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선물 받은 장제스, 그가 선택한 답례품은?
[중국근현대사 속 오늘] '발칙한' 장제스 납치 사건인 '시안(西安)사변' 74주년에 부쳐
▲ 시안 화칭츠에 장제스가 머물던 방1936년 12월 12일, 장제스는 새벽 잠옷바람으로 이 방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 김대오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서려 있는 시안(西安) 화칭츠(華淸池)를 둘러보다가 그곳에서 뜻밖에도 시안사변의 총탄 흔적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장제스는 수행 부하들이 다 사살당하자 잠옷 바람으로 뒷산의 동굴에 숨어 있다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은 공산당 소탕작전에만 매진하고 일본은 그 틈을 타 조금씩 중국 침탈의 마수를 본토에까지 드리우고 있을 1930년대 중반. 시안의 한 젊은 장교가 자신의 상관이자 국민당 군 최고사령관인 장제스를 납치하는 전대미문의 발칙한 사건이 발생했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張學良, 1901~2001)과 양후청(楊虎城)이 공산군 토벌 독려를 위해 시안에 온 장제스를 납치, 연금한 바로 '시안사변'이다.
▲ 시안사변 당시의 총탄 흔적시안 화칭츠에는 시안사변 당시의 총탄 흔적이 유적으로 보관되어 있다. ⓒ 김대오
장쉐량은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통일전선 노선에 동조하면서 자신도 항일동지회를 만들어 항일 협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장제스가 지시하는 반공전쟁이 옳은 것인지 회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은 난징(南京)에 있던 국민당 정부에게도, 옌안(延安)에 있던 공산당 정부에게도 쇼킹한 일이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당 정부는 군사적으로 장쉐량을 압박하며 장제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그녀의 오빠 쑹쯔원(宋子文), 장제스의 개인 고문 오스트레일리아인 W.H.도널드를 시안으로 보내 협상에 임하도록 하였다.
공산당 일각에서는 장제스를 처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으나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장쉐량과 안면이 있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시안에 보내 협상을 통해 공산당의 지위를 제고하는 유리한 정국을 조성해 가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납치를 주도한 장쉐량은 즉각 국공내전을 중지하고 국가재건을 위한 대표기구를 조직하여 적극적인 애국, 구국운동을 전개할 것을 장제스에게 요구하였다. 이 밖에도 각지의 정치범 석방, 정치 집회의 자유 보장, 쑨원(孫文)의 유지를 이행할 것 등을 협상조건으로 내세웠다.
결국 장제스는 1936년 크리스마스 날 오후에 석방되었다. 장쉐량은 자신의 행동이 군사반란이 아닌 군대를 동원한 간쟁행위인 병간(兵諫)임을 입증하기 위해 장제스와 함께 난징행 비행기에 동승했다.
결연한 의지로 난국을 헤쳐 나온 장제스는 난징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자신의 '구두 약속'을 지켜 항일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에 응하였다. 그리고 반역자에 대한 처단도 확실하게 했다. 자신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양후청은 대만으로 철수 직전 비밀리에 처단되었으며, 장쉐량은 명령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0년 징역형에 이어 출감 후 대만에서 1991년까지 가택연금을 당했다.
가택연금 중에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이제 시간이 다 되었으니 풀어달라는 뜻으로 '시계'를 선물했더니, 장제스는 아직 멀었으니 집에서 계속 낚시나 하라는 의미로 '낚싯대'를 선물로 보내왔다고 한다.
장제스가 얼마나 시안사건에 대해 통한의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또한 장쉐량의 장제스 납치사건을 용두사미로 끝난 우발적인 군사반란 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시안사변이 없었다면 공산당은 국민당의 토벌작전에 거의 전멸 직전까지 내몰렸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장쉐량의 시안사변은 공산당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국민당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물론 이 거대한 역사 흐름의 밑바탕에는 국공내전보다는 항일투쟁을 염원하는 중국 인민들의 절박한 요구와 막중한 시대적 요청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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