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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번역가?'...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번역 시장의 문제와 대안①] 자격시험 합격하면 평생 일 준다는 번역회사, 실상은?

등록|2011.11.28 12:19 수정|2011.11.29 10:21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번역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번역가들의 일터인 번역 시장은 여전히 열악합니다. '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에 실력이 부족한 지원자가 많아지자, 번역 회사들은 고용을 줄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비 번역가와 번역가들은 치열한 일감 경쟁에서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기자는 번역가들이 지적한 번역 시장의 문제들 중,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여겨져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한 사안들을 집중 취재했습니다. <기자 말>

[기사 수정 : 28일 오후 7시 55분]

"원래 번역에 관심이 있었어요. 인터넷으로 일을 찾다가 광고를 보고 회사에 전화했는데, 회원으로 가입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일을 준다더라고요."

영어학원 강사인 장아무개(25)씨는 시험 2주 전 '대한번역개발원(대번개)'의 회원이 됐다. 지난 10월 29일 대번개가 주관하는 제63차 번역실무능력평가시험이 치러진 건국대 법학관에는 장씨를 포함해 300여 명의 회원이 모였다. 대번개 관계자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700~800명이 시험에 접수했다. 시험은 1년에 3번. 매번 수백 명의 회원이 소속 번역가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른다.

▲ 대한번역개발원 제63차 번역실무능력평가시험이 치러진 건국대 법학관. 회원 700~800명이 시험에 접수했다. ⓒ 이지수


대번개는 1988년에 설립된 번역 회사다. 이곳은 "자격 시험에 합격하면 평생 동안 번역물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가입비를 받고 시험 대비 교재와 강의를 제공한다. 대번개는 가입비 98만 원(할인 미적용 시)에 "평생 번역물 보장, 법적 책임 면제, 번역가로 활동할 때 발생하는 오역·감수·공증 수수료 면제 및 교육과 콘텐츠를 제공하는 비용이 모두 포함돼 있다"고 설명한다.

전문 번역가는 여러 번역 회사에서 끊임없이 일감을 받는다. 하지만 예비 번역가는 번역 회사와 계약을 맺기도, 한 회사에서 계속 일거리를 받기도 어렵다. 대번개 회원인 학원강사 김아무개(33)씨는 "일거리를 준대서 가입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김아무개(23)씨는 "평생 동안 일감을 받을 수 있다면 가입비나 수험료는 아깝지 않다"고 했다.

자격 시험 합격자에게 번역가 자격증을 발급하는 것도 예비 번역가가 대번개에 가입하는 이유다. 우리나라에는 국가 공인 자격증이 없지만, 대한번역개발원에서 민간 자격증을 발급하고 있다.

그러나 가입비를 내고 실제 대번개에서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들이 생각하는 시험 합격 기준과 실제 합격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탓에 매회 응시자 80% 이상이 자격 시험에서 불합격한다. 한편 자격 시험에 합격한 나머지 20%도 꾸준히 일을 받지는 않으며, 번역가 자격증은 다른 번역 회사에 지원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대한번역개발원의 번역스쿨 홈페이지. 회원들은 이곳에서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자격 시험을 준비한다. ⓒ 이지수


[문제1] '정확도' 아닌 '번역 속도'가 실질적인 합격 기준

번역실무능력평가 시험에는 대번개가 의뢰받은 번역물이 7~8문제로 출제된다. 대번개는 응시자가 번역한 각각의 문제에 절대평가로 등급을 매기고 이를 합산해 평균을 낸다. 소속 번역가가 되고 싶은 회원은 가입 후 2년 안에 '평균 3급 이상'을 받아야 한다. 대번개는 자격 시험 합격 기준을 명확히 공개하지 않는다. 홈페이지에는 초벌 번역가로 활동하는 3급 실력은 '직역 수준', 전문 번역가가 되는 2급 실력은 '의역 수준'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시험 성적표를 보면, 직역과 의역 수준을 평가하는 '정확도' 외에 응시자의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완성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적표에 명시된 등급 평가 기준에 따르면 '번역이 완성'돼야 3등급 이상을 받을 수 있다. 평균 3급을 받으려면 영어 시험 응시자는 8문항을 3시간 안에, 일어 시험 응시자는 7문항을 2시간 30분 안에 정확히 번역해야 한다.

▲ 성적표에 명시된 등급 평가 기준. '평균 3등급 이상'을 받으려면 각 문제의 번역이 대부분 완성돼야 한다. ⓒ 이지수


시험이 끝난 뒤 기자가 인터뷰한 응시자 6명(영어·일어 각 3명) 중에는 문제 전부를 번역해낸 사람이 없었다. 회사원 김아무개(일어·28)씨는 "2문제를 못 풀었다"고 답했다. 학원강사 김아무개(영어·28)씨도 "잘 못 봤다. 처음이라 경험 쌓는다는 생각으로 봤다"며 쑥스러워했다.

불합격한 응시자는 4만5000원을 내고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 기회는 2년 동안 총 6번. 응시자들은 번역가가 되기 위해 가입비와 더불어 수차례의 응시료를 부담하고 있다.

대번개 관계자는 "매회 합격률은 약 10~20% 정도"라고 했다. 그는 "평가 기준을 홈페이지에 자세히 적어도 기준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며 "절대 응시자를 떨어뜨리려 내는 시험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동안 시험의 난이도보다는 시험 시간이 짧다는 지적을 많이 들었다. 회원들의 의견을 반영해 2시간 30분이던 영어 시험 시간을 56회부터 3시간으로 연장했다"며 "합격률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2] 경쟁이 치열해 꾸준히 일 받긴 힘들어

▲ 대한번역개발원의 운영 제도. ⓒ 이지수


번역가로서의 활동은 어떨까. 3급에 합격해 초벌 번역가로 활동하는 최아무개(26)씨는 "일거리는 한정돼 있는데 소속 번역가는 계속 늘다보니 일감 받는 데 경쟁이 치열한 편"이라고 답했다. 최씨는 "보통 회사에서 번역가를 정해 일거리를 주지만 일을 많이 받으려면 회사에 지속적으로 연락해야 한다"며 "신뢰도가 높은 사람에게 꾸준히 일감이 들어가는 편"이라고 했다. 모든 번역가가 원하는 만큼 일을 받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대번개 관계자는 "소속 번역가의 99%가 투잡 회원이고 개인마다 원하는 물량이 다르다"고 말했다. 일부 번역가에게 일감을 자주 맡기는 것에 대해 대번개 관계자는 "대번개는 응시자가 시험에 합격하면 이후 3개월 동안 번역가의 성실도와 실력을 평가한다"면서 "일을 가장 완벽하게 해낼 사람을 찾는데, 3개월 동안 성실했거나 당장 활동할 수 있는 번역가 위주로 우선 연락을 준다"고 설명했다.

[문제3] 자격증이 다른 회사 지원하는 데 큰 도움 안 돼

최씨는 "번역가 자격증이 있으면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대번개에 가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격증이 없어도 예비 번역가가 손해 보는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번역 회사는 번역가의 실력을 검증하는 수단으로 샘플 테스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내가 자격증 이야기를 하기 전에 샘플 테스트를 보고 나를 고용한 회사도 있었다. 자격증이 없지만 인정받는 번역가도 많이 봤다"고 부연했다.

일본어 전문 번역가 이용택(32)씨는 번역가 자격증을 딴 적이 없다. 이씨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실력만으로 번역 회사에서 인정받고 일감을 얻었다. 그는 그 뒤로 출판사와 일하기도 한다. 건강서 전문 출판사에 근무했던 경력을 살려 의약학 논문도 번역한다. 이씨는 "번역 회사에서 꾸준히 일을 받고 싶다면 실력을 쌓고 실무를 경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씨는 조언을 실천할 구체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를 철저히 공부한 뒤 원하는 번역 회사나 출판 회사에 직접 지원하라"고 했다. 그는 이에 덧붙여 "직거래를 선호하는 출판 번역을 하고 싶다면 독자 반응과 출판 경향을 염두에 두고 출판 기획서를 작성해 봐야 한다"고 권유했다. '능력을 인정받고 회사와 친분을 형성하면 자격증 없이도 충분히 번역가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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