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재판은 여전히 오리무중
[곽노현 재판 중간 결산] 13차례 재판 진행... 대질신문은 무산
▲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자료사진). ⓒ 권우성
1일 열린 곽노현 교육감사건 제13차 공판을 참관했다. 11차 공판서부터 3차례 연속 진행된 박명기 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밖에도 박 피고인의 선거본부장을 지냈다는 양아무개 증인, 최측근 보좌관 김아무개 증인을 비롯, 이해학 목사, 유시춘 전 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등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역할을 했던 여러 증인들에 대한 신문자리에도 자리를 지켰다.
곽 교육감과 박 교수가 돈을 주고 받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 이상, 그리고 그 사실을 중심으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이상, 이 사건이 교육개혁을 좌절시키고 진보진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기획된 표적수사라고 언제까지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우선 진상을 명확히 알아야 주장도 힘을 얻는 법이다. 한명숙 전 총리 재판 이후 또 한번 무거운 발걸음을 법원으로 옮기기 시작한 이유다.
하지만 양아무개 증인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이날 3자대질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들 세 사람의 대질을 통해, 단일화 대가로 돈을 주고 자리를 주기로 한 사실을 곽교육감이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 정도는 규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양아무개 증인의 불출석에 불같이 분노한 재판장이 과태료 500만 원을 부과하고 구인장을 발부함으로써 3자대질이 8일에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무산된 대질신문, 나타나지 않은 박 교수 쪽 협상 대표
재판의 본질은 분명하다. 돈과 자리를 제공하기로 한, 선거 참모들끼리의 단일화 협상 내용을 곽 교육감이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와 나중에 곽 교육감이 친구 강경선 교수(방송통신대 법학과)를 통해 건네 준 돈이 후보사퇴에 대한 대가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재판장(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 김형두 부장판사)은 지난 11월 1일 첫 재판에서 법학 교과서와 일본 판례들을 들어 "사전 인지나 추인 여부와 관계없이 사퇴 후에 대가로 이익이 제공되면 죄가 성립한다는 법 해석들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만 그는 "사전 인지 여부는 대가성을 판단하는 부수적 쟁점이 될 수 있다"고 부연함으로써, 곽 교육감이 언제 참모 간 협상 내용을 알았느냐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왔다. ('사후매수죄'라는 법률의 적합성 여부는 이번 재판을 대가성을 중심으로 판단하겠다는 재판장의 굳은 의지 앞에 별 의미를 갖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재판이 지금까지 총 13번이나 진행됐고, 예정된 증인 10여 명이 모두 증언을 마쳤음에도 아직 어느 것 하나 명확히 규명된 것이 없는 것이다. 주요 쟁점마다 증언이 엇갈린데다 대질신문마저 연기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일치된 증언을 통해 확정된 사건의 개요를 시간순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① 2010년 5월 초순 언간에 박명기 후보의 친구이자 선거본부장인 양아무개가 후보단일화를 위한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박 후보 진영에서는 당선이 어렵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듯 하다.
② 2010년 5월 18일 두 후보자와 양아무개, 김아무개 등 두 후보자의 핵심 참모가 처음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두 후보 사이에 '경제적 어려움'(박) '성심껏 돕겠다'(곽) '자문위원장 맡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박) '그럴 것이다'(곽) 등의 대화가 오갔으나 포괄적 의미의 얘기였고 옵션은 아니었다. 정책연대 얘기도 나왔다. 식사 후 곽 후보가 먼저 일어서고 그의 참모 김아무개가 배웅하려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양아무개가 박 후보에게 "7억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③ 저녁 때 사당동 모 호프집에서 시민사회학술단체대표 대리역인 이해학 목사, 최갑수 교수, 양측 캠프의 양아무개, 김아무개가 모였고 박명기 교수도 왔다.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 돈 얘기가 나오고 각서 쓰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분위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이해학 목사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곽 교육감이 나중에 와서 (얘기를 듣더니) 얼굴이 붉어진 채 자리를 떠났다. 이어 이 목사, 최 교수도 떠나고 박 후보, 양아무개, 김아무개(곽 교수 측)가 남아 유세차량 인수 문제를 논의하다가 박 후보가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④ 이튿날 아침, 박 교수는 평소 어려운 일을 논의해 왔던 유시춘 위원에게 전화해 차량계약을 파기할 경우 손해배상 범위를 물어 봤고, 기왕에 지출된 선거비용 보전문제 때문에 단일화가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토로했다. 그때까지 쓴 비용이 3, 4억 정도 된다고 받아 들인 유 위원이 곽 후보에게 전화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 이 내용을 박 후보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다.
사건의 재구성- 돈 얘기에 완강하게 거부감 표시한 곽노현 후보
⑤ 박 후보는 스스로 후보사퇴를 결심하고 이날 오전 양아무개에게 후보단일화 재협상 문제를 일임했다.
⑥ 박 후보는 이후 11시 흥사단에서 열린 후보자 정책 메니페스토에 참석, 곽 후보와 나란히 앉았다. 곽 후보는 협상재개를 제안했고 박 후보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답했다. 12시 20분쯤 곽 후보는 먼저 자리를 나와 인사동 한식당에서 모 언론사 간부들과 점심자리에 참석했다.
⑦ 협상을 다시 일임받은 양아무개가 12시 30분 쯤 여전히 흥사단에 남아 있던 박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와 "얘기 잘 됐다. 비용문제는 우회적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사무실에서 자세히 얘기하자"고 했다.
⑧ 한편 곽 후보, 모 언론사 간부들과 함께 인사동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최 교수에게 1시쯤 양아무개가 "협상이 될 것 같다"는 전화를 걸어 왔다. 최 교수는 2시 30분 쯤 양아무개와 그의 동서이며 곽 후보 측 회계책임자인 이아무개와 인사동 찻집에서 만나 그들로부터 "5억(혹은 7억+차량인수비용)으로 합의하기로 했으니 (진보)진영에서 해결해 주는 것으로 최 교수가 보증해 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⑨ 오후 4시 양아무개가 박 후보 측 사무실로 돌아와 "7억 원(낙선 경우 5억)을 보전하되 긴급처리 비용 1억5천은 자신(양아무개)의 집을 담보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자신과 최 교수 등 3자가 8월 말까지 처리하기로 곽 후보 측과 합의했다"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우리 측에서는 박 후보와 자신, 저쪽에서는 곽 후보와 회계책임자 이 아무개(자신의 동서)만 알기로 했다"고도 했다. 박 후보는 당시 '정황상' 곽 후보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확인하지는 않았고 선거 끝난 후 8월쯤 양에게서 (곽 후보로부터 확인받은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⑩ 오후 6시 단일화 기자회견장에서 회견 직전 원로들 앞에서 박 교수가 먼저 "사퇴하겠다"고 하자 곽 후보가 감격한 상태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박 후보를 끌어 안고 "(후보감으로) 차고 넘치는 사람이 양보해 줘서 고맙다"며 "앞으로 형제처럼 지내자"고 했다.
돈 주고 받기로 한 동서끼리의 합의, 곽 교육감은 알고도 감격했을까
다음은 선거가 끝나고 곽 후보가 교육감으로 취임한 이후의 시간대 별 상황이다.
① 기대했던(혹은 약속한 것으로 믿었던) 돈은커녕 자리도 마련되지 않는데다 급기야 자신의 단일화협상 대리인 격이었던 양아무개가 전화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극심한 소외감과 불만에 싸여 있던 박 교수가 8월19일 곽 교육감을 불쑥 찾아 간다.
② 8월 말, 혹은 9월 초에 양아무개, 김아무개 등 측근들을 만난 박 교수는 곽 교육감 사무실에서 "이게 정치도의상 (맞는 일)이냐. 장삼이사도 약속을 지킨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히 무시하나. (5월 18일) 식당에서 (내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지 않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는 말을 하고 이를 녹취한다. 이 녹취록에는 이밖에 곽 교육감이 놀라면서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십니까" " 어? 그래요?" 등등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곽 교육감은 확인해 보겠다고 약속도 했다.
③ 박 교수는 자신의 측근인 김아무개를 곽 교육감 비서로 추천했으나 거부당한데다 9월 1일 교육청 인사와 혁신학교 발표를 보고 "협의없이 왜 그렇게 하느냐. 정책연대가 그런 것이냐"고 항의했으나 곽 교육감은 "정책연대는 선거기간 중에 다 한 것 아니냐"는, 자신으로서는 기가 막힌 말을 듣는다.
④ 10월 양아무개마저 "네 멋대로 하라"며 떠나자 박 교수는 6일 '단일화과정의 개요와 내용'이라는 문건을 작성한다. 11월 초 이 문건을 들고 최 교수를 찾아가 "당신이 보증하지 않았나"고 따진다. 최 교수는 "이런 걸 왜 작성하나. 내용도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르다"고 반응한다.
⑤ 1주일쯤 후, 최 교수의 주선으로 곽 교육감 포함 세 사람이 인사동에서 회동한다. 식사 후 박 교수가 "단일화 때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도움…"운운하자 곽 교육감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최 교수, 당신이 약속했어? 당신이 책임 져"라는 반응을 보이고 박 교수는 "이럴 수 있느냐"며 언성을 높인다.
⑥ 11월 17일 곽 교육감의 친구 강경선 교수와 김아무개 교수가 박 교수를 처음 만났다. 박 교수는 자신의 선거비용 관련 서류를 들고 나갔다. 5억, 7억 등의 말이 나왔다. 이후 양 측은 여러 차례 더 만나 조건에 대해 얘기했으며 강 교수 등은 "맡긴 돈 달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최대한 줄 수 있는 것이 2억 원이고 그것도 한꺼번에는 안 된다"고 했고 박 교수는 "2억으로는 내가 파산한다. 3억은 돼야 한다"고 맞섰다.
⑦ 2억 원은 2월 22일부터 4월 12일까지 총 6차례에 걸쳐 현금으로 박 교수의 동생에게 전달되었으며 이 돈 중 1억5천은 박 교수 계좌로, 5천만 원은 현금으로 다시 박 교수에게 전달되었다. 일부 돈에 대해서는 차용증을 쓰기도 했다. 박 교수는 수사과정 초기 이 돈이 "후보단일화 명목으로 강경선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진술했으나, (곽 교수 주변의 진보)진영인사들이 만든 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날 공판은 이 대목에서 여러 차례 재판장과 감찰, 변호인단이 확인, 재확인을 거듭했다. 검찰 입장에서는 "단일화 합의명목으로 받은 것"이라는 박 교수의 검찰진술을 유지하고자 애쓰면서 "어제(12차 공판)부터 갑자기 진영 얘기를 하는 것은 곽 교육감을 감싸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검찰의 추궁이 심한 추측이라면서 "민주진보진영 전체가 도의적으로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의미로 단일화 명목이라 한 것"이라는 진술을 확정하려 했다.
'단일화 명목'의 의미를 둘러 산 공방
재판장이 공판진행을 멈추고 박 교수의 조서를 흝어 본 결과, 박 교수는 검찰에서 추가조사를 받을 때 이미 "(진보) 진영 전체의 도의적 책임에 의해 만들어진 돈"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9월 21일 재판부에 낸 피고인 의견서에 "2억 원을 출마비용 빚 갚는데 사용했으나 민주진보진영이 도의적 책무차원에서 마련해 준 것이기 때문에 단일화 대가로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분명히 밝혔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고 보니 곽 교육감이 2억 원 중 출처를 밝히지 않은 1억 원이 어떻게 조성된 것인지 새삼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곽 교육감이 참모들의 단일화 합의내용을 사전에 알았는가 몰랐는가의 문제는 아무튼 8일로 예정된 양아무개, 이아무개, 최갑수 교수간 3자 대질신문으로 확정될 것이다. 하지만 2억 원의 대가성 여부는 도무지 오리무중인 상태로 해를 넘길 것 같다. 2011년을 딱 하루 남긴 30일까지 모두 6번의 기일이 빡빡하게 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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