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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점거' 이전 저항운동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

[민교협 릴레이 기고] 자발적 시민운동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등록|2011.10.24 16:54 수정|2011.10.24 16:54

▲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 지난 15일 오후 "우리는 99%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뉴욕 맨해튼 번화가인 타임스퀘어까지 행진했다. ⓒ 최경준



지난 9월 17일 시작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한 달을 맞았다. 처음 캐나다의 반(反)소비주의 잡지 애드버스트 광고에 자극을 받은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월스트리트 한복판 '자유 광장'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할 때만 해도 주요 매체는 물론 진보단체조차 이들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평균 연령 20대 후반,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은 백인 '점거자들'의 요구가 분명치 않다거나, 빈민과 소수민족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문화적 히피,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99%'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이 젊은이들이 체포와 구금의 위협,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노숙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월스트리트 점거'를 모방한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금융시스템의 왜곡과 민주주의의 근본원칙을 위협하는 주범으로 지목되었던 월스트리트가 결국 변화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사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전 지구적 저항운동의 일부이다.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봄에서 마드리드와 런던의 여름을 거쳐 확산된 민주주의의 열망이 뉴욕의 가을에 도달한 뒤 다시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지역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빈부격차와 실업, 민주주의가 공통의 화두로 떠오른 이 전 지구적 운동은 성장주의에 사로잡힌 기존 체계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징조다. 타흐리르 광장과 마드리드에서 그랬듯, 월스트리트의 젊은이들은 공공선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권력체계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느슨한 이 운동에는 지도자도, 지도자 회의도 없다

참여, 공유, 개방이라는 web 2.0 세대들이 주도한 '월스트리트 점거'는 이전 세대들의 운동과 다르다. 소셜네트워크로 연결된 시위조직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운동을 조직하고 참여를 독려했고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을 통해 그들의 메시지를 확산시켰다.

▲ http://wearethe99percent.tumblr.com ⓒ



누리꾼들은 '우리가 99%'라는 텀블러에 사진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올렸다. 부채, 실업, 저임금, 모기지, 학자금 등 개인이 겪고 있는 경험이 곧 다수가 공감하는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뉴욕의 공공장소에서 스피커 사용이 금지되자 공명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 오히려 상대의 정서를 깊이 공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느슨한 이 운동에는 지도자도, 지도자 회의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99%!'라는 것, "월스트리트는 구제받았으나 메인스트리트는 버려졌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규칙을 정하고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1%의 경제적 특권층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현재의 경제구조가 지닌 문제를 시정하지 못하는 오바마 정권, 미국 정치의 현주소, 곧 금권정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2008년 선거에서 오바마 당선에 일조한 '오바마 세대'가 등을 돌린 것이다.

'월스트리트 점거'는 누구나 알지만 쉽지 않았던 이야기를 발설하고 있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 모두를 잘 살게 해 줄 것이라는 신화, 파이가 커지면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신화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주장이 자신들의 처지와 직결되었다고 공감하는 사람들, 더 이상 기존 경제·정치 엘리트들에게만 자신들의 운명을 내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점거운동은 빠른 시간 내에 급격히 확산되었다. 인종과 성, 연령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99%'의 기치 아래 모였다. 이로써 부정할 수 없으나 수면 아래 머물렀던 '1% 대 인민(people)'의 구도가 가시화되었다.

미국의 역사에서 내적 모순이 극에 달했을 때 그 모순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위치에 처한 인민이 들고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1890년대에 인민주의 운동이, 1930년대에 노동운동이, 그리고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그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월스트리트 점거'는 현 시점에서 분출될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전 한국에 왔던 노동사가 게리 거스틀 교수에게 이 시점에서 어떻게 인민의 저항운동과 노동운동이 분출되지 않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그는 "그것이 최대의 미스터리"라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미스터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조직된 수많은 저항운동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

물론 월스트리트 점거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운동이 있었다. 2011년 한 해만 해도 미국노동총연맹이 일자리 창출, 부자감세 반대 등의 시위를 수차례 주도했고 지난 2월 위스콘신에서 발생한 공공노조의 파업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뉴 바텀 라인(New Bottom Line)' 등의 진보단체가 온·오프를 통해 미국 금융권의 문제를 제기했고 월스트리트 및 워싱턴 D.C.에서 크고 작은 시위들을 주도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보다 더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명확한 요구사항을 제기했던 수많은 시위와 저항운동이 대부분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불발되었다.

그런 점에서 월스트리트 점거는 이제까지 불발되거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수많은 계획된 운동들과 담론투쟁의 축적이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켜 야기된 결과다. 변화와 희망을 앞세우며 2008년 당선된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 이후 변화도 희망도 이루지 못했음에 대한 실망도 작용했다. 경제적 곤궁을 겪는 다수의 문제를 내팽겨둔 채 진행된 지난 여름 양당의 부채증액 협상과정은 저항운동이 분출되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다. 결국 월스트리트 점거는 그 자체로 변화의 열망이 비등점에 도달했다는 증표다.


'월스트리트 점거'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저항이 지속적인 운동으로 발전되어 시스템적 변화를 야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과 제도적 제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달 노조와 시민단체가 지지선언을 하자 '점거자들'은 함께하는 것은 동의하면서도 노조와 일정한 거리를 두며 독립적인 행보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티파티의 진보 버전,' '계급전쟁'이라는 외부의 시선 역시 부정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를 지지한 99%가 겪는 신자유주의와 금권정치의 폐해가 노동의 약화, 노동없는 민주주의와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음을 감안하면 이 자발적 시민운동과 노동·노조운동이 교합지점을 넓혀나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1929년 대공황이 19세기적 시스템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듯, 오늘날 월스트리트에서 시작한 점거운동은 21세기를 지배하는 지난 세기의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대공황을 겪으며 살아남은 정치·경제가 20세기를 지배했다면,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은 21세기적 가치를 향한 새로운 거버넌스를 요구한다.

마크 트웨인이 일찍이 말했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 단지 음율(rhyme)이 반복될 뿐이다"라고.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자발적 시민운동이 미국과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귀추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김진희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이자 여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입니다.
* 이 글은 2011년 10월 19일 국민일보 글로벌포커스에 게재한 같은 제목의 칼럼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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