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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귀의 벼를 아직 못 베었으니 불 지르는 것이..."

[한말 전북의 항일의병사 ⑥] 신출귀몰한 유격전의 달인, 양춘영

등록|2011.12.08 09:31 수정|2011.12.08 09:55

▲ 처음 공개되는 양춘영 의병장 사진 ⓒ 김상기


"피고는 일본제국의 보호를 받음은 한국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사유하고 이에 불만을 품고, 재 한국 일본 수비대를 격퇴함과 함께 일본 관헌과 그 밖의 일본인을 한국 밖으로 추방하고, 정부를 개조해 정치를 변경할 것을 계획했다. 피고는 명치41년(1908) 음력 7월 2일 결의를 하고,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구화촌 회문산에 근거를 두고…."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한말 전북지역 항일의병사에서 가장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의병장 양춘영(1875∼1910). 그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기록만 봐도 그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양춘영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일본군 중위 무로다는 "폭귀 양춘영의 논 11마지기의 벼를 아직껏 못 베었으니 군인을 시켜 불 지르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할 정도로, 그의 남겨진 가족에까지 핍박의 손길을 뻗쳤다.

양춘영은 순창의 회문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방법을 동원, 일본군인과 경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기에 현지의 주민들은 그를 신격시할 정도였다.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대부분 그의 자인 윤숙으로 돼 있고, 때로는 연영, 인영, 또는 춘영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가 의병장으로서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나, 족보에는 춘영으로 기록돼 있다.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신'이라 불린 양춘영

양춘영은 1906년 음력 4월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으킨 병오창의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때 의병 모집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4월 20일에 있었던 전투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익현이 "동족끼리 피를 볼 수 없다"며 해산명령을 내려 의병진이 무너지자, 은신에 들어갔다.

190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재개하고, 1908년 7월 2일에는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활동했던 순창 회문산 근처의 의병들이 모여 '호남의군부'를 조직, 하나의 통합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양춘영은 도총독의 임무를 맡는다. 일본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이때 의병의 총 수는 1200명이었고, 그중 정예병을 선발해 양춘영이 직속부하로 삼았다고 한다.

▲ 순창객사. ⓒ 김상기


의병진을 구성한 뒤 그는 순창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다. 1908년 8월 향관 서기협으로 하여금 22명을 인솔해 무림면 화암리 뒷산에서 일본 헌병 순사 120명과 교전했다. 9월에는 중군 최산홍으로 하여금 40명을 이끌고 남원수비대와 교전케 했다. 1909년 정월에는 후군 이국찬에게 서면 죽전리에 주둔하는 순창수비대를 토벌토록 하고, 2월에는 교련관 한자선으로 하여금 회문산 기슭에 있는 수비대를 토벌토록 하는 등 계속적인 유격전을 벌였다. 그들의 행동은 신출귀몰해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일본은 양춘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1909년 11월 19일에 경찰과 수비대가 합동으로 대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전주 수비대 육군소위 금천계웅과 전라북도 사무관 김진현이 현지에서 쓴 일기를 살펴보면, 양윤숙을 체포하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일기에 따르면, 김진현은 순창군의 인계, 팔등, 구암, 무림, 상치, 하치, 복흥과 정읍의 산내 등 8개 면의 면장들을 모조로 모아놓고, 폭도 토벌작전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힘의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09년 9월부터 일본은 군경 합동으로 대토벌작전을 실시하니 그의 부하들은 거의 체포되거나 사살돼 지리멸렬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단신으로 순창군을 벗어나 멀리 김제군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3일 순창의 쌍치면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대에 의해 김제군 월촌면 봉월리에서 체포되고 만다.

흔한 이정표 하나 없는 쓸쓸한 그의 묘

이로써 그는 1906년 3월에 최익현과 임병찬의 거의에 참여한 이래 4년에 걸친 의병활동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붙잡힌 지 4개월여 만인 1910년 4월 14일 교수형이 집행됐고, 이 사실은 5월 5일 관보에 고시됐다. 대부분의 의병장이 그랬던 것처럼, 양춘영도 36세의 젊은 나이로 망국의 슬픔을 가슴에 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현재 양춘영의 유품으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이는 그의 자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부인이나 아우들이 당한 핍박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화근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했기에 그의 유품은 무엇이든 남기지 않고 모두 없애버렸던 것이다.

▲ 양춘영 묘. 몇년 전 길에서 가까운 양지바른 곳으로 이장이 완료됐으나, 이정표가 없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 김상기


양춘영에게는 상영, 택영이라는 두 아우가 있었다. 이들 형제는 양춘영이 처형당한 뒤에도 온갖 핍박을 받아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옮겨 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양춘영의 무덤은 처음 이들 형제에 의해 고향인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 앞의 선산에 안장했다.

비록 현재도 생가터가 있고, 돼지퉁벙이라는 훈련지도 전해지고 있지만, 이 무덤마저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가 양춘영을 기억할 수 있는 유형의 실체는 아무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 무덤은 80년이 지난 1990년 11월 순창군 인계면 도사리 선산으로 이장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계면 소재지 조금 못 미쳐 대로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지만,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설명문 하나 없어 쓸쓸하기 그지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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