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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셋 낳은 '죄인'... 내 인생은 멈췄다

[이별, 그 '반가움'에 대하여②] 이젠 '육아'와 이별하고 싶다

등록|2011.12.17 16:40 수정|2011.12.18 13:55
"정민아, 너 진짜 아들 셋이야? 그리고 집에서 살림 해?"


눈 동그랗게 뜨고 묻는 대학 시절 친구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난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너, 솔직하게 말해. 니가 살림만 할 리 없어. 너 '딴짓'도 하지?"

피식 웃었다. 학교 다닐 때 내 모습이 어땠길래 친구는 내가 살림한다는 말을 믿지 못할까? 몇 달 전, 집들이에서 만난 친구 덕분에 나는 학생 때 내 모습이 어떠했나 생각해 보았다.

나는 1989년에 공대에 입학했다. 그래서 4년 내내 남자들이 바글거리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 속에서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만만치 않은 공대 여학생'이 되었다. 남자들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여자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을 하면, "아니, 넌 무슨 애가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고 맞대응을 해야 그날 밤 집에 가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랬던 내가 전업주부에 아이가 셋이라니…. 친구들이 놀라는 것도 어쩜 당연하다.

사실 지금의 내 모습이 낯선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난, 나이 마흔 된 내 모습이 아이 셋 키우는 전업주부일 것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벌써, 첫째는 중학교 2학년,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 막내는 다섯 살이다. 이렇게 내 인생이 바뀌게 된 출발점은 첫 아이 출산이다. 

스물일곱에 시작한 육아... 취업은 '포기'

▲ 감자떡을 사이좋게 나눠먹는 삼형제. ⓒ 강정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스물일곱에 첫 아이를 낳았다. 내가 한 아이의 성장에 제일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엄마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제약이 뒤따르는지 알게 되는 과정은 내게 힘겹고 외로웠다.

점심을 제때 먹을 수가 없었다. 졸졸 따라다니며 안아달라 우는 아기 때문에.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점심때가 되면 내가 먼저 낮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럼 아기는 내 옆에서 놀다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자다 일어나 아기가 깨기 전에 후다닥 늦은 점심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친정 엄마가 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려 친정으로 전화를 했다. 내게 엄마는 "아기 키울 때는 남이 다 차려준 밥 먹는 것도 힘든 거야. 오늘, 밥은 어떻게 챙겨 먹었니?" 하고 물으셨다.

엄마는 또 "옛날에 한 거지 할머니가 어느 집에 동냥을 갔대. 그런데 그 집에서 할머니한테 '힘들게 동냥 다니지 말고 우리 집에서 아기 키우면서 편하게 지내세요' 했대.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동냥 그릇도 버리고 도망을 갔댄다. 아기 키우는 게 제일 힘들다는 것을 할머니는 아는 거지. 오죽하면 그런 이야기가 다 있겠니?" 하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다독여주시고 안쓰러워하셨다. 그렇게 나는 전화통을 부여잡고 그 시절을 버텼다. 그리고 매일 밖에 나가 일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랬다.

아이의 첫돌 무렵, 기다리던 취업을 했다. 6개월 계약직이었다. 다행히 집 근처 국공립 어린이집에 자리가 있어서 그곳에 아이를 맡겼다. 난 보육기관에 돈만 내면 육아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칼퇴근' 해서 어린이집에 뛰어가면 아이는 언제나 혼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아무 예고도 없이 열이 나고 아팠다. 약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어찌 그렇게 감기가 오래갈까 이상했다. 결국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친정에 맡겼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딱 두 달 다녔다. 그때 알았다. 아이 할머니와 같은 분의 도움 없이 맞벌이 부부가 자신들만의 힘으로 아기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내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부부가 같이 벌고 같이 가사를 책임지는 결혼생활의 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가 생각했던 결혼과 현실은 달랐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직장의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나는 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 또 다시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미안했다. 친정 엄마 역시 힘들어하셨다. 아이가 클 때까지 취업에 대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

'아이 셋 낳은 건 자기 재능은 포기한 거지...'

몇 년 뒤, 주말에 잠깐씩 일을 할 기회를 얻었다. 아직 둘째아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나에게 일을 주었던 사람은 자신이 아이가 셋이라 하며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저보다 재능이 많아요. 그런데 아이 키우느라 그 재능을 썩히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본인도 너무 힘들어하죠. 아이들을 빨리 키워놓고 자기 재능을 펼쳐야 할 텐데…."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하지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아이를 셋이나 낳았으면서 또 사회에 나오려 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일까? 아이 셋을 낳은 순간 자신의 재능은 어느 정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사회가 그렇게 아이 키우고 다시 사회에 복귀하려는 엄마들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는 아닌데….'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이제 아이 셋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그 위치에 서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나도 하나의 사회인으로 사회와 직접 관계를 가지고 살고 싶어졌다. 그 욕구는 아이 셋의 엄마라도 똑같이 존재한다. 그때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아이 셋 엄마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셋째를 키울 때, 앞서 두 아이를 키운 경험이 있었지만 여전히 육아가 힘들었다. 서른 후반의 나이라서 몸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격리와 단절이 형벌처럼 느껴졌다. 젖먹이 아이는 한 시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들어갈 때도 젖을 물고 놓지 않는 아기를 안고 들어간 적이 있다. 아이가 어려 유모차를 이용한 외출도 불가능했던 시기에는 베란다 방범창이 형무소의 철창처럼 느껴졌다.

초등학생인 큰아이가 하교하며 싣고 온 바깥 세상의 내음을 맡을 땐 기운이 났다. 심지어는 전화요금 고지서도 나에게는 신선했다. 나와 집은 멈춰 있었지만 그것들은 살아 있었고 향기로웠다. 택배 아저씨의 방문도, 우편물도, 현관 밖으로 배달되는 신문도 나와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고마운 빛이었다.

아이가 유모차를 탈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또 갈증을 느꼈다. 유모차가 다니는 길로만 다녔고 아이가 유모차 외출을 감당할 수 있는 한 시간 안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 내 처지가 꼭 이 도시에 유배당한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속으로 더욱 더 갈망했다. 아이가 자라기만 하면 집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보리라. 줄 끊긴 연처럼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가보리라. 

이제 내 이름 석 자, '강정민'으로 서고 싶다

▲ 아빠 팔순 생신에 맞춰 그린 그림. 이런 그림을 더 배워서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 강정민


첫아이를 낳은 1997년부터 지금까지 만 14년 가운데 취업을 했던 1년을 뺀 13년 동안, 나는 보육시설에도 보내지 않고 세 아이를 집에서 보살폈다. 그 기간 동안 엄마 노릇 하느라 사람 노릇은 못하기도 했다. 몇 해 전, 두 학년 위의 대학 선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선배와 마지막 인사 자리에도 나는 가지 못했다.

장례기간 내내 난 아이들 앞에서 펑펑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었다. 잘 가라고 향 하나 올리지 못한 나는 장례식장에 다녀온 남편보다 선배의 죽음에서 더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알았다. 번잡하고 수고스런 장례의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의식이라는 것을. 할 도리를 다 하지 못한 나는 그 뒤로도 한동안 우울했다. 장례식도 못 갈 정도니 결혼식이나 다른 모임은 또 오죽했을까?

그렇게 사람의 도리도 못하고 육아에 매여 살던 내게 이젠 짧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드디어 막내가 9월에 유치원에 입학을 해서 하루에 네다섯 시간의 자유 시간을 얻었다. 물론 여전히 다섯 식구의 집안 살림은 나의 몫이고 막내는 툭하면 감기로 유치원에 안 간다. 그래도 이 짧은 시간이 내게는 정말 소중하다.

너무 늦기 전에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누구네 엄마', '누구 아내' 말고 내 이름 석 자 '강정민'으로 사회에 서고 싶다.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는 데 내가 작은 변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능력을 갖추는 데 이 소중한 시간을 잘 쓰고 싶다. 그래서 내년엔 그림책 만들기나 동화 쓰기 같은 것들을 배우는 데 이 소중한 시간을 잘 쓸 계획이다. 그런 기대감에 새해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두근두근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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