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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안아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연재소설- 하얀여우 5] 술취한 도시

등록|2011.11.25 20:19 수정|2011.12.13 17:48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죠? 제수씨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어머머 웬 제수씨!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얘 누나가 내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둘째 날 밤, 고윤희가 술자리에 함께했다. 강남 역 부근 포장마차였다. 아무래도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인호는 사귀는 사이라고 했는데 고윤희 반응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인호 혼자 좋아하는 듯했다. 인호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쾌활한 여자였다. 소주잔 기울이는 솜씨를 보니 술 실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연거푸 "위하여"를 외치고 술잔을 머리 위에 털어서 다 마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자가 한 명 끼면 남자들 술자리는 한결 부드러워진다. 남자들만 있을 때는 맛 볼 수 없는 잔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술 한 잔 마시고 어떻게 해 보려는 엉큼한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굳이 정리 하자면 이성이 주는 색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래서 술은 장모라도 여자가 따라야 잘 넘어간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특히 술 잘 마시고 분위기 잘 잡는 여자가 있는 술자리는 더 그렇다. 남자들은 여자에게 지지 않으려는 치기 때문에 주량을 잊고 과음하게 된다. 그날 우리가 그랬다. 부어라 마셔라하는 분위기였다. 소주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나 우리가 죽나 확인하자는 식이었다.

부드럽고 작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전기가 짜르르 오는 느낌이었다. 고윤희였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고윤희 옆에 앉아 있는 인호는 전우들과 군대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고윤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어찌 보면 참 단순하다. 같은 남자보다 부드럽기 때문이다. 남자보다 몸도 부드럽고 마음도 부드럽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도 간혹 있지만. 아마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기본적으로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자가 갖고 있지 않은 단단함 때문이 아닐까.

이성은 손을 뿌리치라고 재촉하는데 감성은 그렇지 못했다. 감성이 지배하는 시간이었다. 흥청거리는 밤이었고 난 취해 있었다. 내 감성은 오히려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고윤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난 차마 고윤희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고윤희가 숨 막히는 분위기를 스스로 접었다.

"상범씨 저 이제 집에 가야 하는데 택시 좀 잡아 줄래요."
"어~윤희씨 벌써 일어나려고요? 아직 초저녁인데."
"초저녁이라니요. 12시가 다 됐는데."
"아 그런가요. 인호가 바래다 줄 거예요. 야 인호야 윤희씨 집에 간댄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인호에게 바래다 주라고 해야 남자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인호는 바래다 준다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하지만 고윤희가 인호를 만류했다.

"인호야 그냥 앉아 있어 손님 잔뜩 초대해 놓고 어딜 간다고 그래. 넌 여기서 계속 술 상무 해. 난 택시 타면 돼, 잘 생긴 상범씨가 택시 잡아 줄 거야."

인호는 고윤희 말을 착한 동생처럼 잘 들었다. 고윤희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택시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고윤희는 취기가 올랐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한 손으로 고윤희를 부축하고 한 손은 씽씽 달리는 택시를 향해 바쁘게 흔들어댔다.

그때,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곧이어 따뜻한 혀가 내 입속을 파고들었다. 고윤희 입술은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내 팔은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고윤희는 몸속으로 파고 들 듯이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 몸은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윤희가 택시를 향해 뛰어가면서 손을 흔들 때가 돼서야 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내게 매달리듯 서 있던 고윤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택시를 행해 뛰면서 "상범씨 안녕" 하며 손을 흔들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첫 키스가 끝난 후, 어떤 얘기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너무 어색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고윤희는 내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마치 내 맘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손가락으로 내입을 막으며 "상범씨 아무 말 하지 말아요. 난 그냥 한 번 안아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럴 때 있잖아요" 하고는 택시를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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