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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전북지역 항일의병사의 흐름

<연재-한말 전북의 항일의병사1>

등록|2011.10.25 09:30 수정|2011.10.25 09:30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탑1994년 전주시 덕진동 어린이회관 인근에 세워진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탑’. 당시까지 확인된 5백88명의 우리 지역 독립투사들 이름이 일일이 열거돼 있다. ⓒ 김상기



한말 이후의 의병활동은 이전의 의병활동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들은 수세에 몰린 관군을 돕기 위해 활동을 전개했으며, 때로는 정부로부터 훈장과 칭찬까지 받아가며 활동했다. 반면, 한말 의병의 경우에는 비단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 정부와 그 관리들, 그리고 관군조차도 적으로 해 그들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아가면서 힘겨운 투쟁을 해야 했다. 이것은 곧 한말 의병의 항쟁이 단지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전체의 생존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이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말의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 일본 세력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가 하면,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세력이 한반도로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변혁의 회오리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의 힘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기에는 막강한 제국주의 세력 앞에서 정부는 너무도 무력했다. 그리하여 나라는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됐던 것이다.

여기에서 염려스러웠던 것은 경제적인 이권 침탈이나 지리적인 국토의 상실만이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파괴요, 역사의 파괴였다. 이렇게 볼 때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의 친일내각에 의한 단발령의 강행이 한말 의병항쟁의 발단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두 사건은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과 전통적 풍습을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었고, 이에 전국 각처 유림들의 주도하에 많은 의병들이 봉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전북지역에서의 의병활동에 관한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부분적으로는 이 지역에서의 치열했던 동학농민운동이 유림에 큰 위압감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의거를 주저하게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을미의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기간으로 따지면 일년이 채 못되는 짧은 것이었다. 우선 의병자체가 항일이라는 정신으로 무장됐을 뿐 무기도 보잘 것 없는 데다가 전혀 훈련이 되지 않은 집단에 불과했다. 또한 유생들과 포수, 농민 등 서로 다른 신분 층으로 구성된 의병진 내부의 갈등도 큰 문제였다.

무성서원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첫 도화선이 된 병오창의가 일어난 무성서원. 면암 최익현과 임병찬이 중심이 돼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각지에서 대일 항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 김상기



1903년 한양유림대회에서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감모비 건립사업이 추진됐고, 각 도별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전북은 당시 서원철폐령의 암흑 속에서도 유일하게 남아있던 무성서원이 각 고을 향교에 통문을 보내 정읍 내장산에서 호남유림대회를 열었다.

이로써 도내 27개 향교에서 54명의 대표들이 내장산 벽련암 인근 석란정에 모여 감모비 건립을 위한 성금모금과 함께 서보단을 쌓아 영원한 표적으로 삼고, 국모의 해원을 맹서하며 해마다 8월 20일에 추모제를 갖기로 했다. 이 대회는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얻지 못했으나, 일본에 대한 복수를 맹서한 유림들의 첫 번째 집단행동이라는 의미에서 한말 전북의병사의 시발점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후 구체적 발현으로서의 의병활동 또한 무성서원이 시작점이 된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침탈에 대한 무력 대응으로서 의병들의 봉기가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전북지방에서 을사의병이 일어난 것은 다른 지방보다도 조금 늦은 1906년 여름부터의 일로, 태인 칠보 무성서원에서 면암 최익현과 임병찬이 중심이 돼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성서원에서 거의하고, 태인 관아를 점령한 후 순창에 입성해 관군과 대치하는 형국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최익현은 동족끼리 피를 볼 수 없다며 싸움을 중단, 스스로 포로가 돼 1907년 1월 쓰시마섬에서 순국하고 만다.

병오창의는 군사적 활동으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유림의 태두로서 최익현의 비중으로 인해 이후의 투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의 최전선에 나섰던 것만으로도 인근의 유림과 백성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대일 항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을사의병(1905~1906)은 이후 그대로 정미의병(1907)으로 이어졌다.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 후 서울의 시위대 군인을 비롯해 지방의 진위대 군인이 의병에 참여해 의병운동은 이제 보다 더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호남의병창의 동맹단결성지1907년 음력 9월 12일 이석용 등 1천여명이 창의동맹단을 결성, 고천제를 지내고 조국광복의 대업을 스스로 맡아 꼭 완수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니, 이로서 호남최초의 조직적 항일운동이 시작된다. ⓒ 김상기



전민족적인 의병항쟁은 1908년과 1909년의 2년간 가장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특히 호남에서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어서, 1908년 말 이후 1909년 접어들면서 호남지역은 전국의병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그 이전까지 전국에서 가장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일대의 의병전쟁이 급격히 가라앉으면서 호남지역에서 대규모의 격렬한 의병활동이 전개됐던 것이다.

한말의 의병항쟁에서 빛나는 전과를 남긴 호남지방은 일찍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였으며, 뒷날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는 소작쟁의를 강렬하게 전개했던 항일 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것은 이 지방이 일찍부터 관료적인 착취에 시달려 반항의식이 강했으며, 또한 개항 이후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인해 어려운 생활로 허덕여야 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다 1910년 8월 22일 강제적인 합병에 따라 마침내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완전히 탈취하게 되자 의병운동은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의병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연해주로 이동해 새로운 군사 단체를 조직하고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채비를 갖추었다.

한말의 의병항쟁은 대체로 1910년 이후 급격히 감소돼 1914년으로 종언을 고하게 됐으며, 이후에는 만주와 연해주를 기지로 해외에서의 본격적인 독립군 전투로 전환하게 됐다. 이제 의병들은 독립군으로 그 이름을 바꿔 광복의 그날까지 항쟁을 계속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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