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의 삼천궁녀, 왜 <삼국사기>엔 없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계백>, 열 번째 이야기
▲ MBC <계백>의 의자왕(조재현 분). ⓒ MBC
'의자왕' 하면 연상되는 것은 '삼천궁녀'다.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더불어 질펀하게 놀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나라를 잃었고, 그 때문에 부여 백마강변의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스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삼천궁녀 이야기가 한낱 낭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들 역시 매우 충분하다. 그중 세 가지를 살펴보자. 아마, 독자들은 앞의 두 가지보다 세 번째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첫째, 백제 인구로는 도저히 삼천궁녀를 배출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을 따르면, 멸망 당시 백제의 가구 숫자는 76만 호(戶)였다. 1호당 인구는 적으면 3명, 보통은 4~5명, 많아야 7명이었다. 중국의 경우, 한나라·수나라·당나라·명나라·청나라의 1호당 인구는 4.5~6.6명이었다. 한국의 경우, 조선 전기인 세종(재위 1418~1450) 초반에는 3.3명, 조선 후기인 현종(재위 1659~1674) 중반에는 3.8명이었다.
백제 멸망 당시의 1호당 인구를 4~5명으로 추정할 경우, 백제 인구는 304만 명에서 380만 명 정도였다고 계산할 수 있다. 멸망 당시의 궁녀가 3000명이었다면 인구 1000명당 1명은 궁녀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멸망 당시의 백제보다 영토나 인구 면에서 훨씬 더 컸던 조선에서도 삼천궁녀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실록에서 궁녀 숫자를 살펴보면, 태종 때인 15세기 초반에는 '수십 명', 세종 때인 15세기 초중반에는 '100명 미만', 성종 때인 15세기 후반에는 '최소 105명', 인조 때인 17세기 초중반에는 230명이었다.
위인전일 수도 있고 소설일 수도 있는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17세기 후반의 궁녀 숫자는 300명 정도였다.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까지 온갖 반발을 무릅쓰고 궁녀 증원을 감행한 영조(재위 1724~1776) 때의 궁녀 숫자는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684명이었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삼천'이라던 궁녀... 170명을 넘지 못할 것
▲ 백제 서민들의 가옥(복원).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 소재. ⓒ 김종성
영조 때의 조선 인구는 1600만~18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인구에서 궁녀 684명을 선발했으므로, 인구 2만3000명~2만6000명당 궁녀 1명을 뽑았다는 말이 된다.
멸망 당시의 백제 인구를 304만~380만 명으로 추정할 경우, 인구 2만3000~2만6000명당 궁녀 1명을 뽑았다고 가정하면, 백제의 궁녀는 아무리 많아도 170명을 넘지 않는다.
영조가 인구 2만3000~2만6000명당 궁녀 1명을 뽑는 과정에서 엄청난 국민적 반발에 직면한 사실을 감안하면, 의자왕이 170명 정도의 궁녀를 뽑았을 경우 그 역시 상당한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의 궁녀 숫자는 170명에도 못 미쳤다고 봐야 한다.
둘째, 고대 동아시아에서 '삼천'이란 숫자가 실제로 3000을 가리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엄마가 자녀에게 "너한테 벌써 수천 번은 잔소리했을 거야"라고 호통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이가 "수천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인데"라고 꿍얼거리면, 아이는 더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수천 번'의 의미를 놓고 장난을 쳤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수십·수백·수천이란 표현을 문자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할 따름이다.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특히 그랬다. 그들이 '삼천'이란 숫자를 그런 식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서경>은 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고대 중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서경> '주서' 편에서, 주나라 문왕은 "(은나라 폭군) 주왕은 신하 억만 명을 두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도 억만 개다. 나는 신하 3천 명을 두고 있지만, 마음은 하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신하 억만 명이 제각각의 마음을 갖고 있는 은나라와 달리, 주나라는 신하 삼천 명이 한 마음으로 통일돼 있다는 말이다. 신하가 적더라도 마음만 똘똘 뭉치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왕의 말에서 '억만'은 '상대적으로 많다'는 뜻으로, '삼천'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중요한 것은, '삼천'이 실제 3000을 지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추상적 의미의 '삼천'이 숫자 3000을 의미하진 않는다
▲ 낙화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 소재. ⓒ 김종성
시인 이백도 '삼천'을 추상적 의미로 사용했다. 일례로, 관직을 떠난 뒤에 그는 이런 시를 지었다.
백발 삼천 장은(白髮三千丈)
수심으로 그리 길어졌다(緣愁似箇長)
모르겠다 맑은 거울 속(不知明鏡裏)
그 어디서 가을 서리가 생겼는지는(何處得秋霜)
이백이 강물(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백발(가을 서리)을 보고서 한탄하며 지은 시다. 이 시에서 그는 하얀 머리를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에 비유했다.
1장(丈)은 3미터다. 이백의 머리카락이 실제로 3000장이었다면, 그는 동네 먼지를 다 쓸고 다녔을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백의 시에 과장법이 많다고들 하지만, 이것은 이백만의 특징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문인들의 공통점이었다.
손오공이 주인공인 오승은의 <서유기>에는 당나라 태종(당태종)이 등장한다. <서유기> 속의 당태종은 죽어서 염려대왕 앞에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서유기> 제11회에 따르면, 살아 돌아온 당태종은 선정을 펴겠다는 다짐의 표시로 백성들에게 온갖 은전을 베풀었다.
그 은전 중 하나는 '노처녀 삼천궁녀'를 풀어준 것이었다. 이것은 소설 속의 당태종이 그만큼 '많은 궁녀들'에게 은전을 베풀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에 불과했다. 작가 오승은은 '많은 궁녀'를 가장 잘 표현할 만한 말로 '삼천'이란 숫자를 생각해낸 것이다.
'진시황이 천년 살았다'고 정말 1000년 살았을까
▲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궁녀사.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 소재. ⓒ 김종성
한국인들도 '삼천'을 추상적 의미로 사용했다. 태종 14년 6월 8일자(1414년 6월 24일)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 이방원의 최측근인 이숙번은 태종에게 "중국 천자에게는 궁녀가 3천인데, 전하께서는 고작 궁녀 수십 명을 두고 그것을 많다고 하십니까?"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당시 명나라 황궁에는 삼천 명의 궁녀가 없었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황제에게는 3000명의 후궁과 미인이 있다'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했다. 황제 주변에 그만큼 여자가 많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했다. 이숙번은 그런 중국인들의 화법을 차용했던 것이다.
동일한 화법은 조선 후기 소설인 <옹고집전>에서도 발견된다. 주인공 옹고집이 엄청난 부를 축적해 놓고도 병든 팔십 노모에게 약 한 첩 사주지 않자, 노모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이렇게 대우하느냐?"고 원망했다.
그러자 옹고집은 "진시황 같은 이는 삼천궁녀와 더불어 천년이나 살았지만 결국엔 다 죽었다"면서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稀)라고 칠십만 살아도 장수했다고 하는데, 팔십이나 사셨으면 오래 사신 것"이라고 응수했다. 옹고집에 대한 도덕적 질타는 접어두고, 그가 '삼천'이나 '천년'을 추상적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삼천'이란 숫자를 문자 그대로가 아닌 추상적 의미로 이해했다.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리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최초로 지어낸 사람이나 최초로 들은 사람들 역시 '삼천'을 그런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백제 멸망 원인은 실증적으로 분석돼야
▲ 왕후를 모시고 있는 백제 궁녀들의 모습(상상도). 궁녀사 안에 전시되어 있다. ⓒ 궁녀사
셋째, 삼천궁녀가 실존했음을 입증할 만한 역사적 근거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백제 때 인구가 몇이고 '삼천'이란 숫자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논하는 것보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편이 삼천궁녀 이야기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사료를 토대로 구성된다. 사료가 없는 경우에는, 합리적으로 판단 가능한 범위 안에서 추정을 통해 역사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삼천궁녀 이야기의 경우에는, 사료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추정을 가능케 하는 단서도 전혀 없다. <삼국사기> '의자왕 편'에서 백제 멸망 4년 전에 의자왕이 궁녀들과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다고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존재를 연결시킬 수는 없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삼천궁녀를 기리는 궁녀사(宮女祠)란 사당이 충남 부여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궁금해 할 수도 있다. 궁녀사는 1966년에 건립됐다. '궁녀사' 현판은 김종필의 작품이다. 궁녀사를 세운 사람들, 그것을 지원한 사람들이 어떤 역사적 근거를 갖고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삼천궁녀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진짜처럼 이야기하고 있으니, 한국사에서 이보다 더한 낭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화도 전설도 설화도 아닌, 한낱 낭설에 불과한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는 삼천궁녀 이야기를 갖고 백제 멸망의 원인을 논한다면, 우리는 백제의 흥망성쇠로부터 아무런 구체적인 지식도 얻지 못할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군사적 원인들을 실증적으로 분석해야만, 백제의 흥망성쇠로부터 내일을 위한 교훈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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