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내림용눈이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포, 구름 사이 빛내림이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 김민수
그날은, 빛내림이 좋은 아침이었다.
해가 점점 높아지면서 빛내림으로 따스해지는 마을도 시시각각 변했다. 마치 하늘의 축복이 온 마을을 감싼 듯하다.
▲ 다랑쉬오름용눈이오름에서 바라본 다랑쉬오름, 제주 오름은 곡선의 미(美)만으로도 그 어떤 아름다움보다 아름답다. ⓒ 김민수
눈을 돌려 다랑쉬오름을 바라보았다.
1948년, 그 아픈 역사의 현장을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았을 터이다.
그럼에도 흐트러짐없이 그곳을 지키고 있느라 얼마나 가슴이 저몄을까?
그런 아픔을 보았다면, 나는 그렇게 흔들림없이 나 됨을 지키고 있었을까 싶다.
▲ 억새제주의 가을은 억새와 함께 한다. 은빛물결이 제주의 바람을 타고 은빛물결을 이룬다. ⓒ 김민수
바람이 잔잔하다.
바람이 좀 불어와도 좋으련만, 지난 밤 내린 가을비에 촉촉하게 젖은 억새의 몸이 가벼워지길 기다리는 것일까?
풀이 바람이 흔들려 꺾이지 않는 것인지, 바람이 그들을 꺾을 만큼은 불지 않는 것인지 풀과 바람, 누구에게 물어볼까?
▲ 민들레민들레가 씨앗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흔히 민들레홀씨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민들레씨앗이다. ⓒ 김민수
개민들레에 밀려나고 있는 서양민들레.
토종민들레가 아니더라도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민들레는 그인데, 그의 입지도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바람이 불면, 아주 멀리 여행을 떠나겠지.
바람따라 떠도는 삶, 그 삶이 자유의 상징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행여라도 자기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던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만 하는 씨앗은 없을까?
▲ 까마귀제주도에는 까마귀가 제법 많다. 이전보다 까치도 눈에 띠게 많이 보인다. 흔히 흉조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까치보다 까마귀가 좋다. 그들의 우아한 비행은 어떤 새보다 아름답다. ⓒ 김민수
까마귀의 비상은 아름다웠다.
우리에게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 나는 길조로 알려진 까치보다는 까마귀가 좋다.
집단 떼거리 습성을 가진 까치를 보면 조폭이나 선하지 않은 국가권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공권력을 보는 듯해서 그럴 것이다.
▲ 단풍제주의 가을 숲, 그렇게 또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할 터이다. 어느 계절이든, 어떤 날이든 아름답게 다가오는 제주의 숲이다. ⓒ 김민수
제주의 숲은 어디나 아름다웠다.
아마도 근래 몇 년 사이 가장 아름다웠던 가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내거 본 제주의 가을 중 가장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이 아름다운 가을이라도 마냥 머무르지 않고 겨울을 향해가는 자연을 보면서 머물고자 하는 나를 바라본다.
▲ 한라돌쩌귀조금은 늦게 피어난 한라돌쩌귀, 한 송이 피어있어 더욱더 귀해 보인다. ⓒ 김민수
홀로 피어있었지만, 외로워보이지 않았다.
외로워도 꽃, 외롭지 않아도 꽃이다. 외로움이라는 것, 그것마져도 넉넉함으로 보이는 것이 자연이 아닌가?
외로움에 대한 예찬은 하고 싶지 않다.
외로움의 나락에 떨어져 보지 않은 이들은 외로움을 너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 절물휴양림의 숲조릿대가 무성한 제주의 숲, 나무들은 이제 이파리를 떨구어내고 겨울준비를 하고 있다. ⓒ 김민수
가을이 깊어지면 제주의 숲은 조릿대 세상이다.
그들은 한 겨울에도 초록의 이파리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하얀 눈이 내리면 초록과 흰색의 조화가 각별하다. 그 각별한 아름다움을 만들려면 강인한 이파리를 필요로 하고, 아무리 추워도 얼어터지지 않도록 제 몸의 물을 비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텅 빈 충만'의 모범이다.
▲ 용눈이오름다음날 다시 찾은 용눈이오름, 곡선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흐린 날에도 이렇게 멋진 풍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제주의 오름은 부드럽고 아기자기하기 때문일 터이다. ⓒ 김민수
다음날 새벽, 다시 용눈이오름을 향했다.
그날은 붉은 기운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그렇게 푸른 하늘로 아침이 밝아옴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로지 푸른 하늘과 곡선만으로 승부하겠다는 듯, 부드러운 오름의 능선이 구불구불 다가온다. 가슴이 뛴다. 어머니의 젖가슴 같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겠다.
▲ 성산일출봉용눈이오름에서 바라본 제주의 밭과 우도와 성산일출봉, 모든 것이 해무와 안개에 쌓여 신비스러운 빛으로 다가온다. ⓒ 김민수
해무에도 은은하게 성산일출봉과 우도와 돌담으로 경계지어진 제주의 푸른 밭이 자태를 드러냈다. 왜, 나는 이 곳을 떠났을까? 후회는 아니다. 만일, 그때 떠나지 않고 지금껏 살았다면 이토록 가슴저미게 제주를 만나지 못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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