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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보이스피싱, 당하고 나니 섬뜩하네

보이스피싱은 개인의 탓 아닌 허술한 개인정보관리 때문

등록|2011.12.14 21:08 수정|2011.12.14 21:08
오빠가 납치됐다

지난 금요일(9일), 얼추 점심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황하고 긴급한 목소리. 대뜸 나의 안위부터 묻는다.

"오빠, 괜찮아? 지금 어디야?"
"응? 나 지금 외근 나와 있는데? 군포. 왜?"

"휴. 난 또. 방금 오빠를 납치했다고 전화가 왔었거든."
"납치? 나를? 보이스피싱이야?"

"응. 그런가 보네. 엄마가 받았는데 오빠를 납치했다고, 엄마가 오빠 바꿔달라고 하니까 어떤 남자가 신음소리를 내며 울먹거리더래. 그래서 엄마는 또 오빠가 친구들 시켜서 장난하는 거 아니냐며 오빠 친구들 이름을 댔더니 그냥 끊더래."
"어설픈 놈들. 나 아냐. 보이스피싱이야."

그렇게 전화를 끊었건만 또다시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진짜 괜찮은 거지?"
"왜? 전화 또 왔어?"

"응. 그래서 오빠하고 통화했다고 하니까 또 그냥 뚝 끊어 버렸어."
"어설픈 놈들일세. 걱정 마. 나 지금 외근 중이니까. 어머니한테도 신경 쓰시지 말라 전해드리고. 얼른 마누라한테 전화해야겠다."

그렇다.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고 있던 보이스피싱이 내게도 걸려 온 것이다. 메신저로는 몇 번 말을 걸어와서 조금 상대해 주다가 그들이 말하는 통장으로 18원 넣어준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전화로 납치 운운하면서 돈 내놓으라 이야기한 적은 처음이었다.

보이스피싱의 또 다른 진실

보이스피싱의 한 가지 유형메신저 사기 ⓒ 이희동

처음에는 그들의 전화가 가소롭기 그지 없었다. 납치했다는 대상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걸다니. 나의 본가 집 전화 번호를 알았다면 분명 나의 휴대폰 번호도 알았을 터인데 어찌 그렇게 허술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그렇게 어설픈 전화 한 통으로 상대방을 낚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가?

게다가 놈들은 현재 나의 상태도 확인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결혼 후 분가한 지 만 3년이 다 되어가는데, 굳이 아내 대신 어머니께 전화한 것을 보면 결국 녀석들은 나의 결혼 및 분가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어설프게 흐느끼며 나를 연기하다니, 한심한 녀석들. 도대체 이런 전화에 속는 이들은 뭐란 말인가.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위 사건을 곱씹어 보고 있노라니 괜히 섬뜩해지기 시작했다. 마냥 어설프다고 느꼈던 그들의 범죄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한심하다고 느낄 만큼 무식한 그들의 수법을 보자. 앞 뒤 알아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가정집에 전화를 걸어 남편이나 아들이 납치되었다고 말하는 그들.

문제는 아무도 속을 것 같지 않는 이런 범죄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아직까지도 이런 보이스피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 비록 스마트폰 이용자가 2000만 명이 넘는 시대이지만, 보이스피싱은 스마트폰의 보유대수와 상관없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남편이 납치 당했다는데, 자식이 경찰서에 있다는데 하며 황망한 마음에 돈부터 보내는 사람들.

최근에는 입시철을 맞아 대학 입학과 관련된 보이스피싱이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원하던 대학에 추가 합격을 했으니 지금 당장 등록금을 보내라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온다는 것인데, 꽤 많은 이들이 당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입은 그 사람의 일생을 많은 부분 규정 짓는 중요한 행사인데, 보이스피싱은 그 욕망을 이용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개인의 욕망과, 정작 입학에 관련된 행정적 처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개인의 정보력. 결국 보이스피싱은 이 비대칭성의 간극을 전제로 개인의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정보' 관리도 못하면서, SNS 규제는 무슨...

개인정보유출확인 사이트근본적으로 나의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을 수 없는가? ⓒ 이희동


그러나 보이스피싱과 관련하여 더 큰 문제는 범죄의 전제가 되는 개인정보의 유출이다. 결국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불거지고 있는 보이스피싱은 개인정보유출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앞서 열거한 사례서 보듯이 보이스피싱이 이용하는 개인 정보는 우리의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나와 관련된 3년 전의 정보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어떤 개인이 최근 어느 대학을 지원했는지조차도 알고 있는 그들.

이쯤 되면 나의 개인 정보가 어느 선까지 유출되어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그만큼 나의 신상 정보가 쉽게 유통될 수 있는 사회. 혹여 그들은 내가 오늘 아침 무엇을 먹었는가만 빼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지난 12일 인터넷 보안전문가들의 발표는 매우 충격적이다. 그들에 따르면 개인정보보호법이 실시된 지 100일이 지났지만 개인정보 유출 사례는 더욱 늘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한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고급검색을 실시하면, 현재 100개 사이트의 347개 파일을 통해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주소 등 7913명에 대한 개인정보가 노출돼 있으며, 문제의 사이트에 등록된 사람 2명의 이름을 조합해 검색한 뒤 저장된 페이지로 들어가면 노출인원이 적게는 한 명에서 많게는 1377명의 엑셀 파일을 검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공공기관이 가지고 있는 개인정보의 노출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소방방재청과 외교통상부 등 공공기관 34개 사이트에서 1912명의 개인정보가 무방비로 노출된 것으로 나타나 그 비중이 전체 노출에 33%에 달한다고 하며, 충남 Y고등학교의 경우는 학생 262명의 성적과 출신중학교, 주민등록번호를 볼 수 있는 성적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고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정부는 과연 개인의 정보보호를 위한 의지를 지니고 있기는 한 걸까? 이와 관련하여 한 인터넷 전문가의 발언을 보자.

"행정안전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모니터링을 제대로 했다면 바로 삭제됐을 정보다."
"국민의 세금으로 입찰해 진행하는 개인정보 노출 삭제 모니터링이 엉터리라는 반증이다."

요컨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많은 개인정보노출은 정부의 안일함에서 기인한다. 물론 법이 시행된 지 겨우 100일 밖에 지나지 않아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최근 SNS규제를 하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정부의 태도를 상기해볼 때 한심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이미 시행된 개인정보보호법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면서 무슨 SNS 규제인가. 아무리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선 시행한 법부터 제대로 행해야 되지 않는가. 게다가 현재 그 개인정보 노출은 수많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지 않은가.

부디 정부는 헛된 곳에 힘쓰지 말고, 정작 국민들의 안위를 위해서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만약 당신네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개인정보를 제어할 능력도 되지 않는다면, SNS규제는 어림도 없다는 걸 명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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