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탈자도 그대로 베꼈다... 검사가 이래서야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⑭]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경찰과 검사, 법원이 만들어낸 조작

등록|2011.11.27 21:08 수정|2011.11.27 21:08
지난해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올해 초부터 진실위 전직 조사관들은 '조사관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조서관 백서' 작업의 마무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함을 벗어나 진실의 조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말]

▲ 납북귀환어부 합동 기자회견(1985.3.9) ⓒ 연합뉴스


'납북귀환어부'란 동해상과 서해상에서 조업하던 중에 또는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북한의 경비정에 의해 납치당하거나 태풍 또는 안개 등으로 방향을 잃고 북한 지역으로 넘어갔다가 북한에 수일에서부터 수년까지 억류된 후 귀환한 어부들을 말한다.

분단됐지만 육지 205km에 걸친 휴전선 철조망이 바다에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어서 해상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는 어부들이 남북의 경계를 부지불식간에 월선하는 것은 1970년 초반 이전에는 드물지 않았다. 당시 남과 북은 각자 납북어부들을 체제 유지에 이용했다. 납북된 어부들을 상대로 북한은 장황한 체제선전을, 남한과 미군은 북한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다.

1987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1954년부터 1987년 4월까지 납북된 어선과 선원은 모두 459척 3651명이며, 당시 기준으로 27척 403명이 북한에 억류돼 있었다.

고기잡던 어부... 왜 간첩이 됐나

1957년경부터 북한은 자신들이 주장한 해상경계선 '12해리'를 침범했다며 남한 어선을 납북했다.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 많은 남한 어선들은 풍선이 주류였고 동력선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이동방향을 나침반과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 판단, 조업 중 태풍 등을 만나면 북한해상으로 떠밀려가기도 했고 안개 등으로 인해 주변 지형지물 등이 파악되지 않으면 방향을 잃고 북한해상으로 넘어갔다가 북한 함정에 끌려가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납북된 어부들이 원하면 조기에 송환한다는 방침에 따라 실제 조기 송환했고, 남한은 북한에 억류돼 있다가 귀환한 어부들을 위해 환영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북한의 우월성 선전 등 정치적 목적에 남한 어부들을 이용하기 위해 경비정을 동원, 남한해상까지 내려와 어선들을 납치해 갔다. 북한은 어부들을 장기간 평양여관 등에 모아놓고 쌀밥과 고기 반찬 등을 대접하면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 등을 교육시키거나 산업시설 등을 견학시켰다. 그리고, 남한에 내려가면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을 널리 홍보하고 남파간첩과 접선시 협조하며 지인들을 동조자로 규합, 유사시 북한에 협력하라고 교육한 후 귀환시켰다. 

이에 남한도 납북귀환어부에 대해 그동안 용인해 오던 태도를 버리고 강력한 처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정부 문건에 의하면 1972년 11월 23일 남북적십자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납북어부를 조기송환했다. 그때 송환 이유를 "종래 남한에서는 납북귀환어부들에게 많은 고문과 학대로서 비인도적인 대우를 했는데 7·4공동성명 후에도 종전대로 처우할 것인지 또는 인도적으로 처우할 것인지 여부를 주시하기 위해 송환한다"고 밝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북한도 송환된 납북어부들이 수사기관에서 비인도적 대우를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왜 계속해서 남한 어선을 나포했을까. 당시 남한 당국은 북한이 1968년부터 무장부대를 대량으로 남파시킨 이유가 남한의 월남파병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봤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이 1960년대 중반부터 남한 어선을 대량으로 나포한 이유도 경계를 확정하지 않은 해상에서 긴장을 고조시켜 월남파병을 저지하려는 목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여인숙에 끌고가 간첩 만들기... 상금지급하며 격려

나포 어선이 늘어나자 남한은 어로저지선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거나 어업지도선의 지도 아래 선단을 이뤄 조업하게 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어선뿐만 아니라 어업지도선까지 납치했고 1967년 1월 19일에는 어로저지선을 지키던 해군함정 56호를 폭격, 침몰시켰다. 당시 남한의 열악한 해상 방어능력(경찰경비정 2척, 어업지도선 2척 등)으로는 북한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 1.21사태당시를 회상하는 자유인이 된 김신조씨.(1988.1.21) ⓒ 연합뉴스

그러던 중 1968년 1월 12일 김신조 사건과 1968년 10월 30일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수사당국은 납북된 선원들이 남쪽의 지형지물, 관공서 및 경비초소의 위치 등 국가·군사기밀을 누설해 북한 무장공비들이 쉽게 침투했다고 봤다. 해군력을 보강할 여력이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어선들이 군사분계선(또는 어로저지선)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1968년 11월 9일 대검공안부는 어로저지선을 넘는 어부는 수산업법 위반으로, 군사경계선을 넘는 어부는 반공법위반으로 모두 구속하라고 했다. 같은 해 12월 25일 어로저지선을 넘어 조업 중 두 번 이상 납북된 어부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적용, 사형을 구형하라고 지시했다.

1969년 5월 강원경찰국이 작성한 문건에는 "고성경찰서장은 심문경찰관에 대한 지휘감독으로 간첩 색출에 전력을 경주할 것이며, 간첩을 색출하는 심문관에게는 상당한 보로금(1건 당 당시 금액으로 약 15만 원)을 지급계획인 바, 본 취지를 주지시켜 심문에 철저토록 하라"고 기재되어 있다. 납북귀환어부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들에게 성과에 따라 상당한 보상금이 주어졌던 것이다.

납북귀환어부들의 송치의견서와 공소장, 판결문에는 천편일률적으로 '북한해상에 조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서 한탕하여 내려오자고 서로 모의한 후 북방한계선을 월선하여 북한의 해상으로 들어가 조업을 하다 북한 경비정에 피납되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공판조서에는 피고인들이 공소 사실을 부인하는 내용이 다수 기재돼 있다. 항소이유서 등에는 수사관들의 고문과 구타 등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했다는 호소가 비일비재했다.

진실위 조사 결과, 박정희 정권의 강경 처벌 방침에 따라 수사관들은 납북귀환어부들을 구금시설도 아닌 여인숙이나 여관 등에 장기 불법구금하고 구타 등 가혹행위를 가해 '북한해상에서 조업했다'는 허위자백을 받아내 검찰에 송치했다. 이후 검찰은 어부들이 고의가 아니더라도 월선될 수 있음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며 '미필적 고의'로 기소했다. 법원 역시 "반국가단체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인식만 있으면 그 범의는 충분히 인정되는 것이고, 이러한 범의 외에 따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위한 목적의사나 이동상태의 계속을 필요로 한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납북어부들의 월선행위는 고의성 여부를 불문하고 반공법 소정의 탈출죄를 구성한다"고 판결했다.

한편, 끝내 혐의를 시인하지 않는 경우, 중앙정보부는 "범죄혐의가 없는 자에 대하여는 귀가 조치시키고 계속 찬양고무 행위 유무를 내사할 것(혐의가 없는 자라 할지라도 입건 송치할 것)"이라 지시한 후 관할경찰서로 신병을 인계했다. 하지만 관할경찰서는 이들을 재수사하여 찬양고무죄 또는 탈출죄로 대부분 처벌했다.

기가 막힌 것은 납북됐다가 귀환해 처벌 받지 않았거나 단순히 수산업법 위반으로 처벌 받은 경우, 그리고 탈출죄 등으로 처벌 받은 어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귀환 후 짧게는 1년 후 길게는 20여 년이 지나 다시 간첩으로 처벌 받았다는 사실이다. 진실위가 확인한 건수만 96건이었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국민들의 대공경각심을 고취시킨다며 납북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해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간첩수사는 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어부들은 하나같이 여관이나 여인숙 등 민간인 시설에 불법구금됐다. 담당 경찰관들은 구체적인 범죄혐의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연행 후 48시간 내에 구속영장을 발부 받을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 또 밤이면 정보과 사무실이나 대공분실 등 자체조사실로 데려가 조사했다. 피해자들은 그곳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당했으며 이를 거절하면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여인숙이나 여관비, 그리고 식비 등에 대해 수사관들은 "그 비용은 도청 등에서 지원 받았고, 일부는 포상금으로 지급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한편, 중앙정보부(또는 안전기획부)와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군 보안부대는 연행한 어부들을 영장 발부와 관계없이 대공분실이나 군 수사기관이 운영하는 조사실에 불법구금했다. 이는 중앙정보부나 군 수사기관이 최소한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탈자도 베낀 검찰 수사... 고문 의혹에도 눈감아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 의혹사건에서 검사들은 경찰 등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를 그대로 필사해 피의자나 참고인에게 무인을 받는 방법을 주로 썼다. 검사는 미리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와 참고인 진술조서를 보면서 1차 수사기관에서 사실대로 진술했는지 간단히 묻고 "사실대로 진술했습니다"는 답을 받은 후 서명날인과 간인을 하게 했다. 따라서 경찰에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나 참고인 진술조서의 오탈자나 잘못 기재된 문장 등이 전혀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기재됐다. 피해자들은 잠깐 동안 검사를 대면했기 때문에 검사에게 조사를 받은 사실조차 기억 못하기도 했다.

일부 검사는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을 부인하면 직접 구타하거나 수사기관으로 다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실제로 수사기관으로 돌려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진실위 조사에서 피해자 임OO씨는 "검사가 저를 데려간 형사들을 뒤에 세워두고 신문을 하였는데, 내가 경찰에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와 다르게 진술하자 '이놈 봐라' '손바닥 내'라고 하더니 지휘봉처럼 생긴 것으로 손바닥을 수차례 때렸다"고 진술했다.

당시 대공사건의 경우, 검사는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 조정 규정' 제7조 제2항의 "검사는 정보사범 등에 대하여 공소보류 또는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사건을 송추하거나, 기소의견으로 송치된 사건을 공소보류 또는 불기소 처분을 할 때에는 사전에 정보부장과 협의하여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형사소송법에 정해진 기소독점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와 협의(실제로는 지시)해 기소 여부를 결정했다.

이외에도 태영호 사건에서 검사는 무죄의 증거인 해군의 회신문(남한해상에서 피납되었다)이 도착했음에도 이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아 유죄를 받게 했다. 최만춘 사건에서는 판사가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증거 인멸 우려가 없는데도 석방하지 않았다.

1986년 7월 이후, 어부 간첩사건이 사라진 이유

납북귀환어부 간첩조작 의혹사건의 증거는 거의 대부분 자백뿐이었다. 그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수사기관의 구타나 고문 등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했고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검사에게도 고문을 받았나요"라고 물어 "아니요"라고 답하면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를 증거로 유죄를 판결했다. 또 정영 사건처럼 형식적으로 수사관을 증신 출석시켜 "구타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있나요"라고 물은 후 수사관이 "없습니다"라고 답하면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다.

또 진실위가 조사한 어부 최만춘 사건에서 당시 경찰관 최OO은 "법원에서 간첩 진력현 등의 형량을 얼마로 하면 되겠는지 전화를 해 대공분실장을 바꿔주었다"고 증언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법관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선고할 형량을 수사기관과 협의한 것이다. 독립기관이자 인권의 최후 보루기관인 법원조차 본연의 임무를 스스로 포기한 부끄러운 일이다.

법과 양심의 따른 사법부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986년 7월 어부 김성학 사건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의 장OO 판사는 고문으로 조작됐다는 피고인의 자백 외에 간첩 활동을 했다는 다른 물증이 없다며 무죄 판결했다. 그 이후 납북귀환어부 간첩 사건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 조사 그 후...

"경찰,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보안사령부 등 공안수사기관 종사자들이 납북귀환어부들을 장기불법감금하고 몽둥이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대창으로 손톱 및 발톱을 찌르는 고문, 수일 동안 잠을 안 재우는 고문, 통닭구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가혹행위를 가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낸 다음 검찰에 송치하였고, 검찰은 심문시 납북귀환어부들이 경찰,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보안사령부 등에서 자백한 내용과 다른 자백을 하지 못하도록 고문 수사관들을 옆에 세워두고 수사하거나 검사가 직접 구타하면서 수사하여 동일한 자백을 받아내 기소하였으며, 법원은 납북귀환어부들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불법감금과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을 하였다'고 법정에서 호소하였으나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수사기관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해 받아낸 허위 자백 즉 수사기관 작성 피의자신문조서 및 참고인진술조서 기재 내용을 증거로 유죄선고를 하였다"

▲ 지난 1999년 11월 25일 오전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이 납북어부 김성학씨에 대한 불법감금과 폭행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기위해 수원지법 성남지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진실위는 납북귀환어부 '강대광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 10건의 사건을 신청 받아 조사해 10건 모두 진실규명했다.

진실위는 지방자치단체와의 공동수행 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3월 26일부터 같은 해 7월 20일까지 '2009년도 기초사실조사'를 실시하면서 납북귀환어부 건도 포함시켰다. 조사 결과, 납북귀환어부들은 대부분 반공법 위반자로 낙인 찍혀 석방 후에는 취업제한, 거주 이전 제한, 수사기관의 감시 등을 당해야 했다. 또 그와 접촉한 친척이나 친구, 그리고 마을주민들도 수사기관원들이 동향파악이라는 이유로 조사해, 접촉을 꺼려 마치 '불가촉천민'으로 전락했다. 자녀들은 연좌제로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또 진실위는 자체 파악한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 96건 중 47건(1970년 이전 사건 40건과 이후 사건 중 9건은 인적사항을 확인하지 못함)의 판결문 1888쪽을 입수, 조사관들이 직접 피해자들을 면담했다. 납북귀환어부들 중 진실위에 진실 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들은 "진실위 존재 자체를 몰랐다"며 조사관을 붙잡고 "지금이라도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통해 간첩으로 조작한 내 사건도 진실 규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기본법'에는 진실규명 신청사건에 한정해서, 특히 납북귀환어부들의 사건처럼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은 민사소송법 및 형사소송법에 의한 재심사유에 해당해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만 조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못한 사건 중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법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에 대해서는 전원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2기 진실위는 납북귀환어부 관련사건을 직권으로 조사할 경우 다른 사건들도 직권조사를 요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위원회의 조사기간 종료시점까지 조사를 완료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그렇게 되면 위원회 조사기간을 기본법에 따라 2년 연장해야 하지만 그러할 경우 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달라져 위원회의 성격이나 활동방향이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점, 기본법에는 연장이 필요하면 위원회가 국회에 보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국회 추인을 받아야 하는데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과거사정리에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점 등을 들어 직권조사를 사실상 포기했다.

그러나 수많은 납북귀환어부들의 피해를 덮고 갈 수는 없었기에 인권침해조사국은 기초사실 조사과정에서 재심사유가 확인된 25건(47건 중 22건은 관련자 사망, 수사기록 부존재 등으로 인해 재심사유를 확인하지 못함)에 대해서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 인권침해사건 직권조사 개시를 위한 사전조사(확정판결 사건의 경우 재심사유 확인 절차)'를 2009년 9월 8일 의결하고 진실위 종결까지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 최소한 종합보고서에라도 싣고자 노력했다.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 인권침해사건 직권조사 개시를 위한 사전조사"를 2010년 4월까지 진행한 결과, "납북귀환어부 이성국, 강경하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 7건은 진실규명(또는 일부진실규명)을 했고, 나머지 18건에 대해서는 대공수사기관이 납북귀환어부들을 장기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가하여 간첩사건으로 조작했을 개연성을 확인했다.

정리하면, 진실위에서 확인한 납북귀환어부 관련 간첩사건 96건 중 17건(신청사건 10건, 직권조사한 7건)은 진실을 규명했고, 18건은 재심사유와 사건 조작 개연성을 확인했으며, 61건은 조사하지 못했으나 판결문 등을 확인한 바 35건과 거의 동일한 양태임을 확인했다.

아물지 않은 상처, 남겨진 피해자들

▲ 이근안 전 경감으로부터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김상학(48)씨가 이씨의 자수와 관련한 자신의 심경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납북귀환어부와 관련된 간첩사건은 수원지법 성남지원이 1986년 7월 고문경관 이근안에 의해 조작된 '납북귀환어부 김성학 간첩사건'을 무죄 선고하고, 이어 서울고등법원에서 납북귀환어부 강종배 간첩사건, 부산고등법원에서 납북귀환어부 여덕현 간첩사건이 무죄 선고된 후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 등 인권침해사건은 국민들이나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해 왔다. 피해자들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거나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경제적으로 취약계층인데다가 주로 고립된 섬마을에 거주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억울한 사연에 관심가지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진실위가 법에 정해진 대로 기간을 연장해 자신들의 사건을 직권조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실위는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 또 한번의 상처를 주었다. 물론, 위원회 조사기간 연장에 반대한 사람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보수적인 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한 3기위원회는 1-2기 위원회라면 진실규명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납북귀환어부 관련 간첩 사건들이 "기각" 또는 "진실규명불능" 그리고 "일부진실규명" 등으로 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건이 기각으로 결정됐다 하더라도 위원회가 새롭게 조사한 기록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 등 인권침해 사건은 위원회의 조사기록을 근거로 법원에 재심 신청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진실위가 조사기간을 연장해서라도 추가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크게 아쉬운 대목이다. 

진실위 조사관 백서 연재를 마치며
 납북어부 간첩조작의혹사건을 끝으로 지난 6월부터 연재해온 진실화해위원회 주요 사건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거친 글들을 읽어 주시고 격려해 주신 독자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전국 경향각지에서 귀한 원고를 내어주신 여러 조사관님들께도 마음의 인사를 보냅니다. 더디 가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정신으로 백서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밝은 날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