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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이바구' 나누던 어머니, 어디 계십니까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49재를 마치고

등록|2011.10.27 15:47 수정|2011.10.27 15:47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이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내가 운다."

▲ 전태일 무덤 앞에 선 어머니 이소선 ⓒ 오도엽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치며 분신 항거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즐겨 부르던 '해운대 엘레지'의 노랫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즐겨 부르지는 않았다. 아들 전태일이 떠난 뒤 이소선이 있어야 할 자리는 거리였다. 눈물이 있는 거리, 고통이 있는 거리, 분노가 있는 거리가 아니었던가. 그곳에서 어찌 대중가요를 부를 수 있었겠는가. 팔뚝질을 하며 부르는 민중가요를 즐겨 불렀지.

'해운대 엘레지'를 팔뚝질하는 사람들 곁에서 처음 부른 것은 한 열사의 추도식을 마친 뒤, 자식들의 한을 품고 살아가는 어머니 아버지들끼리 모인 자리였다. 이소선이 남들 앞에서 홀로 노래를 하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다. 어거지로 끌려나온 이소선의 목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에 사람들은 처음으로 이소선의 몸에 새겨진 설움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흔 한 해 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아들 태일이는 이소선에게 내 약속 들어줄 수 있느냐고, 내가 이루지 못한 일 어머니가 해 줄 수 있느냐고, 이 약속 지키지 않으면 훗날 하늘나라에서도 어머니 보지 않겠다고, 이 약속 들어주었겠다고 큰 소리로 말해 달라던 아들 앞에서 이소선은, 내 몸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될지라도 약속을 지킬 거라고 맹세를 했다.

그 약속의 시간이 마흔 한 해였다. 지난 9월 3일 여든 둘 이소선은 전태일을 만나러 갔다. 내게도 '언제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했는데, 이소선은 허망하게 떠났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을 지독히 사랑하며 산 이소선

이소선은 한 번 맺은 인연을 너무도 소중히 여긴다. 슬쩍 스쳐 지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꼭 연락처를 달라고 한다. 두툼한 수첩에 삐뚤빼뚤 커다란 글자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둔다. 이소선 머리맡에는 늘 전화번호 수첩이 있다. 홀로 남은 밤이면 자신의 얼굴만한 돋보기를 전화번호부 수첩에 대고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며 한 쪽 한 쪽 손 때 묻은 종이를 넘긴다. 그러다 보고 싶어 미치겠는 이름이 나오면, "바쁠 텐데, 이 시간에 전화를 하면 받을까" 주저주저하다 전화기를 당겨 숫자를 누른다.

이소선이 이제껏 소외된 사람들 곁에서 함께 웃고 울며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이념도 불굴의 투쟁력도 아니다. 사람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처럼 이소선은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을 '지독히도' 사랑하면서 살았다.

이소선이 떠나고 49재(10월21일)를 지냈건만 지금도 배가 고파 올 때쯤이면 전화기를 들여다본다. 이소선은 늘 끼니 때가 되면 전화를 걸어 굶지 말고 일하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애기야! 바빠 죽겠구만 맨날 전화야. 지금이 시래기죽 끓여 먹던 칠십년도 아니고 왜 굶어!" 건달처럼 툭 쏘아 붙였다. 하지만 그 전화가 너무도 좋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처럼 행복했다. 지금도 울리지 않은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지울 수 없는 이소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들여다 본다.

2006년 겨울부터 이소선의 방에 빌붙어 이소선이 차려주는 밥상에서 밥을 먹었다. 이소선 구술기록 작업이란 명목 아래 녹음기를 켜두고, 함께 '이바구'를 나누며 놀았다. 이소선은 눈도 어둡고 입맛도 사라져 시금치를 무치면 소태였고, 찌개를 끓이면 니맛도 내맛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짜디짠 시금치 무침은 달콤했고, 맹탕인 찌개는 얼얼하게 가슴을 데워줬다. 그곳엔 양념과 조미료로 낼 수 없는 이소선의 손에서 묻어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꼭 껴안아주던 그의 목소리가 간절히 그립다

▲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이 엄수된 지난 9월7일 오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에서 열린 노제에서 고인의 영정사진과 운구가 아들의 동상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유성호


밤에 이소선과 이야기를 시작하면 새벽녘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되었다. 재떨이에는 수북이 담배꽁초가 쌓이고, 방안 가득 담배 연기와 함께 이소선의 삶이 고스란히 퍼져 나왔다. 신이 나면 서너 시간 내리 잠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는 앉아서 이야기를 있는데, 내 몸은 비스듬히 구들장을 진다. 그러다 눈꺼풀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내려앉다.

"야, 지금 내가 이야기 하는데, 자냐!"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잠은 무슨 잠, 너무 감동스러워서 그렇구만"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소선의 이야기는 흐르고, 난 다시 깜박 잠에 빠진다. "또 자냐! 써글 놈, 이야기해 달라 할 때는 언제고. 니 놈 자도 내 할 말 다 할란다." 자고 있는 내 곁에서 이소선은 독백처럼 살아온 이야기를 쏟아냈다(이 이야기들은 이소선 팔순에 맞춰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후마니타스)'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어떤 날은 홀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자다가 놀래서 깨면 성경책을 앞에 둔 이소선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기도하는가 싶어 들어보면 대화다. 분명 전태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아들 태일이에게 털어놓고 있다. 그러며 묻는다. 내가 니 약속처럼 살고 있느냐고. 아직도 비정규직들이 백날 가까이 배를 굶으며 싸우는 세상이고, 크레인에 올라 백날 넘게 싸워야 하는 세상이니, 이 애미가 제대로 못해 미안하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소선은 자신이 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내가 볼 때는 늘 울본데 말이다. 어찌 보면 설움이 온몸을 휘감고 있기 때문에 울어도 운 게 아니고, 웃고 있어도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 설움이 그리움을 낳았고, 그 그리움이 사랑으로 터져 나온 거 아닐까.

사람을 만나면 꼭 껴안아 주던 이소선. 그의 목소리가 간절히 그립다. 그의 노래가 절절히 듣고 싶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를 부르던 이소선은 지금 모란공원에 누워 아들 태일이와 만나 마흔한 해 동안 이소선이 거리에서 쓴 사랑의 역사를 나누고 있다.

노랫말처럼 이소선은 지금껏 함께 했던 노동자, 그리고 미래의 노동자들과도 헤어지지 말자고 한 맹세, 그 다짐을 지킬 것이다. 이제는 노동자들이 이소선에게 약속과 맹세를 할 때이다. 비정규직도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세상, 하나로 뭉쳐 싸워서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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