간이 되면 작업장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졌다. 그러다 보니 소소한 일에도 짜증을 낼 때가 종종 있었다. 노동의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이다. 그것도 잠시, 힘들었던 시간들도 결국 휑하니 남겨진 포도밭과 함께 막을 내리고 올해 대규모(?)의 포도농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두둑한 수고비에 부모님도 흡족... 가족노동의 보람
이미 몸살 기운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부모님을 직접 모시고 상경하는 날, 아내는 부모님께 각각 100만 원씩을 감사의 뜻으로 전했다. 20일 일하고 생각지도 않은 거금을 받으신 부모님은 "웬 돈을 이리 많이 주냐?"면서 놀라셨지만 무척 흡족해 하셨다. 부친은 "일 년 용돈이 생겼다"며 농담과 웃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나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가족과 함께 하는 노동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농사를 통해 느꼈다. 아니 농사이기에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80대 연령의 노인들이 도시 어디에서 이런 일을 하고 수고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70~80대의 어르신들이 마을의 다양한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적은 돈이나마 받으며 노동을 통해 생산에 일조하는 곳이 농촌인 것이다.
내 50년 평생 동안 이렇게 일을 많이 한 적이 없다고 혼자 내뱉을 정도로 고된 노동을 체험한 올해, 힘들었지만 그 기억조차도 이젠 가물거리는 과거 속으로 지나가고 있다.
기대만큼은 미치지 못하는 수확이었지만 폭우 속에 나타나 감동적으로 일을 도와준 귀농 선배와 감동으로 받은 통기타, 모처럼 아들이 준 두둑한 용돈에 대만족 하신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들이 올해 포도농사의 아름다운 기억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올해는 주 생계 농사인 포도 농사가 한 필지 700평에서 두 필지 1700평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물론 임대한 밭이다. 과연 나와 아내의 체력과 농사 경력으로 해낼 수 있을 지 걱정도 됐지만 귀농 5년차의 목표인 경제자립을 위해 부딪쳐보기로 결심했다.
극심히도 추웠던 올해 초, 순 정리 작업부터 시작해 가지 정리, 약 쳐주기, 알 솎기, 봉지 씌우기, 풀 베기 등 1700평 규모의 포도 작업은 군대생활 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힘겨운 노역으로 다가왔다.
▲ 포도밭의 두 모녀아내와 큰딸이 포도밭에서 가지 정리와 알솎기에 열중하고 있다. ⓒ 이종락
폭우 속에서도 강행해야 했던 '알 솎기의 추억'
무엇보다 가장 힘든 기억은 제한된 시간 안에 해야 하는 알 솎기였다. 포도 농사 중 가장 중요하다는 알 솎기는 장마가 한창일 때 끝내야 봉지를 씌우고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놉(일당 받고 일하는 것)으로 쓸 인력들은 이미 기존에 농사짓는 주민들과 전속(?) 계약이 돼 있어 우리 같은 귀농자들은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 솎기는 처음에 달리는 포도 알 100~200알을 평균 70~80알로 줄여주는 일이다. 한 송이 한 송이 사람의 손으로 알을 솎아주어야 나중에 보기 좋은 모양의 크기로 열매를 맺기에, 급하다고 대충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도 겨우 한 골 정도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데 그런 골이 약 50여 개가 되었다. 도저히 우리 부부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지만 닥치는 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비는 일손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전국에 폭우가 쏟아지던 유월의 어느 날, 우비 속으로 파고드는 빗물과 한기를 참아가며 알 솎기를 하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엊그제 하루 동안 일을 도와 준 귀농선배였다.
"비 오는데 지금 뭐하나?"
"포도밭에서 알 솎기 하고 있어요"
"아이구,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일을 한다고?"
"비가 와도 해야지요. 시간도 없는데…."
다음 날 아침, 그 선배는 "비 맞고 일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도와주러 왔다"며 포도밭에 나타났다. 우리 부부에겐 정말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마침 올해 안식년 비슷하게 한 해 농사를 쉬고 있는 형편이기에 부담 없이 도와준다는 말에 너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선배 부부와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사람을 약간 써서 겨우 봉지작업까지 마치고 나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내게 감동적으로 도움을 준 귀농선배는 내가 쥐어준 감사의 성의도 할 수 없이 받더니, 그 돈의 일부로 내게 통기타 한 대를 선물해주었다. 30년 된 '맛이 간' 기타를 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또 한 번 감동을 먹고 말았다.
▲ 75세 모친의 노동포도송이 선별 작업에 여념이 없는 어머니 ⓒ 이종락
부모님이 도와주신 덕에 수확과 출하를 끝내다
비로 얼룩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하늘은 기나긴 장마에 보답이라도 해주려는 듯 연일 햇볕을 내려주었다. 맑은 가을 날씨가 수확 막바지에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한 것이다.
이제는 포도 따는 일과 포도를 마지막으로 손보는 선별 작업, 그리고 출하할 일만 남게 되었다. 이 중요한 일 역시 돈 주고도 구할 사람이 없었다.
'감동의 선배'는 일이 생겨 도와 줄 형편이 아니었고, 결국 서울에 계신 부모님이 추석을 쇠고 급하게 내려오셨다. "귀농한 아들 둔 덕에 노년에 웬 고생이냐"는 부모님께, 이번 수확 끝나면 일당 두둑하게 드리겠다고 공언을 하니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신 것 같았다. 평소 생활비도 제대로 못 드린 처지에 이번에 수고비라도 넉넉히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행히 봉지 뜯고 포도송이를 선별하는 작업은 그리 힘이 드는 일은 아니라 75세의 모친도 큰 무리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올해 팔순의 부친은 나와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고, 포도즙 짤 포도 알을 선별하고, 정리 작업 등 온갖 일을 도맡아주셨다.
공판장과 직거래 작업장을 오가며 하루 평균 80~90상자를 출하하는 작업이 근 20일간 계속되었다. 그동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도와주었지만 늦은 밤 12시까지 계속되는 작업에 피로는 쌓여만 갔다.
공판장에 나갈 시간, 택배차가 올 시간이 되면 작업장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졌다. 그러다 보니 소소한 일에도 짜증을 낼 때가 종종 있었다. 노동의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이다. 그것도 잠시, 힘들었던 시간들도 결국 휑하니 남겨진 포도밭과 함께 막을 내리고 올해 대규모(?)의 포도농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포도 작업장내일 출하될 포도를 친구 부부와 함께 작업하는 모습 ⓒ 이종락
두둑한 수고비에 부모님도 흡족... 가족노동의 보람
이미 몸살 기운으로 상태가 좋지 않은 부모님을 직접 모시고 상경하는 날, 아내는 부모님께 각각 100만 원씩을 감사의 뜻으로 전했다. 20일 일하고 생각지도 않은 거금을 받으신 부모님은 "웬 돈을 이리 많이 주냐?"면서 놀라셨지만 무척 흡족해 하셨다. 부친은 "일 년 용돈이 생겼다"며 농담과 웃음을 감추지 못하셨다. 나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가족과 함께 하는 노동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농사를 통해 느꼈다. 아니 농사이기에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80대 연령의 노인들이 도시 어디에서 이런 일을 하고 수고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70~80대의 어르신들이 마을의 다양한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적은 돈이나마 받으며 노동을 통해 생산에 일조하는 곳이 농촌인 것이다.
내 50년 평생 동안 이렇게 일을 많이 한 적이 없다고 혼자 내뱉을 정도로 고된 노동을 체험한 올해, 힘들었지만 그 기억조차도 이젠 가물거리는 과거 속으로 지나가고 있다.
기대만큼은 미치지 못하는 수확이었지만 폭우 속에 나타나 감동적으로 일을 도와준 귀농 선배와 감동으로 받은 통기타, 모처럼 아들이 준 두둑한 용돈에 대만족 하신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들이 올해 포도농사의 아름다운 기억들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수확이 끝난 포도 밭먼저 수확을 끝낸 올해 3년차 700평 포도밭, 할 일을 다한 잎들이 힘이 든 듯 떨어질 채비를 하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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