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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청춘의 사랑, 그리고 세월의 회한

유니버설 발레단 '드라마발레', <오네긴>

등록|2011.11.24 18:46 수정|2011.11.24 18:46

발레 <오네긴>3막타티아나(황혜민)가 다시 만난 오네긴(엄재용)을 뿌리치고 있다. ⓒ 유니버설 발레단

지난 11월 12일부터 19일까지 LG 아트센터에서 유니버설 발레단의 드라마발레 <오네긴>이 공연되었다. 이번 공연은 '드라마 발레'라는 특별한 형식으로, 푸쉬킨의 소설 '오네긴'의 줄거리를 섬세한 감정처리와 장면묘사, 발레 동작으로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풀어내었다.

고전, 낭만발레의 판토마임이나 '그랑 파드되', '디베르티스망' 없이 순전히 스토리와 그 미세한 감정표현 위주의 동작으로 연결되는 드라마 발레라서 공연의 초반에는 다소간 박진감이 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스토리가 워낙 간단하니 전체 3막 구성의 이 발레에서 1막 1장 서두에는 마치 동화같이 보이는 세트장과 군무의 구성, 남녀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시발점이 되는 거울점 놀이 등에서 어린이날 무대를 보는 것같은 느낌과 함께 좀 멋이없는 발레가 되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2막 2장 결투렌스키를 죽이고 타티아나(강미선)은 흐느끼며 오네긴(이현준)은 차갑게 돌아서고 있다. ⓒ 유니버설 발레단



하지만 이야기가 진전되고 발레동작이 계속되면서 이러한 의문감은 점점 '드라마 발레란 이런것이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오네긴>을 차이코프스키가 오페라 <오네긴>으로 만들고, 또 그것을 보고 20세기 중반 천재 안무가 존 크랑코가 오페라 <오네긴>에 쓰인 음악이 아닌 차이코프스키의 다른 피아노곡들을 재조합하여 탄생시킨 반주음악으로 엮어 서정적이며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치는 드라마발레 <오네긴>으로 재탄생시켰다.

<오네긴>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시골출신의 순수한 처녀 타티아나는 도시에서 온 오네긴을 첫눈에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오네긴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갑갑한 시골에 도 혐오를 느끼며 타티아나가 건넨 사랑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심지어 친구 렌스키 공작의 여자친구 올가에게도 무도회장에서 추파를 던지며 결국 렌스키와의 결투에서 렌스키가 죽게된다. 수십년이 지나 시골로 온 오네긴은 그레민공작의 부인이 되어 삶의 안정을 느끼는 한 부인이 예전의 타티아나임을 알고 놀라며 사랑의 편지를 다시 건네지만, 이제는 타티아나가  반대로 편지를 찢어버리며 사랑과 세월의 허망함에 오열한다.

1막 2장 타티아나의 침실 2인무타티아나(황혜민)의 꿈속에서 오네긴(엄재용)과 타티아나가 환상적인 2인무를 펼친다. ⓒ 유니버설 발레단



참으로 애잔하고 먹먹한 러브스토리이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똑같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두 남녀주인공이 죽는 비극과는 또다른 유형의 세월을 머금은 애상감이 밀려온다. 따라서 남녀 무용수가 각자의 기량을 최극도로 뽐내거나 빠른 음악에 맞추어 공중회전을 보이거나 할 틈은 결코 없을것이며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감정선 위주의 드라마 발레 형식이 적격일 것이고 이것이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전성기를 일구어낸 '존 크랑코'의 천재성이 있는 것이다. 편지를 찢어버리는 장면은 푸쉬킨의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다.



이번 유니버설 발레단의 <오네긴> 공연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두 주역무용수인 강효정과 에반 맥키가  타티아나와 오네긴으로 호흡을 맞추어 더욱 화제가 되었다. 같은 주역의 다른 세쌍의 커플인 황혜민-엄재용, 강예나-에반 맥키, 강미선-이현준 모두  아름다운 호흡으로 각 커플의 개성을 가진 드라마발레를 살려내고 있었다.

오네긴역의 엄재용자유분방하고 오만한 도시남자 오네긴 역을 카리스마 있게 표현하였다. ⓒ 유니버설 발레단

프레스 리허설에서의 황혜민 - 엄재용 커플은 2009년 <오네긴> 공연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다. 황혜민은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 터질듯한 슬픔의 타티아나를 표현하고 있었다. 1막 2장의 꿈속에서 오네긴과의 낭만적인 2인무도 일품이지만, 3막 1장 타티아나의 생일파티에서 이제는 렌스키 공작(콘스탄틴 노보셀로프)의 부인으로서 남편과의 안정적인 2인무에서는 더욱 농염한 아름다움을 펼쳤다. 특히 마지막에 오네긴의 사랑을 붙잡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을 감싸 흐느끼며 오열하는 장면은 보는이를 그 사랑의 아픔에 동화되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만들어버렸다.



엄재용은 카리스마 있는 얼굴과 표정으로 사랑을 저버릴때와 다시 사랑을 찾아왔을 때의 회한 등의 표현에 적격이었다. 렌스키 공작과의 결투에서 렌스키를 죽이고 그 후회로 머리를 쥐어싸며 느리게 옆걸음질 치는 2막 마지막 장면, 타티아나를 찾아왔을 때 메인 무대 앞쪽으로 검정배경의 간이막이 드리워지며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가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과거의 장면들-무도회장면, 렌스키와의 결투, 죽음- 등에서는 1막과 2막 초반에서의 뽐낼듯이 잘난척하던 한 남자 오네긴의 종말의 비애를 적절한 타이밍과 몸짓으로 아주 잘 표현하고 있었다.

3막1장 상트 페테르부르크타티아나와 그의 남편 렌스키 공작이 '신뢰의 2인무'를 추고 있다. ⓒ 유니버설 발레단



19일 저녁공연의 강예나 - 에반 맥키 커플은 서구적인 세련됨이 더욱 돋보였다. 한국인 최초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정단원으로 활동한 외국 경험으로 역시 에반 맥키와의 호흡에서도 어색함 없이 잘 소화해내었다. 큰 눈의 서구적인 시원한 마스크에서 뿜어져나오는 카리스마가 동작까지 연결되어 늘씬한 체구의 에반맥키와의 그림이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같은 동작 훌륭한 호흡인데도 타티아나가 사랑의 허망함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장면, 오네긴이 살인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 꿈속에서의 2인무 등에서 더욱 드라마적인, 특히 한국정서의 신파적인 '드라마'를 요구하는 감성으로는 황혜민-엄재용 커플이 더 와닿았다.

1막 초반의 시골 아낙과 청년들의 군무도 아름다웠으며, 요사이 오페라나 발레 공연장에서 많이 보이는 모던한 무대보다 오히려 구체적인 무대가 더욱 드라마발레를 잘 살려주고 있었다. 존 크랑코 재단의 판권소유 때문에 국내에서는 자주 볼 수 없었던 발레 <오네긴>을 2011년 또다시 볼 수 있었던 즐거운 관람이었다. 오네긴 또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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